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

[제1장 수증의 제문제] 제1절 돈오돈수와 돈오점수 - 4. 보조의 돈오점수

通達無我法者 2007. 4. 20. 16:29

    

제1장 수증(修證)의 제문제(諸問題)

 

제1절 돈오돈수(頓悟頓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

 

 

    


4. 보조(普照)의 돈오점수(頓悟漸修)


   

그러면 요새 돈오점수(頓悟漸修)파라고 비판하는 보조 스님은 어떻게 말씀했는가? 보조어록(普照語錄)에 있는 보조 스님의 돈오에 대한 해석입니다.

 

頓 悟

凡夫迷時 四大爲身 妄想爲心 不知自己靈知是眞佛也..............一念廻光 見自本性 而此性地 元無煩惱 無漏智性 本自具足 卽與諸佛 分毫不殊 故云頓悟也

-普照語錄- 


“범부가 미혹(迷惑)할 때는 지, 수, 화, 풍 사대(四大)를 몸으로 하고 망상을 마음으로 한다.” 우리 중생이 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대(四大) 원소로 합해진 이것을 자기 몸이라고 하고 자기 망상을 자기 마음이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차별을 떠나서 신령스럽게 깨달은 자기 마음이 바로 참다운 부처임을 미처 모르다가 밖으로 향하는 대상적인 생각을 돌이켜서 자기 본성을 볼 때에, 견성한 자리에서 볼 때는 원래 번뇌가 없고, 번뇌에 때묻지 않은 지성(智性)이 본래 스스로 원만히 갖추어져 있다. 그리고 이 자리는 바로 부처와 더불어서 눈꼽 만큽도 차이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자리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다하고 무량공덕을 갖춘 자리나 삼세제불의 성품공덕이나 조금도 차이가 없다, 깨달아서 얻은 그런 자리란 것은 본래에 있어서는 조금도 차이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아는 것이 바로 돈오(頓悟)라 한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보조 국사도 단경(壇經)에서 말하는 돈오의 도리를 분명히 밝힌 분이라고 볼 수가 있겠지요. 보조 국사는 6조 대사 훨씬 뒤에 나신 분이기 때문에, 단경도 숙독해서 많이 보셨고 또 단경을 대혜어록(大慧語錄)과 더불어서 가장 중요한 전거로 삼았습니다. 그러니 돈오의 뜻 정도를 모를 리가 만무하겠지요.

그렇다면 보조가 주장하는 점수(漸修)는 무엇인가? 돈오를 알았으면 어째서 또 점수를 말했던가? 보조가 점수를 말한 대목입니다.


漸 修

頓悟本性 與佛無殊 無始習氣 難卒頓除 故依悟而修 漸熏功成 長養聖胎 久久成聖 故云漸修也

- 普照 -

 

돈오본성(頓悟本性)이면 여불무수(與佛無殊)나, 문득 자기 본성을 깨달으면 부처와 더불어서 조금도 차이가 없지마는, 무시습기(無始習氣)라, 과거 숙세 무시(無始) 이래로 우리가 익혀 내려온 번뇌의 습기가 있다는 말입니다. 부처와 나와 둘이 아니고 천지와 더불어서 둘이 아니라는 그런, 때묻지 않은 진리를 분명히 느끼고 깨달았지마는 가사, 우리가 풀을 뽑지 못하고서 우듬지만 베어버리면은 그냥 다시 또 뿌리가 나오듯이, 이것이 구생기(俱生起)번뇌 아닙니까, 우리가 금생에 나와서 보고 듣고 생각하고 배우고 이런 것은 분별기(分別起)번뇌로서, 분별기번뇌는 물론 단박에 끊어졌다 하더라도 구생기번뇌는, 전생과 더불어 지어온 본능적인 번뇌는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 큰스님들도 역시 법은 분명히 아는데 행위로 볼 때에는 문제가 있는 분도 있습니다. 그것은 습기를 미처 못 녹인 때문입니다. 깊은 선정(禪定)을 미처 얻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해탈에 있어서 꼭 지혜해탈(智慧解脫), 선정해탈(禪定解脫)을 분명히 구분하여 생각해야 앞으로 공부하는데 방황하지를 않습니다. 지혜해탈과 선정해탈을 분명히 모르면 암증선이라, 암중모색을 합니다.


저는 그런 것을 여러 군데서 봤습니다. 일본 선서(禪書)에서 보면, 중흥조라고 할 수 있는 그런 분도 역시 암중모색하는 대목이 있다는 말입니다. 일본 임제종의 중흥조라고 하는 백은(白隱 1685-1786)선사는 선관책진(禪關策進)을 아주 굉장히 위대한 책이라고 찬양하였지만 이 분도 자기가 증오(證俉)한 것에 관해서 “대오십팔번(大悟十八番)하니 소오부지수(小悟不知數)라” 큰 깨달음은 18번이나 있고 작은 깨달음은 수없이 많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것이 진짜 깨달음인가? 우리가 회의를 갖겠지요.

따라서, 공부하는 우리 출가사문들은 특히 수증(修證)문제, 어떻게 닦고 증()할 것인가에 있어서, 문득 부처와 더불어서 둘이 아닌 자리를 깨달았다 하더라도 무시습기(無始習氣)라, 과거 숙세 무시 이래로, 무시 무명으로부터 오염된 우리 본능을 꼭 생각해야 합니다.

   

저는 이렇게 나이가 벌써 황혼입니다마는 그 무시(無始) 번뇌가 얼마나 깊은가를 그야말로 참 뼈저리게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인간의 욕심 뿌리는 얼마나 깊고 진심(嗔心) 뿌리는 얼마나 지독한 것인가 말입니다. 남들이 저 같은 사람을 칭찬을 할 때는 속으로 굉장히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과연 저한테 욕심 뿌리가 다 가셨는가? 또는 진심(嗔心)의 뿌리는 다 뽑혔는가? 이렇게 반성할 때는 분명히 다 못 여읜 줄을 통감하게 됩니다.

욕심 뿌리가 다 나가고 진심(嗔心)뿌리가 다하고 치심(痴心)뿌리가 다했을 때는 그냥 즉시에 바로 무량공덕을 갖추어서 분명히 삼명육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불경을 보면 다 그렇습니다.

   

무시습기가 난졸돈제(難卒頓除)라, 졸지에 문득 제거하기가 쉽지가 않다는 말입니다.

어록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견도여파석(見道如破石)이요” 우리가 진리의 이치를 깨닫는 것은 돌을 깨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마치 돌을 깰 때는 순간에 파싹 깨지듯이 견도할 때는 문득 활연대오(豁然大悟)해서 훤히 깨달아 버리지만 “수도여우사(修道如藕絲)라” 우리가 연뿌리를 딱 분지르면 연뿌리라는 것이 실이 있어서 그냥 안 분질러집니다. 끈끈하니 실이 나옵니다. 그와 똑같이 수도(修道)할 때는 쉽지가 않습니다. 수도도 돌 깨듯이 되는 것이 아니라 습기를 녹일 때는 오랫동안 두고두고 녹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더구나, 선방에서 오래 공부 정진한 구참 스님들은 제가 느끼고 있는 그 사무친 것을 분명히 느낄 것입니다. 이놈의 욕심이 뿌리가 얼마나 긴가 말입니다. 공부를 좀 했다 하더라도 기분이 사나울 때는 그냥 또 진심(瞋心)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삐죽이 나오게 됩니다.

   

습기, 이것은 졸지에 바로 제거할 수 없기 때문에 의오이수(依悟而修)라, 깨달음에 의지해서 닦는다는 말입니다. 깨달은 그 자리에서 분별 시비를 떠나서 닦는 무념수(無念修)입니다. 본래는 석가와 나와 둘이 있는 것도 아닌 것이고, 달마와 나와 다른 것도 아닌 것이고, 석가가 높고 내가 낮은 것도 아닌 것이고, 본래 분상에서는 둘이 없는 자리를 느끼고 닦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무염오(無染汚)수행이라 합니다. 무념수와 무염오수행은 같은 뜻입니다.

깨달음에 의지해서 닦으면 점훈공성(漸熏功成)이라, 점차로 훈수(熏修)해서 공덕이 성취가 된다는 말입니다.

   

훈습(熏習)은 번뇌가 우리 잠재의식에 가라앉는 것이고 훈수(勳修)는 우리가 부처님의 지혜로 해서 닦아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구분이 있습니다.

이렇게 훈수하면, 깨달은 그 자리를 안 놓치고서 닦아 나갈 때는 공덕이 성취가 되어서 장양성태(長養聖胎)라, 성자의 태를 오랫동안 길러 나간다는 말입니다. 성인 자리에서는 자타, 시비, 구분이 다 없는 자리라고 우리가 분명히 느껴버리는 그런 성태(聖胎)를 두고두고 오랫동안 닦아 나가는 것 입니다. 장양성태는 우리가 공부하는 분상에서 지킬 중요한 성구(聖句)입니다. 사량(思量) 분별로 닦는 것이 아니라 무념수(無念修)로 닦는 수행을 성태장양이라 합니다.

이렇게 닦아나갈 때는 구구성성(久久成聖)이라, 두고두고 일구월심(日久月深)으로 닦아 나가서 비로소 참다운 구경지(究竟地)인 성인(聖人)의 지위가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성자(聖者)와 범부의 한계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문득 깨닫는 그 자리부터서 성자라고 합니다. 왜 그런고 하면 진여불성 자리를 현관(現觀)이라, 바로 현전에 증명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그때는 벌써 성자입니다. 그러나 불지(佛地)를 성취한 성자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습기 때문에 두고두고 일구월심으로 닦아야 참다운 구경각(究竟覺)을 성취하기 때문에 고운점수(故云漸修)라, 고로 점차로 닦는다고 한다는 보조 국사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 도리는 화엄경에서 말씀한 도리하고도 똑같고 또는 달마 때부터서 6조 혜능까지의 말씀하고도 틀림이 없습니다.

다만 돈오돈수란 말도 단경에 있기 때문에 “돈오돈수하고 돈오점수는 근본적인 차이다” 이렇게 생각할는지 모르겠지만 무염오수행(無染汚修行) 도리를 분명히 느낀다면 하등의 논쟁거리가 될만한 차별은 없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뒤에 또 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