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

[제1장 수증의 제문제] 제1절 돈오돈수와 돈오점수 - 6. 견성(見性)

通達無我法者 2007. 4. 20. 16:31

 

제1장 수증(修證)의 제문제(諸問題)

 

제1절 돈오돈수(頓悟頓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

 

 

 

    


6. 견성(見性)


   

다음에는 견성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견성을 단경(壇經)에서는 어떻게 말했는가?


見 性

若悟自性 亦不立菩提涅槃 亦不立解脫知見 無一法可得 方能建立萬法 若 解此意 亦名佛身 亦名菩提涅槃 亦名解脫知見 見性之立亦得 不立亦得 無滯無碍 應用隨作 應語隨答 普見化身 不離自性 卽得自在 神通遊戱三昧 是名見性

 -壇經-


“만일 자성(自性)을 깨달으면, 보리(菩提) 열반(涅槃)이란 것도 세울 수가 없고” 모두가 하나의 평등 무차별의 진여불성 세계인데 보리고 열반이고 할 것이 있겠습니까? “또한 해탈지견(解脫知見)이라고도 할 필요도 없고 어느 법이라고 특별히 내세울 필요도 없고 진실로 일체 만법을 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렇게 해석할 때에는, 바로 그것이 부처의 몸인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한 법()도 세울 수가 없고 느낄 수도 없는 자리, 보리고 열반이고 해탈지견이고 또는 무슨 법이고 만법이고 이것이 모두가 다 하나의 진리거니 어느 것도 세울 것이 없는 이것을 우리가 이대로 해석할 때는 이것이 바로 부처의 몸이고, 부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이 바로 보리고 열반이고 해탈지견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견성한 자리에는 어느 것도 가히 세울 것이 없기 때문에 조금도 막힘이 없고 거리낌이 없다. 그래서 하는 짓 모두가 다 걸림이 없이 여법히 행동하고 또한 누가 물으면 조금도 걸림 없이 척척 진리에 맞게 대답하고 또한 두루 화신을 나투어 상대적인 몸을 나타낸다 하더라도 자성을 떠나지 않고, 즉득자재 신통유희 삼매(卽得自在 神通遊戱 三昧)라” 모두가 다 조금도 조작(造作)이 없는 이른바 임운등등 등등임운(任運騰騰 騰騰任運)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불교를 공부할 때 조작(造作)이란 말과 임운(任運)이라는 상대적인 말을 기억해 두면 편리합니다. 우리 중생이 애쓰고 하는 것을 조작이라 하고, 깨달은 분들이 자기 마음대로 행해도 법도에 걸림이 없는 자리를 임운이라 합니다.

깨달은 분상에서는 그야말로 참, 임운등등 등등임운이라, 당당하지마는 조금도 막힘이 없고 누구한테 꿀릴 필요도 없다는 말입니다. 달마한테 꿀릴 필요도 없고 석가한테 꿀릴 필요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증오(證悟)를 했다 하더라도 불성(佛性)만 깨달았을 뿐인 것이지 때묻어 있는 다생겁래(多生劫來)의 습기까지는 다 못녹였다는 그런 점은 또 우리가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하겠지요.

   

시명견성(是名見性)이라, 이것이 바로 견성이라는 말입니다. 아무것도 세울 것도 없고 고하, 시비도 없는 임운등등 등등임운으로 신통유희 삼매라, 이것이 참다운 견성이라는 말입니다. 같은 견성에도 견성한 그 자리, 근기 따라서 천차만별입니다. 그러기에 또 문제가 복잡합니다. 생각을 깊이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세존(世尊)께서는 보리수 아래에서 견성하실 때에 모든 것을 다 깨달은 구경각(究竟覺)을 그대로 성취를 한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심심미묘(甚深微妙)해서 부처님 깨달음까지도 시비를 거는 분이 있습니다. “수하성도(樹下成道)하신 부처님 깨달음도 아직 완전무결한 것이 못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설산에 있는 총림방중(叢林房中)에 다시 들어가서 기다리고 있는 진귀조사(眞歸祖師)한테 법을 물어서 비로소 완전히 깨닫게 되었다”고 하는 학설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참 골치가 아픈 문제 입니다.

또 이런 학설이 지금까지도 우리 한국승가(韓國僧伽)에서는 상당히 권위 있게 흘러오고 있습니다. 지금 전거(典據)로는 사굴산(奢堀山) 개조(開祖)인 범일(梵日 810-889) 대사가 이런 말씀을 했다고 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1293 高麗天 著)에 나와 있습니다. 중국이나 또는 인도에는 없는 그런 학설이 한국 승가에서는 상당히 권위 있게 전수가 되었습니다. 특히 이조 말엽에 백파(白坡 1767-1852) 스님 같은 분은 이 학설을 굉장히 권위 있는 학설로 인용도 하십니다.

그러나 이 학설을 우리는 하나의 상징적인 것으로 생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중국에나 인도에서도 전거가 없는 것을 한국에서 비로소 발설했다는 것이 나쁜 쪽으로 비판이 안되고 상징적으로 좋게 해석이 되겠지요.


아무튼, 깨달음도 여러 차이가 있습니다. 갑이란 사람 깨달음 또는 을이란 사람 깨달음이 물론, 평등 무차별의 불성 자리는 똑같으나 얼마만치 습기를 많이 녹이고 깨달았던가의 차이입니다.

깨닫는 문제의 심천(深淺)은 역시, 가장 권위 있는 전거로는 화엄경의 십지(十地)론으로, 보살 초지부터서 2지 3, 4지 10지에 올라가서 구경각 불지(佛地)에서 성불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깨닫는 것이 근기 따라서 보살 초지만 깨닫는 분도 있고 또는 2지를 깨닫는 분도 있고 또 하나 3, 4지까지 깨닫는 분도 있고, 이렇게 차이가 있습니다.

   

견성에 대해서 말씀을 하다 말았습니다만 이제는 견도(見道)라, 이것도 역시 굉장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견성, 견도는 어떻게 차이가 있는 것인가? 이런 문제도 조사어록에는 조금 달리 나와있다 하더라도, 뜻을 깊이깊이 본질적으로 해석을 하여야 합니다. 문자란 것이, 착()해버리면 큰 병이 되지만 착하지 않으면 그야말로 술술 다 풀려가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임운자득(任運自得)이 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