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141

通達無我法者 2011. 3. 11. 00:20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수행은 좌선과 경행이 아닌

일상생활을 할 때에도 계속되어야 합니다.


구부리고 펴거나, 밀거나 당기거나, 들어 올리거나 놓을 때나,

일을 할 때나 휴식할 때나, 말을 하거나 말을 들을 때나,


운전을 할 때나 공부를 하거나, 청소를 하거나,

설거지를 할 때나, 세수를 할 때나

이빨을 닦는 칫솔질을 하거나 목욕을 할 때나,

화장실에서 대소변을 볼 때도,

하고 있는 것을 모두 알아차려야 합니다.


알아차리는 것이 연속되면 집중력이 생겨

지혜를 얻게 될 뿐만 아니라,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좋은 결과도 얻을 수가 있습니다.


하고 있는 일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리면

나쁜 마음이 생기지 않아서 나쁜 일을 하지 않게 되어

실수가 적고 위험에 빠지지 않습니다.


무슨 일을 하거나 먼저 무슨 마음으로 일을 하는지 알아차려야 합니다.

일은 몸이 하는 것이지만 몸은 마음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을 뿐입니다.


마음이 몸을 움직이게 하지만 몸이 움직이는 것을 다시 마음이 압니다.

그러므로 일하는 것은 몸 같지만 정작 마음이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먼저 일하는 마음을 알아차리고 나서 대상을 알아차려야

마음이 대상을 알아차리기에 충분한 조건을 형성합니다.


평소에 코끼리의 코를 그냥 놔두면

이것저것 시비를 하면서 코를 휘두르기 때문에

코에 막대기를 움켜쥐게 하여 코끼리를 순화시키는 훈련을 시킵니다.


사람의 마음도 코끼리의 코와 같아서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이런 저런 일을 참견하면서 끊임없이 탐욕과 성냄을 일으킵니다.


코끼리의 코에 있는 막대처럼 사람의 마음도 몸을 알아차리게 하여

필요한 일 외에는 다른 것을 하지 못하도록 훈련을 시켜야 합니다.


대상을 알아차릴 때는 알아차리는 마음이 감각 기관에 있을 경우와

대상에 가서 알아차릴 경우와, 안과 밖을 함께 알아차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좌선이나 경행을 할 때는 오직 감각 기관에 마음을 두고 알아차리고,

책을 읽거나 남의 말을 들을 때는 안팎의 중간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특히 운전을 할 때 교통을 위반하는 것은 알아차리지 못한 것입니다.

교통위반은 자신뿐만 아니라 동승자의 생명을 살생하려는 의도이고

또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위해를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일상에서 알아차림을 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보호하고, 더불어 남도 함께 보호해야 되겠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늘은 제 22장,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대상은 몸과 마음입니다.

이러한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모양이 아닌 실재하는 현상을 알아차려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느낌입니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모두 느낌입니다.

느낌은 이렇게 실재하는 법이라서 최고의 법입니다.


느낌은 우리가 숨을 쉬는 공기처럼 항상 있는 것인데

이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실을 사실대로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느낌에 진실이 있음에도 진실을 알지 못합니다.


느낌을 느낌으로 알아차리지 못하면 표상을 만들어서

실재하지 않는 것을 실재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느낌을 느낌으로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에

나의 느낌으로 알아서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느낌을 느낌으로 알아차리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 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느낌이 항상(恒常)하고 영원하다고 잘못 압니다.


그래서 괴로움도 일어난 순간에 사라졌는데도

항상하다고 생각해서 괴로움을 안고 갑니다.

바로 이런 잘못된 견해로 인해서 연기가 회전하는 것입니다.


몸에 있는 느낌을 단지 느낌으로 알아차리지 못하면

마음의 느낌까지 영향을 받습니다.


몸에서 일어난 단순한 느낌을 병이라고 자가 진단하는 경우에는

마음이 두려움에 빠지고 고통을 겪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병을 더 키웁니다.


이것이 느낌을 단지 느낌으로 보지 못하고

나의 느낌이라고 생각해서 오는 피해인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관세음보살은 실재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몸에 있는 느낌이 마음에 영향을 주어서

관세음보살을 상상으로 만들어서 봅니다.


그리고 이런 능력을 법력이 높은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잘못된 견해를 갖게 됩니다.


관념을 대상으로 수행을 하는 사람은

대상과 하나가 되는 근본 집중을 하기 때문에

이런 실재하지 않는 표상을 만듭니다.


실재하지 않는 것을 사실처럼 생각하는 것이 바로 무지입니다.

관념이란 부르기 위한 명칭이고 가설이지 사실은 아닙니다.

몸과 마음의 느낌을 알아차리면 이런 관념이 붙을 자리가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깨달음이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자는 이런 관념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대상의 실재를 느낌으로 알아차리기 때문에

표상을 만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표상을 보지 않고 느낌을 알아차려서

있는 그대로의 진실인 무상을 보는 지혜를 얻습니다.


느낌을 알아차리면 대상과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은 찰나 집중을 해서

존재하는 것들의 속성인 무상과 고(苦)와 무아를 봅니다.


몸에 있는 단순한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도깨비, 야생 짐승, 귀신 등의 초월적 존재를 상상으로 만들어서 봅니다.


무속인이 산신령을 보는 것도 단순한 몸의 느낌을

상상으로 만들어내서 실재하는 인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만들어서 본 표상의 노예가 되기도 합니다.


신(神)과 대화를 한다거나 어떤 초월적 존재와의 대화는

오직 자기마음이 말하고 자신이 듣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느낌으로 알아차리면 이런 허구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몸을 몸이라고 할 때는 관념이지만, 몸을 알 수 있는 실재는 바로 느낌입니다.

이러한 실재를 통하여 몸이 있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느낌입니다.


마음도 느낌으로 알아차리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라고 아는데

그렇지 못하면 항상하며 나의 마음이라고 압니다.


느낌을 느낌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을 나의 마음이라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을 나의 마음이라고 아는 것이 바로 유신견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느낌의 분류는 매우 다양합니다.

느낌은 몸의 느낌이 있고 마음의 느낌이 있습니다.

느낌을 또 다르게 분류하면 맨 느낌과 육체적인 느낌과 정신적인 느낌으로 나눕니다.

느낌은 백 가지, 천 가지, 만 가지가 있지만 모두 이 느낌 안에 있습니다.

사실 108번뇌도 모두 느낌입니다. 그렇다고 본다면 느낌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느낌은 마음과 함께 있기 때문에 느낌을 통하여

마음의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은 비물질이라서 알기가 어려운데

인식할 수 있는 느낌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느낌은 마음을 알 수 있는 창구가 됩니다.


느낌은 마음의 작용이고 이것을 아는 것은 마음입니다.

마음과 마음의 작용은 항상 함께 있기 때문에

마음을 알아차리려고 마음을 기울이면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는 것이고,

느낌을 알아차리려고 느낌에 마음을 기울이면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느낌은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요?

느낌은 세 가지 현상인 감각 기관과 감각 대상과 의식이 부딪혀서 일어납니다.

이 세 가지의 부딪힘을 우리는 접촉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느낌이 일어나는 가장 가까운 원인은 접촉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이 세 가지의 접촉이 있기 마련이고,

이 접촉에 의해서 항상 느낌이 일어납니다.


12연기(緣起)의 원인과 결과를 살펴보면

식(識)을 원인으로 정신과 물질이 일어나고,

정신과 물질을 원인으로 육입(六入)이 일어납니다.

이 때 육입을 육문(六門)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6가지 감각 기관입니다.


다시 육입을 원인으로 접촉이 일어납니다.

이때의 접촉이란 감각 기관이 감각 대상과 부딪히는 것입니다.

감각 기관은 반드시 감각 대상과 부딪혀서 접촉이 일어납니다.


다시 접촉을 원인으로 느낌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느낌이 아닌 것이 없고,

느낌은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느낌이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원인과 결과로 일어난다고 알아야

비로소 잘못된 견해를 제거할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느낌은 일련의 과정을 거쳐서 일어나는 현상이지

누가 일으키려고 해서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연기는 단지 원인과 결과로 일어나는 현상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결국 이 지혜는 연기를 일으키는

어떤 다른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문제를 어떤 초월적 존재에 의지할 것이 못됩니다.


이렇게 알게 되면 세상의 일들이나

자신의 정신과 물질에 대한 모든 의문이 풀립니다.

이렇게 의문이 풀린 상태에서 비로소 바른 집중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 단계에서 본격적인 위빠사나 수행을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느낌을 의도적으로 찾지 마십시오.

접촉이 있는 곳이면 언제 어디서나 항상 느낌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수행자는 단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느낌이라고 아십시오.

수행자가 느낌을 찾는 순간에 알아차림을 놓칩니다.

그리고 느낌을 찾는 것이 바로 갈애입니다.

갈애가 일어나면 느낌을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갈애가 일어났다면 갈애라는 새로운 느낌이 일어난 것을

즉시 알아차려야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수행자들이 느낌을 찾는 것은

색다른 감각적 욕망을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한 느낌을 찾을 때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신성한 느낌을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어디에도 그런 느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느낌이거나 한 순간에 일어났다가 즉시 사라집니다.


위빠사나 수행자가 수행을 할 때 처음에는 대상을 알아차립니다.

이때의 알아차림은 마음을 대상에 보내는 행위입니다.

엄격한 의미에서는 알아차려서 마음이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편의상 알아차린다고 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아는 마음까지를 포함시킵니다.


수행자가 이렇게 대상을 알아차려서 집중력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대상을 느낌으로 압니다.


그런 뒤에 시간이 지나면 이제 대상을 아는 마음만 가지고 있는 단계가 옵니다.

이때가 바로 마음을 알아차리는 단계입니다.


이렇게 되면 몸의 위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대상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단지 어떤 것이나 아는 마음만 있으면 됩니다.


수행자 여러분!

여러분들이 수행을 하다 보면 집중과 지혜의 상태에 따라서

알아차리는 것에 대한 약간의 의혹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이 때 이렇게 이해하시면 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신세계의 미묘한 문제라서

필요한 사람에게 크게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첫째, 수행자는 대상을 알아차리는 시기가 있습니다.

둘째, 수행자는 대상을 느끼는 시기가 있습니다.

셋째, 수행자는 대상을 단지 아는 시기가 있습니다.


이렇게 알아차림에서 느낌으로,

느낌에서 단지 아는 마음으로 갈 때

수행은 조금씩 발전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느낌은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덤덤한 느낌이 있는데,

어떤 감각 기관에서 일어나는 느낌이냐에 따라서

이 세 가지 종류의 느낌이 다 다르게 일어납니다.

그 감각 기관에 따라 일어나는 느낌의 종류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안,이,비,설이라는 네 개의 감각기관이

색,성,향,미의 감각 대상과 부딪힐 때는

덤덤한 느낌이 일어납니다.


둘째, 안,이,비,설 다음의 신(身), 몸이라는 감각 기관이

감각 대상과 접촉할 때는 즉시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몸에서 일어나는 육체적 느낌입니다.


육체적 느낌은 반드시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우리가 누구와 몸이 부딪힐 때는 즉시 불쾌한 느낌이 일어납니다.

반대로 사랑하는 사람과 부딪힐 때는 계속해서 더 접촉하기를 원합니다.


셋째 의(意)라는 감각 기관이 생각이라는 감각 대상과 부딪힐 때는

정신적으로 괴로운 느낌과 정신적으로 즐거운 느낌이 일어납니다.


마음이 대상과 부딪혀서 일어나는 느낌이 바로 정신적인 느낌입니다.

정신적인 느낌은 육체적인 느낌보다 더 강해진 느낌입니다.

그래서 갈애의 수준에서 집착의 수준으로 진행된 느낌입니다.


육체적 느낌에서 좋을 때

정신적 느낌으로 발전하면 ‘좋아서 죽겠네!’ 로 바뀝니다.

육체적 느낌에서 괴로울 때

정신적 느낌으로 발전하면 ‘괴로워서 죽겠네!’ 로 진행됩니다.


이토록 느낌은 덤덤한 느낌으로부터 육체적 느낌으로,

육체적 느낌으로부터 정신적 느낌으로,

어떤 조건이 성숙될 때마다 진행되는 과정을 거쳐서

우리들에게 즐거움과 괴로움을 배가시킵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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