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제7장 화엄종사상] 9. 법성게

通達無我法者 2007. 4. 30. 11:51

제7장 화엄종사상

 9. 법성게


지금까지 중도에 대한 화엄종의 여러 가지 이론들을 대략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법성게(法性偈)를 음미하는 것으로 마치겠습니다. 신라시대 의상(義湘)스님이 저술한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는 예로부터 화엄사상의 정수를 간명하게 잘 표현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법성이 원융하여 두 모습이 없으니, 모든 법이 부동하여 본래 적적하도다.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어 일체를 끊으니, 증득한 지혜로 알 바요 다른 경계가 아니니라. 다라니의 다함 없는 보배로 법계의 실보전을 장엄하여 궁극에는 실제의 중도상(中道床)에 앉으니, 예로부터 부동하여 부처라 이름하도다.

法性圓融無二相하니 諸法不動本來寂이로다 無名無相絶一切하여 證智所知非餘境이라 …… 以陀羅尼無盡寶로 莊嚴法界實寶殿하여 窮坐實際中道床하니 舊來不動名爲佛이로다. [大正藏 45, p. 711上]


‘법성이 원융하여 두 모습이 없음’은 법성이 원융해서 시비의 상도 없고 선악의 상도 없이 양변을 완전히 여의었다는 말입니다. 즉 이것은 완전한 쌍차로서 유무(有無), 시비(是非), 선악(善惡), 중생과 부처 등 차별적 양변이 완전히 떨어진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는 일체만법이 다 부동하여 본래가 적적합니다. 천가지 만가지로 움직여도 두 가지 모습이 없어 그 근본 자리는 항상 본래부터 그대로이므로 무어라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모양을 지을 수도 없어서 일체가 다 끊어져 버립니다. 이 끊어진 자리는 오직 깨친 지혜[證智]로서만 알 바여서 깨쳐야 가능한 것이지 깨치기 이전에는 결코 모르는 것입니다. ‘다른 경계가 아니다’ 함은 중지한 사람, 즉 구경각(究竟覺), 정등각(正等覺)을 성취한 부처님을 제외한 나머지 전부를 지적하는데, 법성 원융한 근본 자리는 십지보살(十地菩薩)과 등각(等覺)도 원만하게 모른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법성을 깨쳐 증지를 완전히 성취하면 거기에는 무진한 보배가 꽉 차 있으며, 이러한 무진보(無盡寶)로 법계의 실보전(實寶殿)을 장엄합니다. 그런데 실보전이라 하니 무슨 특이한 법당을 말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진진찰찰 일체불찰(一切佛刹)이 실보전 아닌 것이 없어 참으로 법성의 다라니보(陀羅尼寶), 무진보로서 시방법계의 실보전을 다 장엄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처소를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고, 형상을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는 가운데 분명히 처소가 있고 형상이 있어 흙덩이, 쇳덩이도 모두 실보전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궁극적으로 실제(實際)의 중도상(中道床)에 앉게 되는데, 그 실제라는 것은 법계진여, 즉 법계의 근본을 말하는 것입니다. 법계의 중도상(中道床)에 턱 앉는다는 것은 중도를 정등각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중도를 정등각한 자리에 가서 보면 그 근본 자리는 예로부터 아무리 요동해도 요동한 일이 없습니다. 방편으로서 편의상 억지로 이름붙인 것이 부처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움직임이 없는 부처인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요즈음의 말로 표현하면 화엄종의 엑기스입니다. 화엄경의 근본 골자를 총망라해 가지고 만든 것이 이 법성게(法性偈)인데, 법성게의 총 결론은 중도를 성취한 사람이 부처다라는 것입니다. 결국 화엄경의 근본도 중도에 있지 중도를 제외하고서는 따로 주장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