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

1. 안심법문 - 4) 제불여래시법계신(諸佛如來是法界身)

通達無我法者 2007. 4. 11. 17:08

 

 


제불여래시법계신(諸佛如來是法界身)

 



제불여래 시법계신(諸佛如來 是法界身)

입일체중생 심상중(入一切衆生 心想中)

시고여등 심상불시(是故汝等 心想佛時)

시심즉시 삼십이상 팔십수형호(是心卽是 三十二相 八十隨形好)

시심작불 시심시불(是心作佛 是心是佛)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제불여래(諸佛如來)". 제불여래는 바로 모든 부처님이십니다. 모든 부처님이라고 할 때는 수에 제한이 없습니다. 우리가 부처님 했을 때는 무량무수(無量無數)의 헤아릴 수 없는 그러한 우주의 순수생명(純粹生命)!


우리가 부처님을 생각할 때 부처님은 저 어디 밖에 계신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그것은 방편 가르침입니다.

방편(方便)을 떠나서 부처님을 대승적(大乘的)으로 생각할 때는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바로 우주의 생명입니다. 나의 생명인 동시에 동물이나 식물이나 자연계나 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우주 전부의 근원적인 생명이 바로 부처님입니다.


생명이니까 '부처님!'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에 있어서 부처님을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그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 마음이 생명인데 마음의 근본 고향(故鄕)인 동시에 일체(一切) 생명(生命)의 근본(根本)자리가 생명이 아니라고 할 때는 우리 마음이 너무나 건조해져버립니다.

우리 신앙(信仰)의 대상이 생명이 아니라 논리(論理)다, 이치(理致)다, 지혜(智慧)다, 이렇게만 생각할 때는 자기 신앙이 정말로 감성적(感性的)으로 감격(感激)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는 필히 부처님을 내 생명의 근본 생명인 동시에 우주 모든 존재의 근본 생명으로 느끼셔야 합니다.

다시 바꿔서 말씀드리면 우주가 바로 부처님이라 하는 하나의 생명 덩어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시방여래(十方如來)라는 것은 바로 우주 전체를 말하는 것이며 우주 전체의 생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시방여래, 우주 전체의 생명이 "시법계신(是法界身)"이라. 법계라는 것도 우주 전부를 말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라는 것은 바로 어디 다른 데가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라, 별도의 극락세계(極樂世界)가 있어 거기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주가 바로, 부처님은 우주를 몸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계신이라, 부처님 몸이 바로 우주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생각할 때는 일반적으로는 다 자기와 따로 있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므로 심리적으로 항시 불안스럽고, 그 뿐만이 아니라 우리 마음이 부처님과 가깝지 않단 말입니다. 우주의 생명이 바로 부처님이기 때문에 그때는 우리는 누구나 바로 거기에 다 포함됩니다.


부처님은 바로 우주 법계를 몸으로 하시기 때문에 "입일체중생심상중(入一切衆生心想中)"이라. 모든 중생의 마음 가운데 다 들어 계신단 말입니다. 내 마음 가운데나 그대 마음 가운데나 또는 다른 동물, 식물 가운데나 다 들어 계십니다.


우리 불교에서 마음이라고 할 때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사람만의 마음을 마음이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존재가 다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 사람도 마음이 안보이지만 마음이 바로 주인공(主人公) 아닙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산()도 우리는 산으로 보이지만 내내야 산에도 안보이는 산신(山神)이라, 산에 들어 있는 정기(精氣), 산 기운, 산 에너지가 참다운 산의 한 생명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물을 물로만 보지만 물의 정기, 그것은 바로 용왕(龍王)입니다. 물의 정기가 바로 참다운 물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우주도 태양계(太陽系), 은하계(銀河系) 이렇게 구분해서 봅니다. 이런 것은 우리 중생의 분별(分別)로 해서 나누어 놓은 것이지 본래적인 생명 자체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우주가 부처님이라 하는 하나의 생명입니다. 우주가 바로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모든 중생 가운데 부처님, 하나님이 다 들어 있습니다.


"시고(是故)" 그러기 때문에 "여등(汝等)" 그대들이

"심상불시(心想佛時)" 이와 같이 마음으로 부처님을 생각할 때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을 제한되게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우주 생명(生命)이기 때문에 그와같이 광대무변한 부처님을 생각할 때는


"시심즉시(是心卽是)" 이 마음이 곧바로 "삼십이상팔십수형호(三十二相八十隨形好)"라. 이런 것들은 불교 술어이기 때문에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간단히 말씀드리면 이것은 부처님한테 들어 있는 모든 공덕(功德)이 삼십이상 팔십수형호입니다. 우리 마음이 부처님같이 청정하고 번뇌가 없고 자기라 하는 것을 떠나서 무아(無我)의 진리를 안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얼굴도 사실은 석가모니(釋迦牟尼)같이, 예수같이 잘날 것입니다.


사실 성인(聖人)들은 얼굴도 이와 같이 일체 공덕(功德)이 다 들어 있어놔서 사람 얼굴로서 조금도 흠이 없는, 눈이나 입이나 코나 몸 어디나 조금도 흠이 없는, 그런 것을 상징적으로 서른 두가지 큰 상과 여든가지 작은 상이라고 구분을 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바로 뜻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무한의 공덕입니다. 자비(慈悲)나 지혜(智慧)나 능력(能力)이나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다 하고 말입니다. 환희공덕(歡喜功德)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기계만능시대, 물질만능시대에 살고 있어 놔서 기술이면 다고 모두 그렇게만 생각하는데에 너무나 길들여져 있습니다. 사실 물질이 사람 마음까지 지배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우리 인간성(人間性)을 너무나 왜소(矮小)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사람 마음으로 지금 금생(今生)에 나와서 뭘 좀 배우다 다 못 배우고 죽어지지 않겠는가? 이렇게만 가볍게 생각을 해버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쓰는 이 마음이 성자와 더불어서 절대로 둘이 아니라는 것이 그들의 가르침이요, 그들의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지혜도, 자비도, 사랑도, 능력도 예수나 석가와 공자와 더불어서 절대로 다르지 않습니다. 성인과 똑같습니다.

그 아인슈타인같은 천재나 우리나 인간성은 똑같습니다. 다만 개발을 누가 얼마만큼 했는가 하는 그 차이 뿐인 것입니다.


불교가 절대적으로 평등사상(平等思想)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누구나 본래로 잠재해 있고 갖추고 있는 것은 다 똑같다는 것입니다. 대 천재나 우리나 다 똑같습니다.

다만 우리가 게을러서 불교 말로 하면 나쁜 버릇이 많이 붙어서 개발을 미처 못해 있단 말입니다. 불교 신앙이라는 것은 내 본래가 하나님이고, 부처님이다. 이렇게 믿는 것이 불교의 올바른 신앙입니다. 그래야 참다운 대승적인 신앙입니다.

나는 나밖에는 안된다. 이렇게 해서는 대승적인 신앙이 못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부처님을 생각할 때에 어느 제한된 부처가 아니라 '부처님은 모든 공덕을 원만히 갖춘 우주의 생명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만공덕을 갖춘 그 생명이 나한테나 너한테나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흔히 나한테나 너한테나 부처님이 들어 있다고 말하면, 부처님은 본래 무량무변한 그런 공덕인데, 나한테 들어가고 너한테 들어가 있는 것은 그 한 부분만 들어가 있지 않겠는가? 이렇게 보통은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이란 의미는 이것은 물질이 아닙니다. 크고 작고 하는 그런 물질이 아니란 말이니다. 이른바 순수 에너지, 순수한 생명이기 때문에 그 가운데는 많고 적고 하는 그런 대립이 없습니다. 많고 적고 하는 그런 비교를 할 수가 없이 우주에 바로 충만(充滿)해 있습니다.


공기는 지구의 대류권(對流圈)에만 있고 더 올라가면 없는 곳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이라 하는 것은 우주에 언제 어디에나 충만해 있습니다. 내 몸 속에나, 다이아몬드 가운데나 저 태양 가운데나 빈틈도 없이 충만해 있는 하나의 생명 자체란 말입니다.

이렇게 나한테 있는 불성과 석가모니한테 있는 불성이 똑같다. 그래야 불교의 참다운 이해가 됩니다.


이와 같이 그러한 부처님을 생각할 때는 우리 마음이 곧 삼십이상 팔십수형호라. 우리 마음이 그와같이 부처님의 만공덕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어리석어서 다는 느끼지는 못할 수가 있겠지요. 그러기에 "시심작불(是心作佛)"이라. 이 마음으로 부처를 이른다. 이 마음으로 성불(成佛)을 한단 말입니다. 다른 걸로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 마음이 본래 부처인 것이고, 또 부처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이 마음으로 부처가 된다는 것입니다. 부처가 되고 또 동시에 "시심시불(是心是佛)"이라. 이 마음이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불교를 공부할 때 이 시()자를 바로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이것은 '이 시' 혹은 '바로 시' 그럽니다. 어떤 때는 '이것'이라고도 하고, 어떤 때는 '바로'라고도 합니다.

이 마음이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이것은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 있는 가장 중요한 법문입니다.


여러분들한테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을 나누어 드린 적이 있습니다. 정토삼부경 맨 허두에 가서 이와 같이 관무량수경에 있는 법문이 있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이 법문이 팔만사천 법문을 모두 다 포섭해 있습니다. 따라서 제가 앞으로 두고두고 말씀드리는 것도 이러한 법문을 보다 더 부언해서 말씀드리는 것에 사실은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법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선 즉, 참다운 순수한 선 역시 이러한 사상 밑에서 이루어지는 참선입니다.

참선하면 우리가 기운도 있고 잔병도 떨어지고 기분도 좋고 개운하다. 이런 정도는 순수한 참선이 못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부처가 무엇인가를 바로 느끼고서 그 부처의 자리에 마음을 딱 못 박아 두고서 그 자리를 여의지 않는, 자나깨나 남하고 말을 하나 밥을 먹을 때에도 부처님 자리, 하나님 자리를 놓치지 않는 이것이 우리들의 참다운 신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