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

[교상과 수행론의 변천] 제3절 근본불교의 수증론 - 2. 수증체계

通達無我法者 2007. 4. 20. 16:56

 

 

 

2.수증체계 (修證體系)

 


   다음에는 근본불교의 수증(修證) 체계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대승불교로 나아가면 조금 덜 딱딱합니다만 근본불교 자리는 흔히 공부를 안 했고 또 별로 관심을 안 두기 때문에 딱딱하게 느껴집니다마는 그래도 우리가 범부심을 점검하고 뒤돌아 볼 때는 굉장히 자기 스스로에 대해서 깊이 느껴지고 따라서, 습기를 녹이는데 참고가 많이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대승불교라고해도 근본불교가 꼭 필요합니다. 마치 돈오에도 점수가 필요하듯이 말입니다.

 

 


   1) 현위(賢位三賢位四善根)


   현위(賢位)와 성위(聖位)로 나누는데 현위는 현자의 자리입니다. 말하자면 진리가 옳다고 생각하고 닦아나가는 자리입니다. 따라서 방편위(方便)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닦아 나가서 참다운 근본 성품을 깨닫는 자리가 성위 곧 성자의 지위입니다.

 

 


   ①삼현위 (三賢位)

 

   현위는 다시 3현위(三賢位)와 4선근위(四善根位)로 구분을 합니다. 3현위는 5정심관(五停心觀)으로 시작이 됩니다. 우리 공부하는데 근본불교는 참 착실하고 세밀합니다. 아주 빠짐없이 체계가 되어 있습니다.

   오정심관(五停心觀)은 번뇌에 때묻은 우리 마음을 쉬게 하여 고요한 마음에 머물게 하는 법입니다.

   첫째, 부정관(不淨觀)입니다. 우리 번뇌란 것은 자기 몸을 아낌으로 해서 나옵니다. 따라서 자기 몸을 아낄 때는 망상이 나오고 집착이 생깁니다. 보다 좋은 옷을 늘 입혀야 하고 좋은 음식을 먹어야 하고 좋은 집에 살아야 하는 탐욕심이 나오겠지요. 따라서 욕심을 뗄 때는 몸뚱이가 본래 부정하다는 부정관이 좋습니다. 부정관하는 법도 구체적으로는 굉장히 세밀합니다.

   또는 자비관(慈悲觀)입니다. 사람을 보면 인정 있는 사람들도 있고 인정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주 잔인한 사람은 과거 숙세에 그만치 나쁜 업을 많이 지었겠지요. 본래 나와 남이 없다는 무아가 되어야 참다운 자비인데 그렇게까지는 못된다 하더라도 상대적으로라도 인정을 베풀고 사회 봉사도 해야 하겠지요. 그러나 이기심 많은 사람들은 안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비관을 해서 차근차근 마음을 열어나가야 합니다. 자비심이 많을수록 마음이 열리게 되고 드디어는 천지 우주 무한대까지 확장이 되어야 하겠지요.

   그 다음에 인연관(因緣觀)입니다. 인연 따라서 모아지고 인연 따라서 흩어진다는 인연법을 관찰하는 법입니다.

   그 다음에는 계분별관(界分別觀)입니다. 이것은 5온(五蘊)12처(十二處) 18계(十八界) 이런 것을 분석해서 우리가 집착해 있는 마음을 풀려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과 우주만유의 구성이 5온인 것이라고 분석한다면 그렇게 좋아하는 자기 몸뚱이도 내나야 5온의 결합에 지나지가 않는다고 성찰해서 무명심을 여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계분별관이나 인연관은 상통이 되기 때문에 어떤 문헌에서는 인연관만 내세우고 계분별관 대신에 관불관을 넣기도 합니다.

   관불관(觀佛觀)은 부처를 관조하는 법입니다. 다장중생(多障衆生) 관불관이라 하여 장애가 많고 업장이 많은 중생은 관불관을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징이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지 않습니까? 좋은 그림을 볼 때하고 혼란스럽고 이상한 그림을 볼 때와는 우리마음이 다르지 않습니까? 여기 노덕 스님들과 같이 서울 어느 부잣집에 가서보니 그 넓은 벽에다 저희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마음이 산란스럽고 살벌한 그림이 걸려 있었습니다. 그런 것이 벽마다 있을 때에 우리 마음이 평정하게 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의 상호는 32상(三十二相) 80종호(八十種好)라 그야말로 지혜와 자비와 복덕이 구족한 원만상호 아닙니까, 우리의 본 얼굴은 부처님 상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정말로 지혜롭고 자비심이 있을 때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점차로 부처님 상호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부처님 상호를 항시 보"내가 닮아야겠구나, 내 본래면목 자리가 저 자리이구나" 이렇게 생각할 때는 그만치 업장이 녹아지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부처를 관찰하는 관법이 이른바 관불관입니다.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 "시방여래(十方如來)는 시법계신(是法界身)이" 시방여래 부처님은 바로 법계를 몸으로 한다는 말입니다. 이 법계가 바로 부처님 몸입니다. "고로 심상불시(故 心想佛時)에, 고로 우리 마음이 부처를 생각할 때는 우리 마음이 바로 32상 80종호를 갖추니라(是心卽是 三十二相 八十種好)" 이런 법문이 있습니다.

 

   나와 남으로 구분을 하고 또는 자연과 나를 한계를 두고 있는 것이 우리중생 아니겠습니까? 자연도 내나야 진여불성의 화신(化身)인데 좋은 사람 궂은 사람, 자연과 나의 벽을 무너버릴 때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얼굴이 풀리는 것입니다. 이런 데에 관불관의 중요한 의의가 있습니다.

 

   다음에는 수식관(數息觀)입니다. 이른바 호흡법입니다. 지금 사회에서는 단전호흡법이다 복식호흡법이다 해서 호홉법들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또 호흡법만 하면 되지 다른 법이 필요 없다는 정도로 집착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좋은 점은 인정을 하겠지만 그것만 다이고 다른 것은 아니다 하면 벌써 법집(法執)이 아니겠습니까? 법집은 말아야 합니다. 염불을 하나, 화두를 하나 어떻게 하든지 간에 법집하면 그마만치 거기에 흐림이 생깁니다.

   수식관이란 호흡을 헤아리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안나바나경(安那般那 Ana-apana經)이라는 경의 대요인 육묘문(六妙門)에 수식관의 내용이 있습니다. 간단히 말씀드리면 육묘문은 여섯 단계로 구분해서 수()ㆍ수()ㆍ지()ㆍ관()ㆍ환()ㆍ정()문()이라고 했습니다.

 

   첫째 수식(數息)은 호흡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지금은 호흡을 헤아리는 것도 여러 가지로 말합니다만 불교에는 많은 수를 헤아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부터 열까지 헤아리고 다시 또 열에서 하나를 헤아리는 식으로서 이것이 합리적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마음이 산란스러울 때에 하는 법입니다.

   이와 같이 5정심관(五停心觀)은 모두가 다 우리 번뇌에 대응해서 한 법문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자기 몸뚱이나 다른 대상에 대하여 탐욕심이 많은 사람들은 부정관을 하는 것이고, 인정이 부족하고 이기심이 많은 사람들은 자비관을, 또는 어리석은 마음이 많아서 시비 분별을 못가리는 사람들은 인연관을, 산란스러운 마음을 도저히 어떻게 잠재울 수가 없는 사람들은 호흡을 헤아리는 수식관으로 마음을 다스리게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수를 헤아리다가 조금 나아지면, 어느 정도 망상이 줄어지면, 그때는 호흡을 헤아리기가 좀 부담스럽습니다. 그 뒤에는 수식(隨息)입니다. 숨을 헤아리는 것은 그만 두고, 들이 마시면 들이마시는 대로 또는 내쉬면 내쉬는 대로 호흡에 대해서만 관심을 두고서 숨 가는대로 맡겨 버리는 것입 니다.

 

   다음 지식(止息)은 번뇌 망상하는 마음을 그치도록 호흡을 오랫동안 머물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번뇌 망상은 응당 그쳐야 하겠지요. 그러나 우리 범부지에서는 선정(禪定)에 들어가기 전에는 번뇌 망상이 그쳐지지가 않습니다. 원숭이와 같이 경망한 것이 우리 마음 아닙니까, 한시도 마음이 머물지가 않습니다. 이런 마음을 어떻게 잠재울 것인가? 경을 보아도 읽을 때는 모르거니와 경을 놓으면 다시 천사만려(千思萬慮)로 분별 망상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분별 망상을 없애려면 꼭 삼매(三昧)에 들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참선이 필요한 것입니다. 염불이나 주문이나 모두가 우리 마음을 한 경계에 머물게 하는 공부를 해야 분별 망상하는 산란스러운 산심(散心)을 잠재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심이 다 끊어져 버리면 자동적으로 지식()이 되겠지요. 선정에서 초선정, 2선정, 3선정까지 가더라도 역시 산란심은 온전히 못 끊어집니다. 산란심이 끊어지지 않으면 호흡도 거기에 따릅니다. 우리 생명이 신비로운 것이 망상 분별하는 마음과 호흡과는 정비례합니다. 마음 거칠면 호흡도 거칠고 호흡이 고요하면 마음도 고요해집니다. 그런데서 호흡법이 중요한 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호흡을 한다 하더라도,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은 항시 반야 지혜가 앞서는 선오후수(先悟後修)가 되어야 합니다. 부처님 공부는 항시 반야 지혜를 앞세우는 것이고 외도 공부는 반야 지혜를 별로 생각하지 않고서 그냥 테크닉(technic)이나 상()에 걸려서 형상적인 것을 미처 멸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호흡이 점차로 고요해지고 또는 딱 그쳐 버리는 것이 초선, 2선, 3선, 4선까지 가야 비로소 우리 산란한 마음이 그치게 되는 것입니다. 4선정을 거쳐야 이른바 멸진정에 들 수가 있습니다. 아상(我相)을 몽땅 끊어버리는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지식(止息)은 우리 호흡이 번뇌가 고요해짐에 따라서 그쳐질 수 있는 그런 정도를 말합니다. 망심이 줄어지면 점차로 호흡도 고요해지는 것인데 짐짓코 애써서 오랫동안 호흡을 머무는 법도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복식(腹息) 호흡같은 것이지요. 요가 수트라(Yoga-sutra)로 말하면 쿰박(kum-bhaka)이라, 숨을 들이마셔서 오랫동안 지니는 것입니다. 쿰박에서는 가사 1시간 정도 쿰박을 하게 되면 손가락 위에 올라 설 정도로 육신(肉身)이 가쁜해진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호흡과 우리 마음과는 밀접한 상관 관계가 있습니다. 망심이 줄어지면 그에 비례해서 호흡도 가지런해집니다. 반대로 호흡이 고요해지면 우리 망심도 줄어집니다.

 

   다음에는 관()입니다. 지금까지는 호흡을 위주했지마는 호흡은 거의 고요한 단계가 되었으니까 관이라, 중도실상(中道實相)의 진여(眞如)를 관하는 것입니다. "나도 없고 너도 없고 천지 우주가 일미평등한 다 진여불성이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관입니다.

 

   그 다음에는 환()입니다. 특히 그렇게 관하면서도 관조의 대상을 없애는 것입니다. 주관과 객관과의 차별을 없애고 모두를 다 주관으로, 일체 유심조(一切唯心造)로, 모두가 사실은 마음뿐이라고 깨달아 나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다가 정()입니다. 주객을 떠나서 참다운 법자체인 중도실상과 하나가 되어 망상은 그치고 청정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호흡법 육묘문(六妙門)의 요지입니다.

 

   그 다음에 별상념주(別相念住) 입니다.

   어느 것으로도 성불할 수 있는 법이지만 우선은 초심자가 5정심관으로 공부해 나가서 점차로 자기 마음을 다스려 인정이 없고 자비심이 없으면 자비심이 나게 하고, 자기 몸뚱이를 너무 집착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 몸뚱이를 너무 애착하는 사람들은 또 부정관 등을 해서 우리 마음이 익어지게 되면 별상염주라, 이른바 사념주관(四念住觀) 곧 사념처관(四念處觀)을 각기 별도로 관〔別觀〕하는 것입니다.

 

   근본불교는 주로 사념주관 곧 사념처관이 굉장히 중요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함경에는 수십 군데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4념처는 신ㆍ수ㆍ심ㆍ법(身受心法)이라, 우리 몸에 대해서도 부정관이라든가 여러 가지 관법을 많이 했으나 이제 총체로 본다면 "몸()이란 부정해서 더러운 것이요. 아까울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임종시에 바른 마음먹으면 죽는 순간 바로 더 좋은 몸으로 바꿔 태어나지 않겠는가?" 이렇게 우리 몸은 부정한 것이라 관하는 것이고

   수()는, 우리가 받아들여 수용하는 것, 감수하는 것은 모두 다 고()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생 개고(人生皆苦)라, 인생이 다 고다" 라고 말하면 우리 인생에는 안락도 있지 않는가? 이렇게 반문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마는 우리 범부지에서는 참다운 안락은 없습니다. 우리가 잘 못봐서 안락같이 보이는 것이지 참다운 안락은 없습니다. 안락으로 보이는 것은 곧장 다시 고()로 전변되고 맙니다. 그러기에 실다운 안락은 절대로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수용하는 것은 결국은 모두 고뿐이라고 관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무상(無常)한 것입니다. 마음은 순간 찰나도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선정이란 정심(定心)이 되어야 마음이 머무는 것이지 선정이 못될 때는 항시 동요부단(動搖不斷)합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은 무상한 것이다. 덧이 없다" 고 관하는 것입니다.

   법()은 이른바 만법(萬法)을 말합니다. 법은 인연생(因緣生)이거니,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이루어진 것이 법이거니 "법에 있어서 어느 고유(固有)한 것이 없다 곧 무아(無我)라"고 관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수심법(身受心法)에 "우리 몸이나 감수하는 것이나 분별하는 마음이나 또는 우리가 느끼고 분별하는 개념적인 법, 이런 것이 모두가 부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고, 무상한것이고, 무아인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관찰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학수종담(鶴樹終談)이라, 학림(鶴林) 수하(樹下)에서 부처님이 맨 나중에 설법하신 경전인 유교경(遺敎經)에서, 부처님께서 열반에 임하실 때에 아난존자가 "세존께서 열반에 드신 다음에는 우리는 무슨 법에 의지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을 때 부처님께서는 "사념주 곧 사념처관에 의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념처관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잘 새기시길 바랍니다.

 

   우리 사바세계를 바로 볼 때는 부정(不淨)이고, 고()고, 무상(無常)이고, 무아(無我)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고ㆍ공()ㆍ무상ㆍ무아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사바세계의 4정견(四正見)이라 합니다. 바른 견해입니다. 따라서 고ㆍ공ㆍ무상ㆍ무아를 정견으로 생각할 때에는 우리가 집착이 끊어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의심만 하면 될 것인데 관법이 무슨 필요한가"하는분도 있습니다. 어느 선지식은 관법이 외도라고 그럽니다. 이렇게 법집(法執)을 하면 참 곤란스러운 것입니다.

   우리 세대에는 법집을 꼭 극복해야 합니다. 법집을 떠나지 못하면 자기 공부도 안 되고 가정도 바로 다스리지 못하고 또는 자기 문중이나 한 종단이나 국가나 절대로 바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범부란 그 업장이 십인십색(十人十色)이기 때문에 열 가지 백 가지로 여러 가지 법이 나올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꼭 법집을 떠나야 합니다.

 

   부처님 법은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 법문마다 성불하는 문입니다. 동으로 가나 서로 가나 또는 남으로 가나 북으로 가나 다 성불하는 문입니다. 화두를 드는 법이나 또는 관법하는 법이나 또는 염불하는 법이나 주문을 외는 법이나 다 성불하는 법입니다.

   다만 긴요한 조건은 꼭 선오후수(先悟後修)가 되어야 합니다. 선오후수가 되어야 참다운 화두, 참다운 염불, 참다운 선, 참다운 주문인 것 입니다.

 

   그런데 5정심관, 별상념주 또는 총상념주 이것이 이른바 3현(三賢)인 것이고, 3현위에서 어느 정도 점차로 우리의 바른 견해가 확립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이런 법으로 꼭 해야겠구나" 그래서 경안(輕安)이라, 마음이 안정되고 가벼워 확신이 서는 것입니다.

   경안이 되어야 자기 몸에 대해서 부담을 느끼지 않습니다. 배고프다고 꼭 간식을 먹고 무엇을 먹어야 하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일단 경안이 되어 버리면 있으면 먹는 것이고 없으면 그만이고, 없으면 없는대로 옛날 고인들의 바른 자취를 더듬어 가는 것입니다. 삼세 제불이 일종(日中一食)이기 때문에, 없으면 덕분에 일종도 하고 단식하면 덕분에 몸에 있는 더러운 노폐물들을 다 배설하는 것입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좋은데, 있으면 있는 것 때문에 도리어 우리가 자기 몸도 마음도 상하고 부담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경안이 되면 자기 몸에 대해서 부담을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말은 쉬운데 실지로는 쉽지가 않겠지요. 배고픈 것을 이기기도 곤란스럽고 또는 많이 먹다가 갑자기 적게 먹으면 탈진되고 하니까 그것도 어려운 것이고 말입니다. 그러나 자꾸 행습을 들여서 "이놈의 몸뚱이 괴로운 덩어리 아닌가? 내 전생의 업장이 뭉친 덩어리 아닌가? 어느 때 버린다 하더라도 아무 여한이 없다. 누가 비방하거나 좋다거나 궂다거나 그것이 내 본래 면목에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이렇게 생각하고 점차로 그런 관념이 익어지면 자기 몸뚱이에 대해서 관심이 줄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 공, 무상, 무아라, 신수심법 4념주관의 공덕으로 경안의 단계가 되면 설사, 불경 가운데 어려운 대문이라 하더라도 "아, 그렇구나!" 하고 짐작이 되는 것입니다.

 

   12인연법에서도 보아왔습니다만 윤회의 가장 근원적인 원인이 무명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충분히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당위(當爲)는 무엇인고 하면 어떻게 무명을 없앨 것인가? 하는 것이 불교 수행의 요체입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에도 있는 바와 같이 본래에서 볼 때는 무무명(無無)이라, 원래 무명이 없는 것입니다. 다만 중생이 잘못 봐서 무명을 실체화시키고 대상화시킨 데서 이른바 윤회의 인생고가 있는 것입니다.

 

   소위 말하는 "카르마(Karma)의 사이클(cycle)" 윤회의 수레바퀴를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하는 것도 역시 무명을 없애는 데서 비로소 참다운 수행적인 의의가 있습니다. 어떻게 무명을 끊을 것인가? 삼학도(三學道)라든가 또는 팔정도(八正道)가 다 무명을 소멸하는 중요한 덕목인 것입니다. 화두나 염불이나 주문이나 모두가 다 무명을 없애는 작업입니다. 따라서 어떤 공부를 하든 지간에 무명과의 정반대인 진지(眞智) 곧 참다운 반야 지혜가 앞서야 하는 것입니다.

 

   참다운 지혜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이것은 유()도 아니고 공()도 아니고 이른바 중도실상(中道實相)의 지혜입니다. 중도실상의 지혜가 항시 마음에 자리하고 염불도 하고 화두도 참구하고 주문도 외워야 무명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불교의 총체적인 정견(正見)은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중도실상의 참다운 지혜가 정견입니다마는 소승적인 의미에서 사바세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정견은 고ㆍ공ㆍ무ㆍ상ㆍ무아입니다. 인생이 무상이고, 시간적으로 볼 때 어느 것도 잠시도 머무는 것이 없기 때문에 무상입니다. 또한 무상한 존재는 어느 것이고 고유한 것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바로 무아인 것입니다. 사람을 비롯해서 어떤 것이나, 아법(我法)이나 제법()이 모두가 다 무아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이런 무상하고 무아인 것을 잘 모르고 아()가 아닌 것을 아라고 하고 또는 법이 아닌 것을 실법(實法)이라고 생각하는데서 필연적으로 인생고가 있게 됩니다. 제 아무리 영리하다하더라도 아를 떠나지 못하고 또는 실법이 아닌 것을 법이라고 생각하는 한에서는 인생고를 떠날 수가 없습니다. 무아고 또는 무상이기 때문에 공이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ㆍ공ㆍ무상ㆍ무아는 서로 상관 관계에 있습니다.

 

   별상념주(別相念住)에서는 처음에 부정(不淨)이 있으나 총상념주(總相念)에서는 고ㆍ공ㆍ무상ㆍ무아라고 합해서 관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보든지 간에, 자기 몸을 보나 또는 상대를 보나 어떠한 존재를 보나 "이것은 무상하고 결국은 괴로운 것이고 공이고 또는 무아구나" 이렇게 관조하는 것이 총상념주 관법입니다.

   아함경에서는 수십 군데나 고ㆍ공ㆍ무상ㆍ무아를 관조하는 법이 있는 것이고 또는 초선정, 2선정에 들어가는 것도 역시 고ㆍ공ㆍ무상ㆍ무아의 4념주법으로 들어가는 것이 상례입니다.

   우리는 본래로 상주 부동한 진여불성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인데 우리가 어쩌다가 망각하고 살아왔지만 잠재의식에서는 항시 자기 고향으로, 진여불성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히 솟음 치고 있는 것입니다.

 


   ②사선근(四善根)

 

   다음 단계에서, 우리 마음을 한껏 다스려 선근(善根)을 깊게 하는 공부가 이른바 4선근입니다. 우리한테 얼마만치 4선근이 많이 있는 것인가? 이런 것도 역시 4선근 정도에 따라서 점검할 수가 있습니다.

   4선근은 난법(煖法)ㆍ정법(頂法)ㆍ인법(忍法)ㆍ세제일법(世第一法) 입니다.

 

   난법을 유식론에서는 명득정(明得定)이라 합니다. 어째서 명득정이라고 했는가? 난법상(煖法相)이 범부는 항시 마음에 어두운 구름이 오락가락 하듯 눈만 감아도 어두컴컴하고 깜깜하고 불교 법문을 보고 듣더라도 무엇이 무엇인지 분간을 못하고 부질없는 분별시비가 일어나고 마음이 잘 트이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기도를 하든지 참선을 하든지 마음을 가라앉히고, 마음이 점차로 정화됨에 따라 흐린 구름 같은 것이 활짝 개어서 머리도 가슴도 몸도 시원스럽게 느껴져서 마치 전류에 감전된 듯 짜르르 하며 온 몸이 아주 쾌적하여 피로라든가 언짢은 생각이 싹 가셔 버립니다. 물론 완전 무결한 것은 아닙니다마는 그런 경계를 느끼는 것입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짜르르한 전류 같은 것을 느끼면 무슨 병증세가 아닌가? 하고 기우(杞憂)를 합니다마는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오염된 것이, 산란스럽고 분별시비 많이 하던 망념이 스러지고 우리 마음이 그만치 진여불성쪽으로 다가서는 조짐인 것입니다.

   그래서, 불성의 훈기가 어느 정도 다습게 우리한테 다가온다는 의미로 난법이란 명의(名義)를 썼다고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그래서 명득정이라 하여 어두운 데서 밝음을 얻는 삼매의 시초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한테 가장 큰 병통은 한낱 가상(假相)인 것을 있다고 집착하는 유병(有病)입니다. 물질이 아닌 것을 물질로 보고 실체가 아닌데 실체로 보는 것이 유병 아닙니까? 중생은 지금 유병을 앓고 있습니다. 유물주의, 물질지상주의 같은 것은 모두가 유병인 것입니다.

   물질이라는 말이나 색음(色陰)이라는 말이나 같은 뜻입니다. 색음의 구우(區宇)를, 곧 물질로 덮여 있는 경계를 타개(打開)하는 전상(前相)이 난법상이요 명득정인데 밝음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는 정법(頂法)입니다. 이때는 명득정의 밝은 기운이 더 증장()되어 옵니다. 처음에는 조금 왔다가 그만 두면 사라지고 하지만 정법상에서는 밝은 기운이 점차로 증가되어 사라지지 않습니다. 자나깨나 앉으나 서나, 우리가 별로 망동만 않으면, 파계무참한 짓만 않으면은 계속이 됩니다. 그러나 음식을 함부로 먹는다거나 이상한 짓이나 할 때는 밝은 기운이 간곳없이 사라집니다.

   정법은 밝음이 증가되는 명증정(明增定)인데, 질다심상(質多心相) 곧 분별하는 마음 상태, 성자의 마음이 아니라 범부의 마음 상을 의미하는 질다심상을 직견(直見)하는 법상입니다. 그래서 "내 마음이라는 것은 대체로 이런 것이구나" 이렇게 짐작이 되는 경계입니다.

 

   다음이 인법(忍法)입니다. 이것을 대승법인 유식론적으로 말하면 인순정(印順定)이라 합니다. 욕계(欲界)의 가상(假相)이 허공 같음을 믿고서 확실히 인증한다는 경계입니다. "내 몸뚱이가 비어 있어 사대색신(四大色身)이 허망하다. 수상행식도 허망하다"고 하면, "부처님께서 말씀했으니까 사실은 사실인데, 감이 안 잡히는구나" 이렇게 보통은 느끼지 않겠습니까마는, 마음의 맑은 기운이 더욱더 증가되어 오는 때에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모두가 다 정말로 무상하고 허망하구나" 하는 것이 몸에 가슴에 사무치게 명심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리를 많이 공부한 분도 꼭 선을 닦아서, 기도를 하건 참선을 하건 적어도 며칠 동안만이라도 밀어붙여야 합니다. 그래야 "아 이 몸뚱이가 허망하구나 물질이라는 것도 모든 제법이 다 공이구나" 하고 확실한 믿음이 오는 것입니다.

 

   난법(煖法)을 얻었다 하더라도 아무렇게나 행동하면 소멸되고 맙니다. 또 명증정(明增定)인 정법(頂法)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렁저렁 생활하면 그냥 후퇴하고 맙니다. 그래서, 난법 정법을 얻은 단계에서는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함부로 살아버리면 지옥도 가고 아귀도에도 가고 축생도에도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순정, 인법으로 해서 확실히 믿고 잠재의식 가운데에 그 종자를, 뿌리를 명확히 둘 때는, 인법을 증득한 사람들은 삼악도에 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쇠뿔은 단김에 빼라고 하듯이 공부할 때는 간단없이 지속을 시켜야지 하다 말다 하면 안 하는 것보다는 낫지만 공부가 진척이 안됩니다. 또는 우리 잠재의식은 과거 숙세부터의 습기가 많기 때문에 하다 말다 하면 잠재의식 가운데서 다시 또 망념이 솟아 오르는 것입니다. 마땅히 지속적으로 공부해야 잠재의식에 선근이 뿌리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세제일법(世第一法)입니다. 인간 범부 세상에서는 제일 높은 법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무간정(無間定)이라 합니다. 무간정은 번뇌가 낄 사이가 없다는 뜻입니다. 아직 성자는 미처 못되었다 하더라도 번뇌가 낄 사이가 없다, 또는 견도 하는 지위와 세제일법과는 찰나의 사이이기 때문에 간격이 없다는 뜻도 됩니다. 무간정에서 비로소 모든 존재의 본질인 금강불성(金剛佛性)의 심일(心日)을 견증(見證)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선 세간정법(世間頂法)에 안주해서 동요가 별로 없습니다. 무상하다고 확고하게 달관한 경계에서 고민이 나올 수가 없겠지요. 자기 몸뚱이가 상처를 입으나, 아프나, 이별을 하나 또는 재산 문제로 실패를 하나, 원래 없는 허망한 꿈같은 것이 없어지는 것이니까, 그런 것 때문에 우리 마음이 상처를 입을만한 아무런 이유가 없을 정도로 모든 경계를 여법하게 통찰하게 되는 경계입니다.

 

   여기까지가 4선근입니다. 이런 경계도 난법, 정법, 인법으로 점차로 올라 가는 분도 있고 또 용맹정진을 잘하고 과거 숙세 부터 선근이 깊은 사람들은 비약적으로 뛰어 올라가기도 합니다. 난법에서 인법으로 바로 가기도 하고 인법에서 세제일법을 안 거치고 견도(見道)로 올라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공부하는 분들 중에 어떤 분들은 자칫하면 "아, 차서가 본래 없는 것인데 집착할 필요가 있겠는가"하고 이런 차서를 무시해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과거에 달도(達道)한 도인들이라든가 부처님께서는 일반적인 수준을 위해서 한계있게 합리적으로 체계를 세운 것이니까 일단 알아두면 편리합니다. "아, 내 공부가 지금 난법정도구나, 이때는 정법이구나" 이와 같이 스스로 점검할 수가 있어서 섣부른 스승이 없다 하더라도 혼자 토굴에서 도 공부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성위(聖位有學道, 無學道)

 

   그 다음에는 성위(聖位)로서 성자의 지위입니다.

   세제일법에서는 마음의 동요가 없이 망상에 간격(間隔)되지 않고 나간다 하더라도 아직은 성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정도만 되어도 성자의 한계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아, 이것이 도통(道通)이구나" 하는데, 우리는 이런 것을 엄정하게 경계를 해야 합니다. 석존 이후에 이런 과오를 범한 분들이 한 두분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이 수도 과정의 법상을 해설한 것은 증상만(增上慢)의 죄를 범하지 않고 자기 한계와 자기 공부를 점검하기 위해서입니다. 증상만의 죄를 범하면 자기를 속이고 성자를 속이고 성품을 속이기 때문에 공부가 진척이 안됩니다. 또한 자기가 못 통()하고 통했다 하고 성인이 아니고서 성법(聖法)을 얻었다하는 대망언을 범하면 결국은 승려의 자격을 상실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것을 경계하기 위해서는 법의 차서를 꼭 알아서 점검을 바르게 해야 하고 자기가 잘 모를 때는 믿는 선지식한테 가서 점검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위(聖位)에는 유학도(有學道)와 무학도(無學道)가 있습니다. 유학도는 번뇌의 습기를 아직은 다 못 끊어서 수도를 할 단계입니다. 그러나 무학도는 번뇌의 습기마저도 다 끊어버려서 다시 배울 것이 없는 단계입니다. 이른바 멸진정(滅盡定)을 성취해서, 번뇌를 멸진하고 아()를 멸진하고 실아실법(實我實法)을 다 멸진해서 다시 할 것이 없는 경계입니다.

 

 


   ①유학도(有學道)

 

   유학도에는 견도(見道)와 수도(修道) 단계가 있는데 견도는 소승 4과()인 수다원과 사다함과 아나함과 아라한과 가운데 처음인 수다원과 즉 예류과입니다.

   4과는 습기가 얼마만치 제거가 되고 안되었는가 하는 깊고 옅은 차이 뿐인 것이지 모두가 다 성자의 지위입니다. 처음에 수다원과(須陀洹果)는 예류과(預流果)라 하는데, 범부의 경계를 떠나서 성자의 경계에 참여한다는 뜻입니다. 죽고 살고 분별 시비하는 생사망의 그물을 벗어나는 단계입니다. 마치 새가 채롱을 벗어나듯이, 사실 우리 중생들은 아직 성자가 못되는 지금 새장에 갇혀 있는 새나 똑같습니다. 아무리 푸득거리고 잘난척해도 내나야 새장에 갇혀 있는 새나 다름없습니다.

   예류과에서는 생사망을 출리(出離)해서 금강불성을 견증(見證)합니다. 진여불성자리, 우리 자성을 현관(現觀)으로 직접적으로 직관해버려야 비로소 예류과인 성자의 지위에 참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견도(見道)요 견성(見性)입니다.

 

   어록들을 보면 견도 견성 가지고 굉장히 많이 싸웁니다. 견성은 훨썩 높고 견도는 밑에라고 하지만, 불경을 보면 어디를 보아도 다 똑같은 개념입니다. 다만 종파성 때문에 자기 종파가 제일 옳고 다른 것을 폄하하는 데서 자시비타(自是非他)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과정을 거쳐왔기 때문에 우리 세대는 그래서는 안됩니다. 또는 정말로 견도를 하고 견성을 했을 때는 경계가 같아버리니까 하등 시야비야(是也非也)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참다운 견성을 못하고 참다운 견도를 못한 사람들은 섣불리 문자() 가지고 분별하고 따집니다.이런 것을 우리는 경계를 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수도(修道)는 보살십지(菩薩十地)로 말하면 초지(初地)부터 10지로 점차 닦아 나가는 것이 순서 아니겠습니까마는 4과(四果)에서는 그런 것을 다 합해서 말합니다.

   사다함과(斯陀含果)는 인천(人天)에 한번 생을 받은 후에 열반에 든다고 일래과(一來果)라 합니다. 인간에나 천상에나 욕계(欲界)에 한번 오는 과입니다. 예류과를 성취했다 하더라도 욕계번뇌가 다 소멸한 것이 아닙니다. 불경에 보면 욕계9품 번뇌 가운데서 6품이 떼어졌지마는 3품이 남아 있기 때문에, 남아 있는 욕심의 찌꺼기 때문에 다시 욕계를 한번 와서 열반에 든다는 과입니다. 열반에 든다는 것은 진여불성과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일래과(一來果)에서는 욕계에 한 번 올 수 있는 정도 밖에는 번뇌가 안 남았으니까, 함부로 파계무참한 짓은 못하겠지요. 우리 범부지에서는 그야말로 "진날 개 사귄"격으로 뗄려 해도 떨어지지 않는 지겨운 번뇌가 욕계 번뇌입니다. 

 

   그 다음 아나함과(阿那含果)는 불환과(不還果)라 합니다. 다시 욕계에는 안 온다는 경계입니다. 색계나 무색계에는 옵니다마는 욕계에는 다시 올 필요가 없습니다. 욕계의 사혹(思惑)번뇌인 9품을 다 떼었기 때문에 불환과라, 다시 욕계에 돌아오지 않습니다. 수혹(修惑ㆍ思惑)을 모조리 끊어버렸으니 다시 욕계에 돌아을 필요가 없습니다.·

 

   번뇌를 견혹과 수혹으로 구별하여 말합니다. 견해에 따르는 번뇌는 견혹(見惑)이라 하는데 견도할 때에 몽땅 떼어버리는 것이고 사혹(思惑) 즉 수혹(修惑)은 일체 사물의 성품을 모르거나 정의(情意)에 따른 번뇌로서 점차로 10지까지 올라가면서 다 끊습니다.

   견도할 때에는 "나와 네가 없고 모든 것이 본래로 일미평등한 진여불성이다" 이런 도리에 장애가 되는 견혹을 끊고 바른 도리를 확실히 증명하는 경계입니다. 확실히 증명하는 것은 금강불성(金剛佛性)을 견증(見證)해야 되는 것입니다. 금강불성을 견증하지 못할 때는 항시 의심이 남습니다. 일상생활에도 눈으로 보고 실제로 체험하면 의심하지 않지만 그렇지 못한 것은 자꾸만 시야비야 합니다.

 

 

 

   ②무학도(無學道)

 

   그 다음 아라한과 즉 무학도(無學道)입니다. 아라한과는 이른바 멸진정을 성취해서, 번뇌를 다 멸해 버려서 다시 번뇌가 없습니다. 그때 비로소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온전히 깨닫습니다. 불생불멸한 도리를 확실히 증()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근본불교가 우리한테 필요 없는 것이 아닙니다. 점차로 닦아나가는 순서가 바르고 스스로 공부를 점검할 때나 남의 공부를 점검해 줄 때에도 굉장히 필요한 것입니다.

 

 

   이상으로 근본불교의 수증(修證) 체계를 대체로 마친 셈입니다. 너무나 번쇄한 교리를 대강만 간추려 말씀하게 되니 피상적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무튼, 이번 법회는 전문적인 연구가 아닐 뿐 아니라 우리가 과거에 다 섭렵했던 것을 재확인하고 넘어가는 의미에서 살펴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