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제7장 화엄종사상] 8. 심요법문

通達無我法者 2007. 4. 30. 11:50

제7장 화엄종사상

 8. 심요법문


‘오대산 진국대사 징관 답황태자문심요(五臺山鎭國大師澄觀答皇太子問心要)’라는 글이 있습니다. 이것은 중국 오대산에 머무르던 화엄종 제4조인 청량 징관스님에게 당시 황태자가 마음의 요결에 대하여 질문한 것에 대답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글은 마음의 요결에 대하여 화엄사상을 피력한 것이지만 그 기본 내용은 중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서두를 생략하고 중간 부분부터 끝까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글이 선어록(禪語錄)인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수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그것이 비록 마음의 요결에 대한 화엄사상의 표현이기는 하지만 그 취지가 또한 선지(禪旨)와도 부합됨을 말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지(止)를 말하자면 곧 지해[知]와 적적함[寂]을 함께 잊는 것이요, 관(觀)을 논하자면 곧 적적함과 지해를 함께 비추는 것이며, 증득[證]을 말하자면 곧 사람에게 보여줄 수 없는 것이요, 이치[理]를 설하자면 곧 증득이 아니면 요달할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은 적적함[寂]을 깨달으면 적적함이 없으며, 참다운 지해는 지해가 없음이다. 지해와 적적함이 둘이 아닌 한 마음으로 공(空)과 유(有)가 함께 원융한 중도에 계합하여, 머무르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으며, 포섭하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아 시, 비의 둘이 없고 능, 소가 함께 끊어져 이 끊어졌다는 것도 고요하면 곧 반야가 현전하느니라.

言止則雙亡知寂이요 論觀則雙照寂知며 語證則不可示人이요 說理則非證不了니 是悟寂無寂이요 眞知無知라 以知寂不二之一心으로 契空有雙融之中道하여 無住無著하며 莫攝莫收하여 是非兩亡하고 能所雙絶하여 斯絶도 若寂則般若現前하느니라. [景德傳燈錄;大正藏 51, p. 459下]


적적함[寂]은 쌍차이고 지해[知]는 쌍조를 의미하는데, 쌍차도 잊고 쌍조도 잊는 것을 지(止)라 하고, 적적함과 지해를 쌍조하는 것을 관(觀)이라 합니다. 또한 법화경에도 나와 있듯이 “제법의 적멸한 모습은 말과 소리로 표현할 수 없다” 하였듯이 쌍차쌍조인 중도를 실증한 것은 말로 표현되는 것이 아닙니다. 원시경전에서 다섯 비구를 위해 설했다든지 누구를 위해 설했다는 것은 순전히 방편일 따름이지 실법(實法) 그 자체는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실법인 쌍차쌍조의 중도는 또한 실제로 실증을 하여야 그 이치를 말할 수 있는 것이지, 실증을 하기 전에는 그 이치를 설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적적함[寂]을 깨치면 적적함을 볼 수 없고, 참다운 지해[知]는 지해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런 자리에 와서야 비로소 오(悟)라 하든지 견(見)이라 하든지 적(寂)이나 또는 지(知)라 할 수 있는 것이지, 지견이나 지혜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이것은 생멸의 변견(邊見)으로 참된 지(知)가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관(止觀)이란 적(寂)과 지(知)를 말하는데, 이 적과 지는 적, 지를 떠난 데서 하는 소리입니다. 적도 찾아볼 수 없는 적, 지도 찾아볼 수 없는 지, 이것이 참된 적이고 참된 지인 것입니다.

이러한 진적(眞寂)과 진지(眞知)에 있어서는 진적이 진지가 되고 진지가 진적이 되어 원융무애하여 둘이 아닌 하나의 마음으로서 공과 유가 서로 무애한 중도에 계합되어 여기에 머무르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으며, 포섭하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으면서 옳음[是]과 그름[非]이 끊어지고, 주체[能]와 객체[所]가 끊어져 버리며 끊어졌다는 이것마저도 다 끊어져 버리고 완전한 무주무착(無住無着)이 되어 참으로 중도반야가 현전한다는 말입니다. 즉 객진번뇌의 구름이 걷혀 버리고 제8아뢰야(阿賴耶)의 근본 무명까지 완전히 떨쳐 버리면 진여자성(眞如自性)의 반야가 저절로 현전하는 것입니다.


반야(般若)는 마음 밖에서 새로 생기는 것이 아니요, 지혜 성품은 본래 구족한 것이다. 그러나 본래 적적한 것은 능히 스스로 나타나지 못하며 실로 반야의 공력에 말미암는다. 반야와 지혜 성품은 번복하여 서로 이루며 본래 지혜[本智]와 비로소 닦음[始修]은 실로 두 가지 체가 아니다. 함께 없애서 바르게 들어간즉 묘각이 원명하고 처음과 끝이 원융한즉 인과 과가 서로 통하여 마음마음이 부처를 이룸에 한 마음이라도 부처 마음 아님이 없으며, 곳곳에서 도를 이룸에 한 티끌도 불국토(佛國土) 아닌 곳이 없다. 그러므로 참됨과 허망, 사물과 자아는 하나를 들면 전부 거두고, 마음과 중생과 부처는 혼연히 일치한다. 미혹한즉 사람이 법을 따르니 법법(法法)이 만 가지로 차별되어 사람이 같지 않고, 깨달은즉 법이 사람을 따르니 사람사람[人人]이 한 지혜로서 만 가지 경계를 융화함을 알 것이다.


말이 다하고 생각이 끊어지니 무엇이 인(因)이고 무엇이 과(果)이며, 바탕이 본래 적료하니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르리오. 오직 정감을 잊으면 공허한 가운데 밝아서 소식이 온화하리라. 그것은 마치 저 물을 투과하는 달빛이 공허하면서도 가히 볼 수 있음이요, 무심한 거울의 모습이 비치면서 항상 적적함이다.

般若는 非心外新生이요 智性은 乃本來具足이라 然이나 本寂不能自顯하며 實由般若之功이니 般若之與智性이 翻覆相成하며 本智與始修가 實無兩体니라 雙亡正入則妙覺圓明하고 始末該融則因果交徹하여 心心作佛에 無一心而非佛心이요 處處成道에 無一塵而非佛國이라 故로 眞妄物我는 擧一全收하고 心佛衆生은 渾然齊致라 是知迷則人隨於法하여 法法萬差而人不同이요 悟則法隨於人하여 人人一智而融萬境이라 言窮慮絶하니 何因何果며 體本寂寥하니 孰同孰異리요 唯忘懷虛朗하여 消息이 冲融하리 其猶透水月華가 虛而可見이요 無心鑑象照而常寂矣라.


반야가 지혜 성품이고 지혜 성품이 반야로서 본래 부처나 중생 할 것 없이 누구나 똑같이 원만하게 구족되어 있습니다. 반야의 지혜가 본래 구족해 있지만, 이것은 스스로 나타나지 못하고 반야의 공력에 의지해야 나타나는 것입니다. 반야와 지혜 성품은 번복하여 서로 이루며 본래의 지혜[本智]와 비로소 닦는 것[始修]은 실로 두 가지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본지라 하는 것은 본래 갖추어져 있는 것이고 시수라는 것은 비로소 닦아서 얻는 것인데, 본지 밖에 시수가 따로 없고, 시수 밖에 본지가 따로 없어 반야와 지혜 성품은 본래 한 물건을 놓고 다르게 하는 말이지 서로 다른 물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없애서 바르게 들어간다’는 것은 중도에 정입한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묘각 즉 구경각을 성취함을 말합니다.


‘인과 과가 서로 통한다’ 함은 인이 즉 과이고 과가 즉 인으로 중생이 곧 부처이고 부처가 곧 중생으로 쌍차 이대로가 쌍조이고 쌍조 이대로가 쌍차입니다.

‘마음마음이 부처를 이룸에 한 마음이라도 부처의 마음이 아닌 것이 없어서’라 함은 중생의 마음이고 마군(魔軍)의 마음이고 부처의 마음이고 할 것 없이 전체가 다 불심입니다. 또 ‘곳곳에서 도를 이룸에 한 티끌도 불국토가 아닌 곳이 없으니’라 함은 만약 인도의 보리수 아래에서만 성도했다고 하면 그 사람은 불교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한 티끌도 불국토 아닌 곳이 없다’ 하는 말은 일즉일체 일체즉일로 사사무애한 것을 그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됨[眞]이니 허망[妄]이니 사물[物]이니 자아[我]니 하는 것은 하나를 들면 전체가 다 따라와 버립니다. 마음[心]과 부처[佛]와 중생(衆生)이 혼연 일치하여 하나가 전체이고 전체가 하나로 모두가 원융무애하게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은 중도를 깨친 자리에서 하는 소리입니다. 사람이 미혹하면 사람이 법을 따라가 천차만별이 생겨나 처처에 다 막히고 걸리어서 곳곳에서 싸움하지만, 깨달으면 법이 사람을 따라가 전체가 다 한덩이가 됩니다. 따라서 모든 것이 원융무애하여 어디에도 거리낄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말이 다하고 생각이 끊어지고 제8아뢰야의 근본 무명이 다 빠져 버리면 그 자체가 근본적으로 적료(寂寥)하여 인과를 찾아볼 수 없고 같다 다르다고 하는 것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정감을 잊는다[忘懷]’ 함은 일체의 생각과 망정을 다 잊어버린다는 뜻으로 쌍적(雙寂)을 말하는 것이고, 허랑(虛朗)은 공허한 가운데 밝다는 뜻으로 일체를 다 잃어버린 가운데 언제든지 반야의 큰 지혜가 환히 드러나므로 쌍조를 말하는 것입니다. 일체의 망정을 다 잊어버리면 적적하고 또 적적하며 참으로 적적하면 적적한 가운데서 반야의 큰 지혜가 낭연히 홀로 시방세계를 비추고도 남습니다. 이것이 바로 허랑인데, 그것은 허하면서도 항상 밝아 조(照)를 뜻합니다. 그래서 허랑한 그 소식이 온화하면 적(寂)과 조(照)가 서로 원융무애하게 되어 적이 즉 조이고 조가 즉 적이 되어 허랑할 때가 낭료(朗寥)이고 낭료할 때가 허랑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마치 물 속을 투과하여 비치는 달과 같아서, 물 속에 있는 달은 허상이지만 항상 그 달을 분명히 볼 수 있어 적적한 가운데 항상 비추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비유로서 무심한 거울의 영상을 드는데, 거울이라는 것은 본시 무심하지만 거기에는 일체만상이 모두 비칩니다. 이것은 비추지만 항상 적적한 것[照而常寂]으로서 거울 가운데 나타나는 모든 것을 볼 때, 사람이면 사람, 짐승이면 짐승으로서 모든 것이 비치지만, 비치는 것들은 모두 실상이 아니므로 그 실체의 모습을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어 항상 적적합니다. 결국 달빛이나 거울의 영상은 똑같은 것으로서 이들은 적이쌍조(寂而雙照)하고 조이쌍적(照而雙寂)한 중도의 근본 경계를 말할 때 많이 비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