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습마물(什麽物) 임마래(恁麽來)
습마물 임마래라, 십(什)을 송나라 속음(俗音)으로 하면 습이라 합니다. 습마물은 무엇이란 뜻이고 임마는 어떻게, 어찌해서란 뜻으로 습마물 임마래란 곧 “무엇이 어떻게 이렇게 왔는가”라는 말입니다.
나는 대체로 무엇인가? 또는 너는 대체로 무엇인가? ‘이 무엇’ 이란 문제는 사실은 따지고보면 우리 불교 전부를 들어서 얘기하는 말씀이나 같습니다.
조그만 티끌 하나도 잘 보면은 반야지혜(般若智慧)고, 바로 부처님의 청정법신(淸淨法身)인 것이고 잘못 보면 하나의 티끌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티끌에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중생이 잘못 보는가, 잘 보는가에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깨닫는가 깨닫지 못하는가에 차이가 있을 뿐이지 본래 물(物) 자체에는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따라서, 나란 대체로 무엇인가? 이것만 해답을 바로 내려버리면 모든 문제의 풀이가 다 된다는 말입니다.
습마물 임마래는 어디에 그 연원이 있는가 하면,
南岳懷讓 六祖慧能 初相見時, 六祖問 什麽處來 曰嵩山來 祖曰 什麽物 恁麽來
남악 회양(南岳懷讓 677-744) 선사는 6조 혜능 대사로부터 법을 받은 정통 조사 중 한 분이십니다. 남악 회양이 6조 혜능 스님에게 맨 처음에 뵐 때 6조가 묻기를 “그대는 대체 어디서 왔는고?” 그러니까 남악 회양 선사가 “숭산에서 왔습니다.” 숭산은 그 당시에 노안(老安 또는 慧安 582-709? 五祖 弘忍法嗣)대사가 중생을 제도하였던 곳입니다. 그러니까 6조 혜능 대사가 말씀하시기를 “습마물 임마래요?”
그때의 말씀이 제가 표제로 낸 습마물 임마래입니다. 무엇이 어떻게 왔는고? ‘이뭣고’ 선(禪)의 화두(話頭)도, 원래는 여기가 연원이 있습니다. ‘그 무엇인가? 내가 무엇인가?’ 에는 나(我) 자체가 천지 우주와 같이 연기법으로 중중무진(重重無盡)으로 관계가 있기 때문에 ‘그 무엇인가?’ 에, 그 가운데는 일체 존재가 다 들어갑니다.
따라서 ‘이뭣고’ 선(禪)할 때에 이른바 ‘시삼마’(是甚?의 俗音)할 때는 ‘이뭣고’ 이것이, 바로 내가 무엇인가? 내 본래면목(本來面目)은 무엇인가? 이렇게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금강경오가해서(金剛經五家解序)에 6조 스님의 해석이 있지 않습니까. “나한테 한 물건이 있으되 하늘을 바치고 땅을 괴고, 밝기는 해와 달보다 밝고 검기는 칠보다 검고, 이러한 것이 나와 더불어 있지만 미처 거두어 얻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가?” (有一物 無頭無尾 無名無字 上柱天下柱地 明如日黑似漆 常在動用中 動用中 收不得者 是甚麽)
이와 같이, 본래면목이 무엇인가? 해야지, 그냥 상대 유한적인 것 가지고서 이것인가 저것인가 하면은 그때는 화두가 못되고 참선이 못됩니다. 분명히 습마물 임마래가 되어야 화두가 됩니다.
원래, 원문대로 하면 그 대답을 남악 회양 선사가 못했습니다. 그냥 “숭산에서 왔습니다. 어느 스님을 섬기다가 왔습니다” 이렇게 해서는 참다운 본래적인 문답이 안되겠지요. 그런 대답을 감히 6조 혜능 선사 선지식 앞에서 할 수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남악 회양 선사는 8년 간이나 6조 혜능 대사를 시봉하면서 부단히 수련을 거친 뒤, 자기 본 성품을 깨닫고 나서 혜능 대사께 다시 나아가 “이제는 제가 얻은 바가 있습니다.” 하고 말씀을 드리니까 “그럼 한번 말해보지”
6조 혜능 대사의 말씀 따라서 남악 회양 선사가 대답을 한 말씀이
曰 說似一物卽不中 六祖問 還可修證否 讓云 修證不無 染汚卽不得 六祖曰 只是不染汚 諸佛之所護念 汝亦如是 吾亦如是
-傳燈錄南嶽章-
“설사일물 즉부중(說似一物卽不中)이니다” 설사 하나라고 말씀드리더라도 맞지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어떻게 말로는 능히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의 뜻입니다. 진리란 바로 시공(時空)을 초월하는 것이고 인과율(因果律)을 넘어선 것인데 어떻게 제한된 인간의 말로서 표현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6조 혜능 스님께서 다시 묻기를 “환가수증부(還可修證否)아?” 그러면은 도리어 앞으로 더 닦고(修) 증(證)할 것이 있는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 깨달아 버렸으니까 다시 닦을 것이 없으면 없다고 해야 하겠지요. 이렇게 6조가 물을 때는 벌써 마음으로 인가(印可)를 한 것입니다.
회양 선사가 대답해 드리기를 “수증불무(修證不無)나” 닦고 증하는 것이, 증명하는 것이 없지는 않습니다마는 “염오즉부득(染汚卽不得)이니다” (거꾸로 오염이라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오염즉부득이라) 이것이 오염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오염이란 본래 평등무차별(平等無差別)의 자리, 일여(一如) 평등의 진리를 차별심을 두고서 자타(自他), 시비(是非), 고하(高下), 계급(階級)을 논한다는 말입니다. 원래 내가 없는 것을 있다고 하고, 본래 성품에는 차서(次序)가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 분상에서 중생견(衆生見)으로 자타, 시비, 계급, 차서가 있는 것이지 무명(無明)을 떠난 자리에서는 그것이 없습니다. 높낮이도 없고 계급적인 차별도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깨달은 분상에서는 마땅히 이것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높낮이가 있고 나와 남이 있고 또는 계단을 밟아가는 차서가 있다고 생각하면 옳지가 않습니다. 이 “염오부득(染汚不得)”이라는 말을 깊이 명심해 두시길 바랍니다. 조사어록을 보면 이런 대목이 많이 나옵니다.
“염오즉 부득이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니까 6조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다만 바로 불염오(不染汚) 이것이 제불지소호념(諸佛之所護念)이라” 모든 부처님이 지키고 억념(憶念)하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즉 진리에 합당하니까 모든 부처님이 이것을 옳다고 긍정하고서 지키신다는 말입니다.
“깨달음을 얻은 뒤에 닦음도 있고 증(證)함도 있지마는 다만 오염을 시키지 않고 곧 고하, 시비, 계급을 논하지 않고서 닦는 것이 제불이 호념하는 바라, 그대도 역시 그렇고 나도 역시 그러하도다” 전등록(傳燈錄) 남악장(南岳章)에 있습니다.
남악 회양 선사가 깨닫지 못했으면 이런 말씀을 할 수 없습니다. 비록 깨달았다 하더라도 습기(習氣)까지 몽땅 떼어버리는 완벽한 깨달음이 아직은 못됐기 때문에, 닦음은 또다시 있어야 하고 또한 수증(修證)에 깊고 옅은 심천(深淺)이 있기 때문에 마땅히 닦음이 있긴 있지마는, 그것을 높다 낮다 또는 보살 몇 지(地)라든가 하는 것을 관념에 두어서는 참다운 무염오수행(無染汚修行)이 못됩니다. 우리는 이런 자리를 분명히 느껴야 합니다.
무염오수행이란 것은 분명히 느끼지 못하면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돈오돈수라든가 돈오점수에 관해서 판단의 착오를 일으킵니다. 이것은 굉장히 미묘한 문제로서 논쟁거리가 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신중하고 허심 탄회한 마음에서 깊이 통찰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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