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117

通達無我法者 2011. 2. 21. 23:35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을 자(慈), 비(悲), 희(喜), 사(捨)라고 합니다.

이 네 가지는 자애, 연민, 함께 기뻐함, 평정입니다.


이 중에 자애 수행은 화를 내지 않는 마음으로 하는 사마타 수행입니다.

자애 수행은 입으로만 외워서는 안 되며, 자애로운 마음가짐으로 실행해야 합니다.


만약 성내는 마음으로 자애관을 하면

상대에게 자애가 가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화가 갑니다.

만약 탐욕스런 마음으로 자애관을 하면

상대에게 자애가 가는 것이 아니고 탐욕이 갑니다.


자신이나 남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 하는 수행이

오히려 잘못하면 해로움을 줄 수도 있습니다.


자애관을 할 때는 먼저 자신에 대하여 행복하고,

고통, 원한, 근심이 없기를 바라야 합니다.

타인에 대해서 자애를 보낼 때는

싫어하는 사람이나 애욕을 일으키는 이성은 피해야 합니다.

또한 죽은 자를 대상으로 삼지 말아야 하며,

원한이 있는 자에 대해서도 삼가야 합니다.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면 진정한 자애가 일어나지 않고,

탐욕과 성냄이 일어나서 진정한 자애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늘도 제 14장 “유신견은 어떻게 일어나는가”에 대해서

두 번째 상윳타니까야에 있는 야마까경의 내용을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내용은 생명의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계실 때였습니다.

야마까라는 이름의 어떤 비구에게 문득 아라한이 죽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다만 망각 속으로 사라져버릴 뿐이라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이런 이해와 믿음으로 다른 비구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습니다.

그가 하는 말을 들은 다른 비구들은 부처님께서 가르치지 않은 것이니

법에 어긋나는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충고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야마까는 위대한 스승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모순되고 불경스런

자신의 견해를 완강하게 고집하면서 계속해서 말을 했습니다.

이런 불경스런 논리를 펴는 것을 멈추게 할 수 없었던 다른 비구들이

대장로 사리뿟다께로 가서 그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대장로께서는 크나큰 자비심으로 야마까의 거처로 가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그러한 견해를 편 것이 사실인지를 야마까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오 야마까여, 그대는 아라한이 죽을 때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다만 망각 속으로

사라져 버릴 뿐이라고 하는 그릇된 견해를 가졌다 하는데 이것이 사실입니까?”

야마까는 이러한 질문에 그렇다고 긍정하였습니다.


그러자 대장로 사리뿟다께서 다시 물었습니다.

“야마까시여, 이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알고 있는 그대로 대답해 주기 바랍니다.

물질은 영원하며 변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러자 야마까가 대답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그렇다면 느낌은 언제나 영원하며 변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지각은 언제나 영원하며 변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행은 언제나 영원하며 변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의식은 언제나 영원하며 변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그러자 사리뿟다께서 다음과 같이 질문했습니다.

“그렇다면 야마까시여, 그대는 물질을 영원하지 않으며, 변하는 것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느낌, 지각, 행과 의식을 영원하지 않으며 변하고 매순간 사라지는 것으로 봐야만 합니다.


이제 야마까여, 다시 질문을 할 것이니 생각하는 바대로 말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대는 물질을 아라한이라고 여기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그대는 느낌, 지각, 행과 의식을 아라한이라고 여기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그대는 오온을 아라한이라고 여기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그렇다면 야마까시여, 오온을 제외한 다른 어떤 것을 아라한이라고 여기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야마까시여, 물질을 제외한 다른 어떤 것을 아라한이라고 여기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그렇다면 야마까시여, 느낌을 제외한 다른 어떤 것을 아라한이라고 여기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그리고 야마까시여, 지각과 행을 제외한 다른 어떤 것을 아라한이라고 여기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그리고 야마까시여, 의식을 제외한 다른 어떤 것을 아라한이라고 여기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그렇다면 야마까시여, 위대하신 스승께서 번뇌가 완전히 소멸하고 뿌리 뽑힌 아라한이

죽을 때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다만 망각 속으로 사라질 뿐이라고 가르치셨다고

말하는데 그것이 과연 적절하고 바람직한 이야기 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제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적절하거나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제 누군가가 아라한이 죽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라고

질문하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존자시여, 물질이란 일시적이고, 무상하며, 변하기 마련이고, 영원하지 못한 것이며,

느낌과 지각, 행 또한 일시적이고, 무상하며, 변하기 마련이고,

영원하지 못한 것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또한 의식은 일시적이고, 무상하며, 변하기 마련이고, 영원하지 못한 것입니다.

오온은 일시적이고, 무상하며, 변하기 마련이고, 영원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자 대장로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좋습니다, 야마까시여, 이제 그대는 정견(正見)을 얻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러한 삿된 견해가 있을 때는 두 가지 측면에서 그릇된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로 아라한을 실재하는 개체로 그릇되게 보는 것은 유신견에 해당되며,

둘째로 아라한이 죽을 때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다만 망각 속으로 사라질 뿐이라는 또 하나의 견해는 단견에 해당됩니다.

거기에다 야마까는 열반을 헛된 것으로 간주한 것입니다.


따라서 유신견을 가진 자는 열반에 들 수 없다는 사실이 확실해 졌습니다.

아라한의 임종시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으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견해는

‘열반이란 모든 것이 소멸되고 헛된 상태’라고 하는 단멸론자의 견해와 같습니다.


유신견을 가지는 것은 너무도 두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엄격하게 열심히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자라도

결국 최후에 해탈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견해들은 연기법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 없을 때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수행자여러분!

유신견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지혜가 나야 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존재하는 것들의 일반적 특성인

무상과 고와 무아를 알 때라야 유신견이 소멸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결코 유신견이 소멸되지 않습니다.


유신견의 반대가 무아입니다.

그래서 무아를 알아야 유신견이 소멸됩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무아의 지혜가 나면 깨달음은 있지만,

아라한이 된 자는 없다는 것을 압니다.


아라한은 깨달음의 정신적 수준이지 자격증이 아닙니다.

자격증은 그것을 소유한 자아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격증은 진아, 참나, 주인공과 같은 관념에 불과합니다.

그러한 것들이 있는 한은 유신견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깨달음의 길로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이나 아라한을 한 개인으로 보는 것은 관념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신견입니다.

부처님이나 아라한은 조건 지어진 정신과 물질로 보는 것이

바로 지혜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른 견해입니다.


만약 부처님이나 아라한을 하나의 실체로 본다면 유신견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신견이 아닌 지혜로 본 시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정신과 물질이 원인과 결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만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자아가 있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단지 정신과 물질이 원인과 결과의 과정을 거치고 있는 것만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아라한은 부르기 위한 명칭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아라한은 죽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다만 망각 속으로 사라진 다는 것은 단견으로, 바로 유신견으로 본 것입니다.

바른 견해로 보면 정신과 물질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다시 일어나지 않는 것 뿐 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아가 있다는 시각으로 보는 것과

자아가 없고 단지 원인과 결과만 있다고 보는 시각입니다.


그래서 자아가 있다고 보는 것이 유신견이고

원인과 결과만 있다고 보는 것이 무아입니다.

원인과 결과에는 자아가 없고 단지 조건만 있습니다.

이것이 바른 견해이고 바른 지혜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잠시 사리뿟다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리뿟다 존자는 날란다 지방의 큰 바라문 가문에 태어났으며

출가전의 이름은 우빠띠사였습니다.

사리뿟다라는 이름은 존자의 어머니 이름이 사리였기 때문에

사리의 아들이란 뜻으로 사리풋다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목갈라나 존자와는 어릴 적부터 친한 친구였으며

어느 날 라자가하의 산마루 축제를 보러갔다가

갑자기 삶의 덧없음을 느끼고 함께 출가하여 사문이 되었습니다.


처음 출가해서 불가지론을 펴던 산자야의 제자였는데

다섯 비구 가운데 한분이신 앗싸지 존자가 읊은 게송의 첫 번째 구절을 듣고

수다원과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 게송을 도반인 목갈라나 존자에게 전해주어

그도 수다원과를 얻게 하고는 함께 승가에 들어와 부처님의 상수 제자가 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사리풋다 존자와 목갈라나 존자를 비구들이 본받아야 할

이상적인 제자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제분별경에서 두 상수 제자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설명하셨습니다.

사리뿟다는 아이를 낳는 어머니와 같고,

목갈라나는 갓난아이를 돌보는 유모와 같다.

사리뿟다는 제자들을 가르쳐 수다원에 들게 하고

목갈라나는 더 높은 단계로 이끌어 올려준다.


세존께서는 두 상수 제자, 사리풋다와 목갈라나로 하여금 승가의 일을 분담하여 보살피도록 하시고

여래가 안 계실 때에는 그들이 승가의 일을 책임지도록 하셨습니다.

또한 부처님은 긴요한 사항이 생기면 특별한 임무를 두 상수 제자에게 부여하시는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데와닷타가 웨살리출신의 갓 출가한 비구들을 꼬드겨서 상두산으로 데리고 가자

부처님께서는 두 상수제자를 보내어 데와닷타가 잠시 잠들어 있는 틈을 타서

오백 명의 비구들을 설득하여 모두 되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주석서에 따르면 사리뿟다 존자가 마지막 생에 고따마 부처님의 상수제자가 된 것은

일 아승지 십만 겁 전인, 아노마닷시 부처님 때에 사라하다라는 바라문이었을 때에

목갈라나 존자의 전신인 사리왓따나 왕께 부처님의 상수제자가 되고자 서원을 세웠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본생경을 보면, 사리뿟다는 보살과 함께 생사윤회를 반복하면서 위기에 처한 보살을

여러 번 구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보살이 바라밀을 완성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밀란다왕문경에 따르면 사리뿟다 존자는 수천수만 생애 동안에

보살의 아버지, 할아버지, 삼촌, 형, 아들, 조카, 그리고 친구였습니다.

이토록 인간관계는 끊임없이 서로 마주치기 마련입니다.


부처님은 종종 법의 주제만 제시하시고, 그러면 사리뿟다 존자는 그 주제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법을 하였고 그러한 법문은 부처님의 최종 승인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법의 사령관이라고 불렸습니다.


상수 제자로서 사리뿟다가 한 주요한 임무는 불법을 체계화 하는 일이었고

이것이 아비담마의 시작이었습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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