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

[교상과 수행론의 변천] 제4절 인도의 대승불교 - 1. 중관파

通達無我法者 2007. 4. 20. 16:58

 

 

제2장 교상(敎相)과 수행론(修行論)의 변천

 

제4절 인도(印度)의 대승불교(大乘佛敎)


 

 

 

1.중관파(中觀派) 



中觀派馬鳴(佛滅後 600年頃起信論著)ㆍ龍樹(佛滅後 600∼700年頃 中觀論 十二門論智度論十住毘婆沙論 等 著)ㆍ提婆(3世紀頃百論著) 하여 般若空思想勃興함.


   

그 다음은 대승불교를, 대승불교도 전반적인 것이 아니라 주로 인도의 대승불교를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중관파(中觀派)에는 마명(馬鳴 Asvaghosa)ㆍ용수(龍樹 Nagarjuna)ㆍ제바(提婆 Deva) 등이 있습니다. 마명은 기신론을 저술한 분으로 불멸 후 600년경 나오신 분입니다.

용수는 조금 뒤인 불멸 후 600년부터 700년경 분입니다. 용수보살은 8종()의 조사(祖師)라고 까지 합니다. 선()이나, 교()나 모든 종파가 거의 비조(鼻祖)로 용수한테다 그 근원을 대는 것이 보통입니다. 용수는 또 용궁에 들어가 화엄경(華嚴經)을 가져왔고 남천축의 철탑을 열고 금강정경(金剛頂經)을 얻었다고 하여 대승불교가 이로부터 발흥하였으므로 후세에서 그를 제 2의 석가라 칭송합니다.


용수가 저술한 책은 주로 중관론(中觀論) 십이문론(十二門論) 또는 지도론(智度論), 지도론은 대지도론 또는 대론(大論)이라고도 하는데 100권입니다. 반야바라밀경의 뜻을 해석하고 정리한 논장 입니다. 다음에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도 중요합니다. 특히 염불하는 사람은 한번씩 꼭 더듬어 볼만한 것입니다.

용수보살은 십주비바사론에서 여러 가지 법문 가운데 특히 난행문(難行門)과 이행문(易行門) 즉 어렵게 수행하는 문과 쉽게 수행하는 문을 제시하였습니다. 성도(成道)하는 이론도 복잡하고 자기자신이 오랫동안 애쓰고 용맹정진도 하는 수행법이 난행문이라고 하면 이행문은 믿음으로 해서, 염불에 의해서 쉽게 가는 법입니다.

   

다 그렇지는 않다 하더라도 대개 논리적으로 따지는 분별 지혜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순수하게 믿음을 좋아하고 또는 어떤 분은 화두만 참구하는 것이 좋다고 하는데 근기가 차이가 있어서 우리가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마땅히 어려운 문만 있고 쉬운 문이 없으면 불교가 그마만치 옹색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서 용수보살은 자비심, 노파심에서 염불문인 이행도(易行這)를 냈다고 볼 수가 있겠지요.

부처님 법문 가운데는 다 들어있고 또 통달한 도인들이 해설은 미처 못했다 하더라도 그때 상황 따라서 너무 치우치거나 딱딱하기만 하면 이행문을 내놓고 믿음을 주로하는 법을 응당 제시를 했던 것입니다.

   

믿음을 주로 하는 것이 굉장히 필요합니다. 지성(知性)적으로는 많이 안다 하더라도 감성(感性)을 무시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정녕 부처님은 바로 생명 자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생명인데, 자기를 비롯한 일체 생명의 근원인 부처가 생명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은 다만 논리나 또는 지성적인 이치가 아니라 바로 생명이기 때문에 생명을 생명으로 순수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또 우리 마음은 본래 생명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갖추어 있습니다. 우리 중생은 정도의 차이 뿐이지 누구나 어딘가 가고 싶어하고 어딘가에 이르고 싶어하는 향수를 지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본래적으로 바로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가 못되는 한에는 항시 불안스럽고 어떠한 것도 우리 마음을 못 메웁니다. 물질적인, 상대 유한적인 것은 어느 것도 우리 마음을 못 채웁니다. 따라서 우리 중생이 불안한 것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서구의 실존철학(實存哲學)은 주로 불안 의식이 기초가 되어서 나왔습니다. 불안한 마음을 해탈하려는 데서, ‘계박(繫縛)을 풀고 싶다, 구속을 없애고 싶다.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다’ 그런데서 이른바 ‘실존이 무엇인가, 나라는 것은 원래 어떠한 것이고 우주는 어떤 것인가, 우주 실상은 무엇인가?’ 이런 것을 탐구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실존철학을 한 사람들은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1813-1855)나 하이데거(Heidegger,Martin 1889-1976)나 또는 야스퍼스(Jaspers, Karl 1883-1969)나 모두가 대체로 불경(佛經)을 많이 참고로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 글을 보면 불경적인 내용을 상당히 많이 엿볼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불안한 사람들은 법화경을 보아도 불안하고 다 불안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 저것, 경이고 무엇이고 다 던져 버리고서 마음으로, 생명의 본바탕인, 생명의 본고향인 부처님 자리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네 할머니나 어머니들이나 그분들이 불경을 전혀 모른다 하더라도 하루에 천번 만번 염주만 헤아리는 그런 태도, 그리고 그분들의 행동이나 그 얼굴이나 어디를 보나 자비심이 흐르고 있습니다. 학자보다도 고관들보다도 자비심이 넘쳐 있습니다. 순수한 심성이 그만치 불성 쪽으로 가까워지고 정화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분들은 이치로는 모른다 하더라도 남을 미워할 수가 없고 남한테 듣기 싫은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에 대한 그리운 마음, 부처님을 흠모 추구하는 갈앙심(渴仰心)은 우리 마음을 비약적으로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우리 수행인에게도 굉장히 필요한 자세인 것입니다.

누구한테 무엇을 베푼다 하더라도 ‘주 하나님의 이름으로 베풀어라’ ‘주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멘’ 그런 태도 같은 것도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기독교의 말이기 때문에 그런건 모두가 미신 같다고 할 것이 아니라 부처님 사상에서 본다면 우리가 참 좋게 이해가 됩니다. 순간 찰나도 부처님(하나님이라 이해할 때)이란 생명자리를 안 떠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 입니다.

   

염불이란 본 뜻도 불이불(不二佛)이라, 부처와 나와 둘이 아니라는 뜻으로 해서 염불하는 것입니다. 부처가 저 밖에 있다고 해서 염불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중생이 모르니까 극락세계를 밖에 설정하는 것이지, 천지 우주가 이대로, 사바세계가 바로 적광토(寂光土)라, 바로 극락세계입니다. 다만 중생이 어두워서 못보는 것입니다. 또는 불리불(不離佛)이라, 부처와 떠나지 않기 위해서 염불하는 것입니다. 화두나 똑같습니다.

그런 데에서, 이른바 쉽게 닦아나가는 이행문에서 갈앙심은 논리를 배제한 순수 직관적인 것이지만 우리 마음을 비약시킵니다. 어떤 때나 삼매라 할 때는 비약이 있어야 삼매가 되는 것이지 비약이 안 들어가면 삼매가 못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도 이행문 같은 하나의 신앙형태가 되겠지요. 기독교도 우리가 이해하고 본다면 외도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마태복음서나 요한복음서나 또는 누가복음서나 그런 복음서를 부처님의 진여불성 자리에서 관조한다면 옳은 말이 많은 것입니다. 불경도 비유와 상징이 있듯이 기독교도 비유담 상징담이 많이 있습니다마는 그런 비유나 상징의 껍질을, 베일(veil)을 벗기고서 이해할 때는 좋은 가르침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실(如實)하게 인간성이 원래 무엇인가? 우주의 본성이 무엇인가? 그런 것은 별로 말하지 않았기에 참다운 대승법이 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우리가 지금 불가피하게 기독교와 관계를 해야 하는 시대적 요청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기독교 인구가 지금 18억이라고 합니다. 18억 인구를 외도라고 해서 우리가 배격하고 서로 피차 싸울 수가 있겠습니까? 마땅히 그들이 인간의 존엄성, 인간의 자성(自性)을 잘 모르는 정도는 우리가 이끌어 가면서 합리적으로 유도할 망정, 바이블(Bible) 한번도 안 본 사람들이 덮어놓고 배격할 수는 없는 것 입니다.

다만 우리가 이해를 해야할 것은, 예수(Jesus B.C.4?-A.D.30)는 30세에 요단(Jordan)강 하반에서 40일 동안 금식 기도 정진을 하여서 하나님과 상통한 사람 아닙니까. 또한 전도 포교한 것은 단 3년 간입니다. 그리고 전도 포교한 대상이 1900여년 이전 사람들인데 현대같이 유식한 사람들이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더욱이 베드로(Petros, Simon)나 그런 사람들이 갈릴리(Galilee) 해안 지방에서 어업에 종사하는 어부가 아닙니까, 그런 사람들한테 영원적인 진리를 전도할 때에 고도로 논리적이고 고답적인 말로 할 수가 없고 필연적으로 쉬운 말이나 비유, 상징적인 말이 안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이해하면서 바이블을 볼 때는 이 분도 틀림없이 견성오도를 하신 분이라고 생각이 든다는 말입니다. 남을 비방하기는 쉬워도 남을 이해하기는 어려운 문제 아닙니까? 가장 불행한 사람은 남의 단점만 보고 가장 행복한 사람은 남의 장점을 봅니다. 장점을 정말로 보다보면 결국은 부처같이 보게 됩니다. 바로 보면은 결국은 다 부처 아닙니까?

   

제바(提婆)는 3세기경 분으로 용수보살 제자입니다. 백론(百論)을 저술하였습니다. 그 뒤에 중국에서 용수의 중관론(中觀論)과 십이문론(十二門論), 제바의 백론(百論)인 삼론(三論)을 의지해서 삼론종(三論宗)이 성립되었습니다.

마명이나 용수나 제바 등에 의하여 이른바 반야공(般若空)사상이 발흥하여 대승불법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렇다고 그분들이 공()만 역설하고 다른 것은 무시한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다만 그 당시는 너무나 유()에 집착했기 때문에, 그 당시의 사회상황이나 낮은 수준으로 인해서 석가모니께서 말씀하시고 또는 마명 이전의 모든 도인들이 고구정녕으로 말씀을 하셨겠지마는 그래도 유병(有病)을 못 버리기 때문에 당시의 시기상응한 법문으로 반야공 사상을 주로 말씀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부처님 일대시교(一代時敎)를 볼 때나 불교 역사를 볼 때도 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맨 처음에는 유교(有敎)를 주로 하고 그 다음에는 유를 최파(摧破)하기 위해서 공교(空敎)를 위주하고 또 공에 너무 집착할까봐서, 공에 집착하면 그것도 도가 아닌지라 공유(空有)를 종합적으로 지양시켜서 중도교(中道敎)를 창도(唱導) 하였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