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절 근본불교(根本佛敎)의 수증론(修證論)
1.수증론(修證論)의 개요(槪要)
지금까지는 근본불교에 대한 여러 가지 현상적인 교상(敎相)풀이를 말씀 드렸습니다. 따라서, 그 다음 문제는 우리 중생이 무명에 가리어 범부가 되었는데 어떻게 무명을 벗어날 것인가? 하는 이른바 수증론(修證論) 곧 닦아서 증명하는 방법에 대하여 논리적으로 체계가 확립되어야 하겠습니다. 불교는 이와 같이 어느 법문이나 다 그러합니다마는 우리의 현상적인 것과 근본적인 성품 문제, 그리고 그 다음 문제는 어떻게 닦아서 깨닫는가 하는 닦음의 문제인 것입니다. 1) 수증론(修證論) 根本佛敎의 修證論 生死輪廻하는 人生苦를 解脫하는 問題는 人生本然의 理想이요 欲望인데 人生과 字宙를 神이 創造하고 絶對的으로 攝理한다는 轉變說(婆羅門敎 等)이나 여러 要素가 結合하여 自然發生的으로 世界가 이루어졌다고 主張하는 積聚說(자이나敎 等) 등으로서는 人間이 人生苦를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나 佛敎에서는 有情各自의 妄心의 動搖로 因한 自身의 行業에 따라 自己自身이 生成되고 또한 一切有情이 居住하는 世界까지도 創造되었다고하는 것이니 그 解脫의 能力과 方法 또한 自身에 있는 것이다. 根本佛敎에서는 이러한 哲學的 基礎 위에서 實踐修行說과 斷惑證理와 超凡入聖說 등을 세우고 있다. 그 修行說의 要諦는 三賢ㆍ四善根의 方便道를 거쳐서 見道位에 오르고 修道를 次第로 修證하여 無學位의 阿羅漢이 되는 것으로써 最後究竟位로 한다. 근본불교의 수증론(修證論) 곧 닦음과 증(證)하는 문제에 대하여, 생사 윤회하는 인생고를 해탈하는 문제는 인생 본연의 이상(理想)이요 욕망인데 인생과 우주를 신이 창조하고 절대적으로 섭리한다는 전변설(轉變說)이 있습니다. 인도에는 교파(敎派)가 많이 있고, 육파(六派) 철학도 있으나 이른바 전변설과 적취설(積聚說)로 인도 사상을 대변할 수가 있고, 그 다음에 이를 변증법적으로 종합 지양한 부처님의 연기법(綠起法)이 되겠습니다.
전변설은 인생과 우주를 신(神)이 창조하고 절대적으로 섭리한다는 진리로 모두가 신에게서 우러나와 현상계가 이루어진다는 것으로 바라문교(波羅門敎) 계통의 가르침입니다. 또는 여러 요소가 결합되어서 자연 발생적으로 세계가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는 적취설 즉 쌓이고 모여서 무엇이 되었다는 사상으로 자이나교(Jaina敎) 계통의 사상입니다. 이런 진리로서는 인간이 인생고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자기에게 해탈의 힘이 있다고 해야 자기 힘으로 될 것인데, 창조주가 있어서 창조되었다고 할 때는 우리가 어떻게 벗어나겠습니까? 또는 우리 인간이나 세계나 모두가 각 요소가 모여서 되었다고 할 때 그 요소를 다 분석해서 해부한다면 모르겠지만 그렇기 전에는 우리가 거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도 재래적인 전변설이라든가 적취설로는 우리 스스로 인생고를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유정(有情) 각자(各自)의 망심(妄心)의 동요로 인한 자신의 행업(行業)에 따라서 자기 자신이 생성되고 또는 일체유정이 거주하는 세계까지도 창조되었다고 하는것이니, 그 해탈의 능력과 방법 또한 자신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행한다 하더라도 이런 기본적인 문제에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한테는 이미 본래로 해탈하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본래는 모두가 청정미묘한 진여불성자리인데, 우리가 잘못 보았기 때문에 그런 무명심(無明心)이 동해서 자기 스스로 업을 지었으므로 결국은 무명심만 제거하면 되는 것입니다.
근본불교에서는 이러한 철학적 기초 위에서 실천 수행설과 또는 번뇌 곧 혹(惑)을 끊고 우주의 리법(理法)을 증명한다는 단혹증리(斷惑證理) 또는 범부를 초월해서 성자의 지위에 들 어가는 초범입성설 (超凡入聖說) 등을 세우고 있습니다. 그 수행설의 요체는 삼현(三賢)ㆍ사선근(四善根)의 방편도(方便道)를 거쳐서 우리가 자기 본성, 우주의 참다운 도리를 깨닫는 견도위(見道位)에 오르고 또는 견도한 다음에 점차로 습기를 없애는 수도(修道)를 차제로 닦고 또는 증명해서 다시 위 없는 무학위(無學位)인 아라한도의 성취가 근본불교의 구경적인 목적 입니다.
우리는 지금 대승법을 공부하고 있기 때문에 별로 필요없는 것 같으나 다 연관성이 있으므로 지루하지만 우선 살펴보는 것입니다.
2) 불타시대(佛陀時代)의 일반 사상계 佛陀時代의 一般思想界 一. 轉變設 …梵의 創造…… 修定主義… 波羅門敎 等 一. 積聚說 …要素의 結合… 苦行主義… 자이나敎 等 一. 緣起法 …因緣聚散 …… 中道主義… 佛敎 불타(佛陀)시대의 일반 사상계를 조금 더 살펴봅시다. 아까 언급한 바와 같이, 전변설은 범(브라만 Brahman)이 창조했기 때문에 응당 섭리가 따르고 신의 뜻에 따라 역사가 구성되고 신의 뜻에 따라서 선악이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수행법은 수정주의(修定主義)라고 합니다. 범(브라만)이 창조하고 브라만이 모두를 지배하기 때문에 마땅히 브라만과 우리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사상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상을 폄(貶)하는 입장에서 별것도 아니고 외도(外道)라고 하지만, 부처님 사상에 입각해서 생각할 때는 이 브라만 사상에서도 중요한 것을 많이 얻을 수가 있습니다. 바로 보면 조그만 티끌도 다 부처고 바로 못보면 삼세제불(三世諸佛)도 범상하게 여기듯이, 우리가 바로 보는가 잘못 보는가에 있는 것이지 바라문(波羅門 Brahmana)이 나쁘고, 무엇이 좋고 함부로 비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불교인들은 이렇게 함으로서 종파성을 초월하고 또는 다른 종교를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브라만 사상이 제한된 깨달음이기는 하지만 참고 될만한 중요한 점이 많이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최상의 해탈을 다 하셨지만 그렇다고해서 바라문교에서 아무것도 얻은 바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수정주의(修定主義)는 삼매를 주로 합니다. 다만 불교의 참선과는 그 이상과 목적이 다르지만 우리 참선하는 수행자처럼 좌선을 주로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참선은 먼저 선오후수(先悟後修)가 되어야 참선입니다. 그 한계를 분명히 하여야 합니다. 먼저 깨닫고 뒤에 닦는 것이 되어야 참선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 스스로 본래 부처이고 나한테는 일체 공덕이 다 갖춰 있다. 이 공덕은 부처와 더불어서 절대로 조금도 차이가 없다" 이렇게 느끼고 공부해야 진정한 참선인 것입니다. 따라서, 다른 종교에서 하는 것은 모양은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앉는다 하더라도 참선이 못되는 것이 무엇인고 하면 선오후수가 아니니까 참선이 못되는 것입니다. 가사, 바라문(브라만) 사상도 "본래가 다 브라만이고 브라만이 바로 우주 자체다" 이렇게 우리 불교의 법신불(法身佛)과 같이 해석해 나간다면 별 차이가 없겠지요. 그러나 브라만은 저 위에 있고 우리는 저 밑에 있고, 차근차근 닦아서 올라가는 것이라고 해서는 우리가 주장하는 그런 참선은 못되는 것입니다.
적취설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주나 인생이나 모든 존재가 각 요소가 결합해서, 적취해서 이루어졌으므로 고행(苦行)으로 해서 벗어나야 한다는 고행주의 입니다. 이 더러운 몸뚱이가 이렇게 저렇게 결합해서 되었거니 고행으로 이걸 다 떠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형(裸形) 외도가 옷도 안 입고 밥도 잘 안 먹고 목욕도 않는 고행을 합니다. 결국 몸뚱이를 원수로 보는 것은 좋은데 불심(佛心)에 입각해서 해야지 몸뚱이 이 살덩이가 본래 나쁜 것은 아닌데 말입니다. 우리가 잘못 보아 이 몸뚱이가 내 것이고 소중한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지 살덩이, 눈, 코가 본래 나쁜 것이 아닙니다. 고행주의는 이른바 고행을 위한 고행으로 현상적인 문제의 속박에서, 그런 구속에서 풀려나려고 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고행주의가 된 것입니다. 자이나교 등 이른바 고행외도가 이런 것입니다.
불교의 특징은 연기법(緣起法)입니다. 인연취산(因緣聚散)이라, 연(緣)따라서 이루어지고 연 따라서 멸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연의 근거는 무엇인가? 연기법도 우리가 깊이 생각을 해야 합니다. 연기법도 업감연기(業感緣起)나 12인연법이나 그런 차원의 연기는, 물론 부처님께서는 근원적인 연기를 다 알으셔서 우리한테 가르치고 말씀하셨지마는, 우리가 근본불교대로만 생각하여 "연기법은 이것저것 모여 가지고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다. 이 몸뚱이도 지·수·화·풍 4대(大)로 이루어지고 내 마음도 수와 상과 행과 식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다. " 이렇게만 생각할 때는 불교도 굉장히 허무한 생각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연기법도 이른바 진여연기(眞如緣起)라, 본래적으로 실존하는 진여불성을 우리가 상정(想定)을 해야 합니다. 참답게 깨닫고 보면 연기법으로 이루어지는 만법이 모두가 다 진여법성(眞如法性)이기 때문에 마땅히 참다운 깨달음 분상에서는 꼭 진여불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진여 불성을 인정할 때 비로소 허망 무상한 허무감을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만약 "인연 따라서 이것저것 다 이루어진 것, 이 몸을 떠나면 다 그때는 허망하지 않은가? 이루어진 몸뚱이 한번 죽어지면 허무하지 않은가?" 이렇게 생각할 때는 정말로 허무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상(無常)도, 불법(佛法)대로 이치에 맞는 무상이 아니라 허망한 무상이 되어 버립니다. 따라서, 연기법은 이른바 법계연기(法界緣起), 진여연기(眞如緣起)까지 되어야 합니다. 무명 따라서 업을 짓고 업 따라서 고를 받는다. 이와 같이 무명과 업과 고의 삼법(三法)이 윤회 무궁하게 돌아가는 것이라는 업감연기는 아직은 소승법문입니다. 그러나 원인도 진여불성이고 연도 진여불성이란 것이 이른바 진여연기요, 법계연기라는 말입니다. 화엄경이나 법화경이나 또는 기신론이나 그런 연기법의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중도주의(中道主義)가 되는 것이며 현상을 버릴 수도 없고 또한 공(空)을 버릴 수도 없는 중도(中這)인 것입니다.
3) 연기법(緣起法)의 입장에서 본 인생의 실상(實相) 三法印이란 佛敎의 根本敎義의 核心으로서 일정 불변한 眞理의 標幟이다. 그래서 이 三法印으로써 佛說과 魔說을 판정하는 "印"으로한다. 연기법에서 인생의 실상을 볼 때는 불교의 특징인 3법인(三法印), 불교의 상징적인 인계(印契 Mudra)가 3법인입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모든 있는 것은 다 무상하다. 제법무아(諸法無我)라, 무상한 존재는 필연적으로 무아라, 나라 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일체 존재가 시간적으로 본다면, 같은 시간에 같은 존재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의 티끌이나 단단한 금이나 모두가 시간이 경과되어서 다른 시간에 같은 모습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베르그송(Bergson 1857-1941)같은 분도 순수지속(純粹持續)을 말하는 가운데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같은 시냇물에 다시 발을 담길 수가 없다" 물이 흘러가는데 한번 담기면 그 물은 흘러가 버리고 다른 물이 오겠지요.
이와 같이 모든 제행은 조금도 같을 수가 없습니다. 어느 한순간도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인간은 생ㆍ로ㆍ병ㆍ사(生老病死)요. 천지 우주는 성ㆍ주ㆍ괴ㆍ공(成住壞空)이요. 일체 만유는 생ㆍ주ㆍ이ㆍ멸(生住異滅)이라, 이와 같이 제행무상이고 제법무아인 것을 중생이 잘못 보기 때문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체개고(一切皆苦)라, 모두가 인생고가 됩니다. 시간적으로 무상한 도리를 우리가 막을 수가 없고 공간적으로도 나라고 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그렇게 체념하고 달관하면 좋은데, 그렇게 못하기 때문에 고가 생기는 것입니다. 집이 내 것이겠습니까, 무엇이 내 것이겠습니까, 머리카락부터 발끝까지 내 것이란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 다. 인연 따라서 합해진 무상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이런 범주 내에서는 우리가 인생고를 떠날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사제(四諦) 법문 가운데 고(苦)와 집(集)입니다. 무명에서 일어난 자기라는 아(我)가 있으면 탐욕심과 분노심이 있겠지요. 그러므로 업을 짓고 따라서 고가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를 잘 모르고 집착할 때는 인생고는 필연적으로 안될 수가 없습니다. 석가모니도 인생의 생ㆍ로ㆍ병ㆍ사를 사무치게 느껴서 유성출가(踰城出家)하고 육사외도(六師外道)를 방문한 것이겠지요. 만약 우리 인간이 근원적으로 제행무상이나 제법무아의 도리를 모르는 미망심(迷妄心)밖에 없을 때는 출가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본질적으로 해탈의 요소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막는다 하더라도, 누가 만류하고 방해한다 하더라도 결국은 해탈의 길로 안 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석가모니께서 나오시기 전에도 이미 바라문교나 다른 종교나 모두가 다 몸부림치며 인생고를 떠나려고 마음먹었던 것입니다. 기독교도 내나야 마찬가지입니다.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 이른바 생멸(生滅) 멸이(滅已)해서, 번뇌를 다 없애고 참다운 영생불멸하는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적멸(寂滅)을 이룬 경계가 해탈의 이상경계라는 말입니다.
삼법인이란 불교의 근본교의(敎義) 핵심으로서 일정 불변한 진리의 표치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삼법인으로써 불설(佛說)과 마설(魔說)을 판정하는 인(印)으로 삼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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