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

[교상과 수행론의 변천] 제1절 근본불교의 교상변천 - 1. 근본불교

通達無我法者 2007. 4. 20. 16:48

 

 

제2장 교상(敎相)과 수행론(修行論)의 변천


제1절 근본불교(根本佛敎)의 교상변천(敎相變遷)

 

 



1. 근본불교(根本佛敎原始佛敎)



               上座部十二派 ┐(佛滅後 一百年頃)

   原始佛敎 │                        │ 部派佛敎

                  └ 大衆部八   派 ┘

               ┌ 說一切有部 ┐(佛滅後 四百年頃)

   上座部  ├ 經   量   部 印度內發展

               └ 分別上座部 南方諸國發展

   大衆部…大乘佛敎發展的 解消


   

대체로 우리 출가사문들은 근본불교도 다 공부를 하였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만 이번 기회에 근본불교의 체계를 한번 재확인하기 위해서 아주 간략히 살펴보겠습니다.

   

근본불교는 바로 원시불교를 가리켜서 말합니다. 원시불교는 상좌부(上座部)와 대중부(大衆部)로 구분하는데 상좌부에는 12파가 있고 대중부에는 8파가 있어서 20부파가 성립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불멸(佛滅) 후, 부처님께서 열반 들으신 후 약 100년경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 부파로 나눠졌다고 해서 부파불교(部派佛敎)라고도 합니다.

부처님은 인천(人天)의 도사(導師)가 되셨지마는 열반에 드신 후에는 중생 근기가 하열(下劣)하기 때문에 나름대로 의견을 세워서 이와 같이 부파가 필연적으로 나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옛날도 그랬는데 하물며 현대는 더욱 더 복잡다단한 시대이기 때문에 우리가 정말로 때묻지 않은 반야 지혜로 분명히 밝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개인적으로도 공부가 더디고 또는 종단적으로도 여러 문제가 발생되는 것은 그런 도리를 잘 밝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도리에서 볼 때에는 모두가 헛된 일이 대부분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러는 것인가? 자기한테나 남한테나 문중한테나 종단에게나 국가적으로나 아무런 필요가 없는 일들이 허다합니다. 참다운 부처님의 반야 지혜를 분명히 잘 몰라서 그러는 것 입니다. 따라서, 우리 출가사문들은 그런 것을 명심해서 현상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는 참다운 지혜를 꼭 갖추어야 합니다.

   

사실, 저는 감탄한 것이 그리이스 종교나 철학이나 더듬어 볼 때에 그 모두가 약간의 표현은 다르다 하더라도 거의 다 같은 요지입니다. 플라톤(platon 427-347 B.C.)의 태양과 동굴의 비유는 유명한 비유입니다. 태양은 참다운 철인들의 바른 지혜로 비유되고 동굴은 바른 지혜를 모르고서 감각적인 것에만 구속된 생각, 미망(迷妄)에 허덕임을 의미합니다. 태양 광선같은 바른 지혜가 범부의 눈에는 안 보입니다. 따라서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석가모니 부처님을 위시해서 삽삼조사가 고구정녕으로 분명히 밝히셨고 또는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리이스 철인들도 모두 그랬습니다. 피타고라스(Pythagoras 582?-5OO? B.C.)나 엠페도클레스(Empedokles 495?-435? B.C.)나 또는 헤라클레토스(Herakleitos 390?-3IO? B.C.)나 모두가 조금씩 차이는 있으나 다 같은 도리로, 요지는 세속적인 것을 초월해서 참다운 본체인 근본적인 진리로 돌아가 도덕적 행위를 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범부인 한에는 지금 동굴에 있습니다. 아닌 것을 옳다하며 감각적인 것에 구속되어 있습니다. 내 몸뚱이가 대체로 무엇이며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런 것이 실지로 있지가 않습니다.

   

근대 철학, 이른바 실존철학의 비조(鼻祖)라고 볼 수 있는 키에르케고르 (Kierkegaard 1813-1855)도 감각적인 것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런 말씀이 하도 마음에 내켜서 가끔 인용합니다만, 우리 중생들은 지금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고 있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은 무엇인가? 우리 눈앞에 보이는 현상적인 모든 것이 사실로 있지 않은 것을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범부가 볼 때는 명명백백하게 있지만, 성자의 바른 반야로 볼 때는 또 역시 명명백백하게 비어 있는 것입니다.

성자의 가르침을 온전히 수용하지 않고서 속물을 미처 못떠날 때는 결국은 지금 동굴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아무런 소용이 없는 소모를 하는 아집(我執)이 있고 법집(法執)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400년경에 상좌부는 다시 설일체유부(說-切有部)와 경량부(經量部)로 구분되었습니다.


설일체유부는 내가 비었다는 아공(我空)은 말씀하지만, 오온(五蘊)이나 모든 법은 그대로 있다[法有]고 보는 견해입니다. 이른바 유()적인데 치우쳐 있고 논장(論藏)을 주로 합니다.

경량부는 부처님 경전을 주로 하고 유()적인 주장을 조금 덜하고 공()쪽에다 역점을 두는 차이가 있는데 모두 인도 내에서 발전되었습니다.

분별상좌부(分別上座部)는 지금의 스리랑카나 또는 태국 등 남방제국으로 발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대중부(大衆部)가 나올 때는 계율상 문제 해석의 차이 때문에 대중부가 나왔습니다. 어느 때나 보수와 혁신이 있듯이 그 당시 불교계에도 보수와 혁신이 있어서 보수파는 상좌부고 혁신파는 대중부 입니다. 대중부는 계율론에서도 역시 보다 더 관용적이고 융통성 있는 해석을 했었습니다. 따라서 이 대중부는 나중에 대승불교로 발달을 했습니다.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나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