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

[교상과 수행론의 변천] 제2절 근본불교의 교리요강 - 1. 제법의 분류

通達無我法者 2007. 4. 20. 16:50

 

 

제2장 교상(敎相)과 수행론(修行論)의 변천

 

제2절 근본불교(根本佛敎)의 교리요강(敎理要綱)


 

  


佛敎原始部派小乘大乘을 막론하고 一貫된 문제가 있으니 그것은 人生宇宙構造를 밝히는 理論哲學敎相門人間幸福解脫實踐哲學觀心門이다.


   

근본불교의 교리 요강도 우리가 알아두면 대승불교 체계를 세울 때나 자기 공부를 점검할 때도 필요한 대문이 많이 있습니다.

불교는 원시ㆍ부파ㆍ소승ㆍ대승을 막론하고 일관된 문제가 있으니 그것은 인생과 우주의 구조를 밝히는 이론 철학인 교상문(敎相門)과 또는 인간의 행복과 해탈을 위한 실천 철학인 관심문(觀心門)입니다. 불교는 크게 나누면 결국은 이론과 실천인 교상문과 관심문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무슨 종()이라 하면 그 종파는 부처님의 일대시교(一代時敎)를 자기들 종지에 따라 비판해서 한 체계를 세우는 것이 교상문입니다. 그리고 정작 해탈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어떤 체계를 세운다 하더라도 해탈하는 법문이 없으면 안되겠지요. 그래서 해탈하는 법문이 이른바 실천 철학인 관심문인 것입니다.



1. 제법(諸法)의 분류(分類)


人生宇宙의 모든 것을 一切諸法이라 하며 이를 因緣生滅에 따른 有爲法因緣生滅을 여읜 無爲法으로 大別한다. 그리고 有爲諸法具體的으로 分類하여 五蘊 十二處() 十八界라 하고, 보다 具體的分類五位七十五法이라 한다.


인생과 우주의 모든 것을 일체제법(一切諸法)이라 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어 있는가, 하는 제법의 분류법이 있습니다.

먼저 제법(諸法)을 인연생멸(因緣生滅)에 따른 유위법(有爲法)과 인연생멸을 여읜 무위법 (無爲法)으로 대별합니다.

다 아는 문제지만 일차 한 체계를 언급하니까 이런 법문을 말씀 드립니다.

그리고 유위의 제법을 구체적으로 분류하여 5온 12처(12입)ㆍ18계라 하고 보다 구체적인 분류를 5위 75법이라 합니다.

   

여러분이 5온ㆍ12처ㆍ18계는 다 아는 것이니까 생략을 하고 보다 구체적인 5위 75법만 살펴보겠습니다. 물론 나중에 더 발전되어서 유식(唯識)에서는 5위 100법으로 구분합니다. 그러나 100법이라 하더라도 내나야 5위 75법을 보다 구체화시킨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법은 유위법과 무위법으로 나뉘는데, 유위법은 상대 유한적인 법이고 무위법은 상대 유한적인 상을 여읜 무위 적멸의 법이라는 말입니다. 유위법은 72가지가 있고 무위법은 3가지가 있습니다.

   

유위법 즉 상대 유한적인 법에는 색법(色法)ㆍ심왕법(心王法)ㆍ심소유법(心所有法)ㆍ심부상응행법(心不相應行法)이 있습니다. 심왕법은 이것은 우리 마음의 주체요, 심소유법은 마음의 주체에 따라서, 주체의 용()으로 이루어지는 법으로 심왕이 소유하는 법이라는 말입니다. 심부상응행법은 심법도 색법도 아닌 법이 심부상응행법 입니다.

색법은 열하나인데 5근()인 안ㆍ이ㆍ비ㆍ설ㆍ신과 5경()인 색ㆍ성ㆍ향ㆍ미ㆍ촉 그리고 무표색입니다. 무표색(無表色)은 인간의 안목에는 볼 수 없는 미묘한 능력을 갖는, 표현되지 않는 색을 말하는 것입니다. 가사, 우리가 오계(五戒)를 받으면 5계를 받았다는 보이는 흔적은 없다 하더라도 우리 몸이나 마음에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훈기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계체(戒體)라고 하는데 이런 것이 무표색에 해당합니다. 우리 인간의 안목에는 안 보이지만 하나의 능력 있는 에너지로 존재하는 그런 것이 무표색이라는 말입니다.

   

심왕법은 안식ㆍ이식ㆍ비식ㆍ설식ㆍ신식ㆍ의식인 6식()이고, 심소유법 가운데 대지법(大地法)은 우리가 받아들이는 감수〔〕하고 상상〔〕하고 사고〔〕하고 촉감〔)하고 욕〔〕심을 내고, 지혜 분별〔〕하고 또는 생각〔〕하고 뭘 하겠다는 의욕〔作意〕을 내고 보다 더 분명한 해석 〔勝解〕을 하고 마음을 한군데 모으는 삼마지(三摩地)인 것입니다.

   

다음 대선지법(大善地法)은 우리가 착한 일 할 때, 착한 마음은 항시 대선지법이 근본이 됩니다. 이것은 믿음〔〕과 부지런함〔〕과 자()ㆍ타()에 부끄러워하는 것〔·〕, 또는 무슨 일에 대해 허망한 것이거니 하고 집착 않는 것〔〕 탐심을 안 내고〔無貪〕, 진심을 안 내고〔無瞋〕 남을 해롭히지 않고〔不害〕, 몸도 마음도 가벼워서 모든 것을 능히 해낼 수 있는 감당하는 능력인 경안(經安)이 있곤 그리고 불방일(不放逸)이라, 흐트러져서 긴장을 풀고 아무렇게나. 무질서한 행동을 안 하는 것입니다.

공부 정진으로 경안을 얻은 사람들은 별로 피로를 못 느낍니다. 설사 무리해서 피로해도 조금 쉬면 바로 풀려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참선하는 공덕이니까 꼭 참선을 해서 한사코 경안은 얻어야 합니다.

   

다음 대번뇌지법(大煩惱地法)이라, 모든 번뇌는 이 대번뇌지법에 근거해서 이루어집니다. 진리를 모르는 무명(無明), 방종하는 방일(放逸), 게으름 부리는 해태(懈怠), 진리에 대해서 믿음이 없으며 남을 못믿는 불신(不信), 꾸벅꾸벅 조는 혼침(혼沈), 분별시비하는 도거 (掉擧)입니다.

그리고 대불선지법(大不善地法)입니다. 우리는 대불선지법에 대해서 특히 주목을 많이 해야 합니다. 우리가 나쁜 행동을 할 때는 대불선지법이 근거가 됩니다. 이른바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입니다. 남한테 욕을 하고도 마음에 가책도 안 받고 파계무참(破戒無慙)한 일을 한 뒤에도 “이런 것은 다 허망하지 않는가, 원래가 상이 없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본체에서는 허망하다 하더라도 한번 업을 지어놓으면 그것이 업 종자가 됩니다. 따라서 그놈을 뗄려면 우리 스스로 굉장한 수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본래 부처인데도 금생에 나와서 쉽게 깨닫지 못하는 것도 그거 아닙니까? 자기 스스로 반성해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남한테 대해서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 무참(無慙) 무괴(無愧)를 명심해서 불선지법(不善地法), 불선지 행동은 안 해야 합니다.

   

다음 소번뇌지법(小煩惱地法)이라, 대번뇌지법에 대해서 정도가 조금 더 미약한 것이지요. 분노〔忿〕하고 숨기고〔〕 인색하고〔〕 질투〔〕하고 괴로워〔〕하고 해〔〕치려 하고 한〔〕을 품고 아첨〔〕하고 속이고〔〕 교만〔〕을 부리고, 이런 것이 모두가 번뇌니까 한번 일으키면 업으로 남고 견성하는데 장애가 되는 것입니다.

   

다음 부정지법(不定地法)이라. 별로 좋지 않은 일을 하고[惡作〕 졸리고〔睡眠〕 거치른 분별〔〕, 미세한 분별〔〕을 하는 것입니다.

참선할 때는 심사(尋伺)를 잘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내나야 참선 할 때 가장 골치 아픈 것이 분별시비 아니겠습니까, 분별시비를 떠나버려야 삼매에 듭니다. 심사가 없어야 삼매에 듭니다. 그리고 공부하다 보면 거치른 분별〔〕은 좀 떠났다 하더라도 미세한 분별〔〕은 자기도 모르게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른바 선정 가운데서 2선정에 들어가야 심사(尋伺)가 끊어집니다. 그때는 말도 별로 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분별하고 “좋다 궂다 네가 있고 내가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있어야 말이 나오는 것이지 모든 분별이 없어져 버리면 말이 안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탐심〔〕 진심〔〕 아만심〔〕 의심〔〕이 부정지법 입니다.

의심 가운데 상대유한적인 것을 의심하는 의심은 우리한테 아무런 도움이 안됩니다. 맨처음에 문제 제기한 바와 같이 “습마물 임마래 (什麽物 恁麽來)라, 나〔〕란 대체로 무엇인가? 우주란 또 무엇인가?” 이런 문제를 의심해야 참다운 의심인 동시에 이른바 화두인 것입니다. 똥 마른 막대기〔乾屎橛〕가 화두가 되는 것도 본질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화두가 되는 것입니다.

   

다음 심부상응행법(心不相應行法)이 있습니다. 심부상응행법은 얻는〔〕 것 또는 얻지 못하는〔非得〕 것, 명근(命根)이라, 우리가 한번 인연 따라서 인간 존재가 되면 명근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수명 같은 것입니다. 동분(同分)이라, 같은 동류요, 무상정(無想定), 무상과(無想果)라, 무상정에 들면 무상과가 나옵니다.

색계 4선천(四禪天) 가운데 무상천인데, 모든 생각을 조금도 않는 것입니다. 이것도 구분을 잘 못하면 무상천에서 아무 생각도 안 하니까 이것이 해탈이라고 합니다마는 해탈이 못되는 것입니다. 다만 분별시비하는 번뇌만 좀 끊어져서 겉으로 생각이 안 나는 것이지 미세한 망상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잠재의식의 저변에 번뇌가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무상정은 삼계(三界) 안에 있어, 번뇌를 다 끊은 것이 아닌 아직은 범부지이기 때문에 우리가 취할 바가 아니나 인도 당시의 외도들은 무상천, 무상정 정도를 열반이라고 그르게 생각하였습니다. 열반이란 말은 불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도의 다른 외도들에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열반은 삼계를 해탈하는 열반이 못되는 것입니다.

무상정은 무상천에 들어가는 하나의 선정입니다. 무상정에 들어가면 응당 필연적으로 무상과가 나오는 것입니다.

   

다음 멸진정(滅盡定)입니다. 우리 공부하는 분들은 멸진정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멸진정을 성취해야 이른바 누진통(漏盡通)이 되고, 누진통을 해야 비로소 참다운 도인입니다. 문자 그대로 번뇌를 다 멸해버리는 것이 멸진정 입니다. 이른바 아상ㆍ법상을 다 끊어 없애버리는 것이 멸진정이기 때문에 성자와 범부의 분수령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땅히 멸진정을 발득(發得) 해야 이른바 선정해탈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보통은 지혜해탈만 하고서 지혜로는 모르는 것 없이 다 알지마는 멸진정에서 선정해탈을 미처 못하면 삼명육통(三明六通) 등 초인적인 힘을 못내는 것입니다.

마땅히 멸진정은 우리가 어느 때라도 꼭 들어가야 합니다. 게으르면 금생에 못 들어가고 말런지 모르겠지마는 꼭 들어가야 참다운 성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쉬운 것이 아니란 것을 깊이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설산동자가 설산에서 ‘생멸멸이(生滅滅已) 적멸위락(寂滅爲樂)’ 이란 두 귀절 때문에 자기 목숨을 바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경전을 볼 때에 깊은 생각에 잠겨야 합니다. 생멸이 멸이하면 참다운 해탈경계, 해탈을 즐거움으로 한다는 말입니다. 멸이(滅已)라는 것은 번뇌가 다 멸한 자리 아닙니까? 번뇌가 멸한 자리를 증명할 때는 그냥 그렇게 쉽게 그렁저렁해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몸뚱이, 나라는 관념, 이것을 어느 때라도 아낌없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멸멸이 적멸위락의 참 뜻입니다. 그래서 싯달타 전의 설산동자(雪山童子)는 호리도 주저없이 몸을 버린 공덕으로 12겁을 초월해서 성불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성불할 것인가? 우리가 성불을 않고 배겨내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든지 간에 꼭 성불되어야 합니다. 이 몸뚱이를 불교에서는 원가(怨家)라, 원수라고 합니다. 몸뚱이 집착 때문에 성불을 못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생멸멸이라는 그 귀중한 언구 가운데 자기를 몽땅 바쳤다는 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설산동자가 나찰신한테 자기 몸뚱이를 잠시의 주저와 회한이 없이 던짐으로 해서, 12겁을 초월해서 성불했다는 사실은 우리들의 수행정진에 비장한 귀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살타왕자가 새끼 범들을 낳고서 굶주린 어미 범한테 자기 몸을 바치지 않았습니까? 범에게 가까이 가서 몸을 드러누워도 그 자비로운 위신력 때문에 범이 차마 먹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내 몸뚱이를 죽여서 바쳐야겠구나” 생각하고 나무 위에 올라가 땅으로 뛰어 내렸습니다. 그러나 제석천이 그냥 받들었습니다. 정말 위대한 인물들은 무량 천신과 호법신이 지키기 때문에 물에 빠뜨려도 빠지지 않고 불에 태워도 타지 않습니다. 인연이 되어야 가는 것이지 인연이 안되면 갈려고 해도 못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할 수 없이 대꼬챙이로 자기 목을 찔러서 피를 내어 흘리며 가까이 가니 그때는 뭐라 해도 짐승이니까 피 냄새를 맡고는 피를 핥아 먹고 몸을 다 먹어서 뼈만 남겼던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해서 11겁을 앞당겨 성불했습니다.

   

금생에 우리가 할 길은 성불하는 길 외에 다른 길이 있지가 않습니다. 오직 외길, 한 길 뿐입니다. 어떻게 가야 할 것인가? 앞으로도 못가고 뒤로도 못갑니다. 오직 초월하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범부를 초월하여 성자의 길 밖에는 없습니다. 못 간다고 할 때에는 속체 가운데서, 속물 가운데서 헤매다 윤회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 다음 만물이 생()하고 머물다〔〕 달라져서〔〕 멸()해지는 것과 명()칭과 구()ㆍ문()이 심부상응행법(心不相應行法) 입니다.

   

다음 무위법(無爲法)에는 셋이 있는데 첫째 허공무위(虛空無爲)라, 조금도 거리낌이 없는 이른바 허공 세계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공간과 허공은 같겠지 하지만 그러나 같지가 않습니다. 공간 가운데는 산소, 수소 등 일체 현상이 다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허공은 금 가운데도 허공이 있고 다이아몬드나 어느 것 가운데도 허공이 다 있습니다. 이른바 모든 존재의 근본 장()이요 근본 생명이 허공인 것입니다. 따라서 공간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래서 허공무위라 합니다.

또 택멸무위(擇滅無爲)라, 멸은 해탈의 지혜입니다. 우리가 지혜로써 해탈의 자리를 선택한다는 말입니다. 성불하는 것은 모두가 다 택멸무위 때문입니다. 나쁜 것 가려내고서 참다운 진리를 선택하여 무위법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는 비택멸무위(非擇滅無爲)라, 이것은 법이자연(法爾自然)적으로 우주가 성겁(成劫)이 되고 주겁(住劫)이 되고 괴겁(塊劫)이 되어서 공겁(空劫)이 되어가듯이 저절로 무위법인 참다운 진리의 도리에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비택멸무위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