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116

通達無我法者 2011. 2. 21. 22:43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수행자는 관념을 가지고 보거나 또는 실재를 대상으로 봅니다.

관념은 사마타 수행의 대상이며 실재는 위빠사나 수행의 대상입니다.


만약 실재가 배제되고 관념만 본다면 사실 허상을 보는 것입니다.

무엇이 어째서 어쨌다는 말들은 관념에 속하는 것으로 선입관입니다.

이것은 대상의 실재를 보는 것과는 다릅니다.


길고 짧고, 많고 적고, 높고 낮고 등등은 모두 관념입니다.

실재하는 것은 이런 모양 속에 내재해 있는 성품입니다.

미추, 빈부, 유무, 전후, 대소 등은 모두 관념입니다.

여기에 빠지면 실재하는 성품을 보지 못합니다.


인간의 부귀영화는 관념이고 생로병사는 실재입니다.

관념에서 벗어나 실재를 볼 때만이 비로소 깨달음의 길로 갑니다.

관념에서는 무상, 고, 무아의 법을 통찰할 수가 없으며

실재에서만 무상, 고, 무아의 법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관념과 실재가 함께하는 수행을 하려고 하면

먼저 관념의 중앙에 단단히 고리를 걸어서 놓치지 않고 계속해서 알아차리면

언젠가 실재하는 성품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처음 수행자들은 애써 관념과 실재를 크게 구별하지 않아도 됩니다.

어떤 것이나 대상으로 계속해서 알아차리면

처음에는 관념으로 본 대상에서 나중에는 실재를 알아차리는 수행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늘은 교재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제 14장 유신견은 어떻게 일어나는가에 대해서 공부해 보시겠습니다.


오늘은 12연기의 근본원인인 무명과 갈애보다도 더 무서운

유신견이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유신견은 무명과 갈애를 일으키는 가장 잘못된 견해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견해가 제거되지 않고서는 연기의 회전을 결코 멈출 수가 없습니다.

잘못된 견해란 단지 몸과 마음일 뿐인데 나의 몸과 마음이라고 아는 유신견과

몸과 마음은 변하지 않고 항상하다 는 상견과

몸과 마음은 이 생으로 끝이다 라고 하는 단견이 바로 잘못된 견해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견해를 알아차리는 것이 바로 법을 아는 것입니다.

또한 잘못된 견해를 제거하기 위해서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하는데

위빠사나 수행 중에서도 특히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야 잘못된 견해가 제거됩니다.


주석서에서는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

수행자의 근기에 따라 수행을 선택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신견이 강한 사람은 바로 자아가 강한 사람으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 효과적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신견이란 자존심이 강하고 자기 정체성이 강한 사람으로

심념처 수행을 해서 마음의 무실체(無實體)를 알아야합니다.


유신견이 강한 사람은 천성적으로 강한 사람도 있지만

사회적으로 성공을 한 사람들에게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견해입니다.

돈이나 사회적 지위를 얻거나 학문을 해서 일가를 이룬 사람들은 자신을 대단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자신만의 방정식을 고집합니다.

그래서 성공한 사람은 더 편견을 갖고 다른 사람에게도 자신의 방정식을 적용하려 합니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대게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도 자신의 방정식을 적용하려고 할 때

우리는 사회적 비극이 생기며 가정에 불행을 초래합니다.

이런 경향은 사회지도층 인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자에게도 있습니다.


수행은 비교되지 않는 것이라서 모두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자의 아만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이때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수행자는

수행자라는 상에 걸려서 수행이 발전하지 못합니다.


유신견은 이토록 자신을 속박하는 가장 잘못된 견해입니다.

그래서 성공을 해서 유신견이 생겼다면 그 성공은 이미 성공이 아니고 괴로움이며

가장 나쁜 고질적인 병폐를 손에 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12연기를 공부하셨기 때문에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가 생겼습니다.

바로 이 지혜로 유신견을 제거하는 위빠사나 수행을 시작하셔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유신견이 어떻게 일어나는가에 대해서 본문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는 유명소경(有明小經)에 있는 내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왕사성의 죽림정사에 계셨을 때 그곳에서는 위사카라는 이름의 부자와

후에 비구니가 된 그의 아내 담마디나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위사카는 매일 저녁 붓다께서 하시는 법문을 들으려고 죽림정사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리고 법문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면 사랑스러운 아내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

그들은 팔짱을 끼고 집으로 들어가곤 했습니다.


어느 날 여느 때와 같이 담마디나는 문 앞에 서서 남편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평소보다 다소 위엄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 남편은 부인에게 팔을 내밀지 않았고,

담마디나는 남편의 이런 태도에 마음이 편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잠이 들 무렵이 되어 담마디나는 남편에게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기에

그의 태도가 그토록 심각하고 평소와는 다른지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그 자신이나 아내가 어떤 잘못을 한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의 태도는 좀 더 높은 통찰력을 얻었기 때문에 그렇게 심각해 보이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담마띠나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줄 것이니

만일 그녀가 원한다면 다른 사람과 재혼을 해도 좋다고 말했습니다.

이때 남편 위사카는 수행을 해서 아나함의 도과를 성취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아나함의 도과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위사카가 성취한 아나함의 도과는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얻는 성자의 경지로서

첫째 수다원, 둘째 사다함, 셋째 아나함, 이 단계입니다.

아나함의 과정을 거쳐서 뒤에 아라한이 됩니다.


아나함과는 성인의 4과 중에서 말씀드린 대로 세 번째에 해당되는 과입니다.

아나함과를 불환과(不還果)라고 하는데 죽은 뒤에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고

천상의 정거천에 태어나서 그곳에서 아라한이 되어 윤회가 끊어집니다.

천상에서는 괴로움이 없어 수행을 하지 않습니다.

다만 아나함이 머무는 정거천에서만 천상에서 유일하게 수행을 하여 윤회를 끊습니다.


인간으로 살면서 아나함의 도과를 성취하면

가족과 함께 살 수가 없어서 출가를 하거나 독립하여 수행을 해야 합니다.

만일 부부가 함께 살면 일주일 이내에 죽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출가를 해서 독신생활을 하면서 수행을 계속해서 아라한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미 남편은 모든 감각적 욕망이 여의어서

부인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주고 자신은 출가하겠다는 것을 밝힌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담마디나는 질문하였습니다.

‘부군이시여, 당신은 높은 지혜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이 법은 남자에게만 허락된 것입니까?

여자는 높은 법을 얻을 수 없는 것인가요?’ 하고

이렇게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대답하였습니다.

‘아니오, 부인이시여. 부처님의 법은 모두에게 열려있습니다.’


그러자 아내가 다시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부처님께 가서 법을 들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이렇게 해서 남편은 아내에게 부인이 법을 들을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며칠 후 담마디나 자신도 비구니가 되어

비구니 승가에 들어갔으며 그는 결국 아라한과를 얻었습니다.


비구니가 된 담마디나는 아라한이 되었는데, 아라한의 도과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아나함 도과 뒤에 오는 아라한의 도과는 10가지 족쇄가 불타 버려서

탐진치가 완전하게 끊어진 성인을 말합니다.

이러한 아라한을 공양 받을 자격이 있어서 응공(應供)이라고 합니다.


이 응공은 공양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인데,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아라한에게 공양을 올릴 때 최상의 공덕의 과보가 생긴다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아라한은 다시 윤회를 하지 않습니다.

아라한은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정신적 지위를 말하는 것으로

바로 이 아라한은 있어도 아라한을 얻은 자는 없습니다.

오온은 무상하며 자아가 없기 때문에 아라한을 관념적인 인격체,

즉 실재하는 개체로 보는 유신견은 잘못된 것입니다.


오온은 매순간 조건에 의해 생멸하기 때문에 조건에 의해 소멸할 뿐입니다.

아라한은 부처님의 호칭도 아라한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라한은 스승에 의해서 깨달음을 얻고 위없는 깨달음을 얻지 못합니다.

오직 탐진치 번뇌가 불탄 것은 부처와 똑같습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붓다라고도 하고 세존, 여래라고도 하지만

아라핫따라고 해서 부처님도 아라한으로 불립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나함과를 얻은 위사카와 아라한이 된 비구니 담마디나 사이에 오고 간

몇 가지 질문과 답변이 있습니다.


다음 대화는 아나함이 된 남편 위사카와 아라한이 된 부인 담마디나의 대화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부인은 이미 비구니가 되었고,

또 아라한이 되었기 때문에 남편은 부인에게 스님이라고 부릅니다.


남편이었던 위사카가 질문을 했습니다.

‘스님이시여,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몸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여기서 ‘몸이 있다’ 는 것은 유신(有身)을 말합니다.

아라한인 담마띠나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보시 수행자 위사카시여, 몸이 있다는 유신은 바로 오온입니다.’

그러자 다시 위사카가 질문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유신견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그러자 아라한인 담마띠나가 대답하였습니다.


‘위사카시여, 오온을 잘못 이해하고, 오온을 실재라고 믿으며,

자아, 혹은 나라고 그릇되게 파악할 때 유신견이 일어납니다.’


‘스님이시여, 그렇다면 왜, 그리고 무엇 때문에

유신견이 일어나는 것인지 다시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위사카시여, 부처님의 성스러운 질서에 따르면

첫째로, 속세에 무지한 범부는 성자의 법을 받아들이지 않아

성자의 법에 밝지 못하기 때문에 진리와 조화를 이루지 못합니다.


두 번째로, 범부는 덕이 있는 자나 성자를 가까이 하기를 원치 않아서

법문에 쉽게 접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 물질이 나 또는 자아라고 생각하고

나는 물질이다, 물질 안에 나 또는 자아가 있다, 나 또는 자아 안에 물질이 있다고

그릇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느낌, 지각, 행, 의식을 같은 방식으로 받아들여서 나, 자아 등으로 잘못 이해합니다. 

의식이 나 또는 자아를 가지고 있으며, 의식 안에 나 또는 자아가 있고,

나 또는 자아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위사카시여, 이는 마치 타오르는 불과 그 불에서 일어나는 불빛을 구분하지 못하고

타오르는 불을 불빛으로 오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법문을 들을 기회가 없어서 그것에 정통하지 못하고

무지해서 가르침을 받지 못한 범부는 물질이 나 또는 자아다,

느낌이 나 또는 자아다, 지각이 나 또는 자아다, 행이 나 또는 자아다,

의식이 나 또는 자아다, 라고 보고 이해하며 잘못 믿게 됩니다.

이것이 유신견이 어떻게 일어나는 것인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부인이었던 아라한은 오온을 ‘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유신견이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범부가 왜 유신견을 갖게 되는가를 다시 한 번 요약하면

부처님의 법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그렇다는 것과

덕이 있는 자나 수행자를 가까이 하지 않아서 법문을 들을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법문을 들을 수 없기 때문에 수행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포함된 말입니다.

그리고 오온을 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유신견이 일어난다고 위사카에게 말을 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토록 유신견은 다름이 아니고 오온을

자아 또는 나의 소유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 다시 한 번 오온이

자아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아셔야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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