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제8장 선종사상] 1. 중도법문 - (1) 육조스님

通達無我法者 2007. 4. 30. 11:52

제8장 선종사상

 1. 중도법문

  (1) 육조스님


보통 삼론종, 법상종, 천태종, 화엄종이라고 하면 교가(敎家) 이론을 총망라한 것인데, 이 모두는 중도(中道)에 입각하여 법을 설한 것입니다. 따라서 중도를 내놓고는 각 종(宗)은 성립되지 못할 뿐 아니라 중도의 이론이 불교교리의 최고원리라는 것은 누구도 의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교외별전(敎外別傳)을 주장하는 선종(禪宗)에서는 무엇을 근본으로 삼았는가. 선종도 불교에 속하는 이상 중도를 근본으로 삼았느냐가 문제가 됩니다. 이를 밝히기 위해서는 역대 조사스님들의 어록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먼저 육조(六祖)스님의 어록인 육조단경(六祖壇經)을 보면 중도를 근본으로 삼았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육조스님이 돌아가실 임시에 하신 법문을 살펴봅시다.


조사께서 어느 날 문인(門人)인 법해(法海), 지성(志誠), 법달(法達), 신회(神會), 지상(智常), 지통(智通), 지철(志徹), 지도 (志道), 법진(法珍), 법여(法如) 등을 불러서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다른 사람들과 달라서 내가 죽은 후에는 각각 한 지방의 스승이 될 것이니 내가 이제 너희들에게 설법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리니 내 근본 종지를 잃어버리지 않게 하여라.

먼저 삼과(三科)법문과 동용(動用) 36대(十六對)를 들 것이니 드나듦에 양변을 떠나 일체법을 설할 때 자성을 떠나지 마라. 홀연히 어떤 사람이 너희들에게 법을 묻거든 말함에 모두 쌍(雙)으로 하여 모두 대법(對法)을 취하며 오고 감이 서로 원인이 되어도 마침내는 두 법을 다 없이 하여 다시 갈 곳이 없도록 하라.


삼과법문이란 음(陰), 계(界), 입(入)을 말한다. 음(陰)이란 곧 오음(五陰)으로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을 말하고, 입(入)은 12입(十二入)으로서 외육진(外六塵)인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과 내육문(內六門)인 안(眼) ,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가 그것이다. 계(界)는 18계(十八界)로서 6진(六塵), 6문(六門), 6식(六識)이다. 자성(自性)이 능히 일체만법을 포함하는 것을 함장식(含藏識)이라 하는데 만약 사량(思量)을 일으킬 것 같으면 곧 전식(轉識)이다. 육식(六識)을 일으켜 6문(六門)으로 나아가서 여섯 객관[六塵]을 보니 이와 같이 18계가 모두 자성을 따라 작용을 일으킨다. 만약 자성이 삿되면 열여덟 가지 나쁜 것을 일으키고 자성이 올바르면 열여덟 가지 올바름을 일으킨다. 만약 악하게 작용하면 곧 중생의 작용이요, 착하게 작용하면 곧 부처의 작용이다. 작용(作用)은 무엇을 근거로 하여 이루어지는가. 자성(自性)으로 말미암아 대법(對法)이 있다. 외경(外境)의 물질세계에 다섯 상대[五對]가 있으니 하늘과 땅이 상대요, 해와 달이 상대요, 밝음과 어두움이 상대요, 음과 양이 상대요, 물과 불이 상대이다. 이것이 다섯 상대[五對]이다.


법상(法相)의 말에 열 두 상대가 있으니 말, 법[語法]이 상대요, 유, 무(有無)가 상대요, 유색, 무색(有色無色)이 상대요, 유상, 무상(有相無相)이 상대요, 유루, 무루(有漏無漏)가 상대요, 색, 공(色空)이 상대요, 동, 정(動靜)이 상대요, 청, 탁(淸濁)이 상대요, 범, 성(凡聖)이 상대요, 승, 속(僧俗)이 상대요, 노, 소(老少)가 상대요, 대, 소(大小)가 상대이다. 이것이 열두 상대[十二對]이다.

자성이 작용을 일으키는 데 열아홉 상대가 있다.


장, 단(長短)이 상대요, 사, 정(邪正)이 상대요, 치, 혜(痴慧)가 상대요, 우, 지(愚智)가 상대요, 난, 정(亂定)이 상대요, 자, 독(慈毒)이 상대요, 계, 비(戒非)가 상대요, 직, 곡(直曲)이 상대요, 번뇌와 보리가 상대요, 상, 무상(常無常)이 상대요, 비, 해(悲害)가 상대요, 희, 진(喜瞋)이 상대요, 사, 취(捨取)가 상대요, 진, 퇴(進退)가 상대요, 생, 멸(生滅)이 상대요, 법신(法身)과 색신(色身)이 상대요, 화신(化身)과 보신(報身)이 상대이니 이것이 열아홉 상대 [十九對]이니라.”


조사께서 말씀하셨다.

“이 36대법(三六對法)을 잘 쓸 것 같으면 도(道)가 일체경법(一切經法)에 관통하고 출입할 때 양변을 떠나 버려 자성작용과 여러 사람의 말에 밖으로 상(相)은 있지만 상을 떠나고 안으로 공(空)은 있지만 공을 떠난다. 만약 상(相)에 집착할 것 같으면 곧 사견(邪見)을 기르게 되고, 만약 공(空)에 집착하면 즉, 무명(無明)을 기르게 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너희들에게 뜻을 물을 때 유(有)를 물으면 무(無)로써 대하고 무(無)를 물으면 유(有)로써 대답하며 범(凡)을 물으면 성(聖)으로써 대답하고 성(聖)을 물으면 범(凡)으로써 대답하여 이도(二道)가 서로 인(因)해서 중도(中道)가 성립된다. 한 번 물으면 한 번 대답하고 나머지 물음도 한결같이 이렇게만 하면 곧 이치를 잃지 않으리라.


가령 어떤 사람이 묻되 ‘어떤 것을 어두움이라 합니까’ 하면 ‘밝음은 인(因)이 되고 어두움은 연(緣)이 되어 밝음이 없어지면 곧 어두움이다’라고 대답하여 밝음으로써 어두움을 나타내고 어두움으로써 밝음을 나타내서 오고 감이 서로 원인이 되게 하여 중도의 진리를 이루게 해야 한다. 나머지 물음도 다 이와 같이 할 것이다. 너희들이 나중에 법을 전함에 있어서도 이렇게 하여 번갈아 서로 가르쳐 줌으로써 종지(宗旨)를 잃지 말 것이니라.”


付囑第十(法門對示等九)

師一日에 喚門人法海志誠法達神會智常智通志徹志道法珍法如等曰 汝等은 不同餘人이라 吾滅度後에 各爲一方師하나니 吾今敎汝說法하야 不失本宗케 하리라. 先須擧三科法門과 動用三十六對하리니 出沒에 卽離兩邊하고 說 一切法호대 莫 離自性하라. 忽有人이 問汝法이어든 出語盡雙하야 皆取對法하여 來去相因하야 究境에 二法을 盡除하여 更無去處하라.

三科法門者는 陰界入也라 陰은 是五陰이니 色受想行識이 是也오 入은 是十二入이니 外六塵色聲香味觸法과 內六門眼耳鼻舌身意가 是也오 界는 是十八界니 六塵六門六識이 是也니라. 自性이 能含万法을 名含藏識이니 若起思量하면 卽是轉識이라 生六識出六門 見六塵하나니 如是一十八界가 皆從自性起用하나니라. 自性이 若邪면 起十八邪요 自性이 若正이면 起十八正이라.

若惡用이면 卽衆生用이요 善用이면 卽佛用이니라. 用由何等고 由自性하야 有對法하나니.

外境無情이 五對니 天與地對며 日與月對며 明與暗對며 陰與陽對며 水與火對라 此是五對也오.

法相語言에 十二對니 語與法對며 有與無對며 有色與無色對며 有相與無相對며 有漏與無漏對며 色與空對며 動與靜對며 淸與濁對며 凡與聖對며 僧與俗對며 老與少對며 大與小對라 此是對十二對也라.

自性起用이 十九對니 長與短對며 邪與正對며 痴與慧對며 愚與智對며 亂與定對며 慈與毒對며 戒與非對며 直與曲對며 實與虛對며 險與平對며 煩惱與菩提對며 常與無常對며 悲與害對며 喜與嗔對며 捨與慳對며 進與退對며 生與滅對며 法身與色身對며 化身與報身對니 此是十九對也라.

師言 此三十六對法을 若解用하면 卽道 貫一切經法하여 出入에 卽離兩邊하야 自性動用과 共人言語에 外於相에 離相하고 內於空에 離空이니 若全着相하면 卽長邪見이오. 若全執空하면 卽長無明이니라.

若有人이 問汝義호대 問有어든 將無對하고 問無어든 將有對하며 問凡이어든 以聖對하고 問聖이어든 以凡對하야 二道相因하야 中道義니라. 如一問一對하고 餘問을 一依此作하야 卽不失理也리라.

設有人이 問호대 何名爲暗고 答云明是因이요 暗是緣이니 明沒卽暗이라. 以闇顯明하고 來去相因하야 成中道義니라. 餘問을 悉皆如此니 汝等이 於後傳法에 依此轉相敎授하야 勿失宗旨어다. [六祖大師法寶壇經;大正藏 48, p. 360]


육조스님을 모시고 있던 스님 중에서 남악 회양(南嶽懷讓)스님이나 청원 행사(靑原行思)스님은 딴 곳에 나가서 법을 펴고 있었지만 법해(法海)스님 등은 육조스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모시고 있었습니다. 스님을 모시고 있는 스님들 가운데 수승한 10대 제자를 모아 놓고 무문자설(無問自說)로 이렇게 유촉하였습니다. 본래 수법제자(受法弟子) 같으면 이러한 것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또 한 번 말씀하신 것은 비록 안다고 해도 다시 한 번 강조하기 위해서이고, 또 그 당시 사람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후세 중생들을 위해서입니다. 앞으로 육조스님이 하고 싶은 말씀이 선종에 있어서 근본 원리이기 때문에 특별히 불러서 유촉한 법문입니다.


언제든지 설법을 할 때는 양변을 떠난 중도(中道)에 입각해서 설법을 하되 자성(自性)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자성이란 불성(佛性)을 말하는데 불성이란 비유비무(非有非無)이고 역유역무(亦有亦無)한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누가 유(有)로 물으면 무(無)로 대답하고 무(無)로 물으면 유(有)로 대답해야 합니다. 유(有)란 스스로가 유가 아니고 무(無)도 스스로가 무가 아닙니다. 무(無)가 있기 때문에 유(有)이고 유(有)가 있기 때문에 무(無)가 있습니다. 따라서 유를 떠나서 무가 없고 무를 떠나서 유가 없습니다. 이것을 ‘오고 감이 서로 원인이 된다[來去相因]’고 합니다. 그리고 구경에 두 법을 모두 버리라고 한 것은, 다시 말하면 무를 떠나서 유가 없고 유를 떠나서 무가 없다면 이것은 생멸법(生滅法)이지 절대법(絶對法)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두 법을 다 버려야 됩니다. 생멸법을 버려서 다시 갈 곳을 없게 해야 합니다. 결국 양변을 여의는 것을 역설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누가 법문을 묻든지 간에 반드시 양변을 여읜 중도에 입각해서 법을 설해야 되지 그렇지 않을 것 같으면 근본 불법이 아닐 뿐 아니라 육조의 아손이 아닙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교외별전이라고 하는 조계 선종(曹溪禪宗)의 근본 입장도 중도에 서 있지 중도를 떠나서는 조계선종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계선종을 바로 알려면 중도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천태종이나 삼론종이나 법상종이나 그 근본은 중도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첨가해서 설명할 것이 있는데 육조스님이 의발(衣鉢)을 전한 부분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혹자는 행사스님에게 육조스님이 의발을 전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 본 것입니다. 그 부분을 대장경에서 살펴보겠습니다.


그전에는 옷과 법[衣法]을 함께 실행하여 스승과 제자가 주고받았으니 옷을 가지고 믿음[信]을 표시했다. 내가 이제 사람을 얻었는데 어찌 믿지 아니함을 걱정하겠느냐. 내가 옷을 받은 이래로 고생을 많이 했다. 하물며 후대에서랴. 반드시 경쟁이 많을 것이다. 옷은 산문(山門)에 두고 너는 마땅히 각 지역에 나누어 교화하여 이 법을 단절케 하지 마라.

從上에 衣法雙行하여 師資가 遞授거든 衣以表信이요 吾今得人인데 何患不信이리오 吾受衣以來로 遭此多難이요 況乎後代리오 爭競必多하나니 衣卽留鎭山門하고 汝當分化一方하야 無令斷絶케 하라. [景德傳燈錄 5;大正藏 51, p. 240上]


이 대목은 전등록 청원행사(靑原行思)장에 나오는 것입니다. 즉 6조대사 이전에는 옷과 법[衣法]을 서로서로 쌍행해서 전해 내려왔는데 이것은 옷을 가지고 신(信)을 표시한 것이고 법은 마음을 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사람을 얻었는데 어찌 믿지 아니함을 겁낼 것이 있겠는가.’ 즉 네가 지금 법을 성취하였는데 그 신(信)을 표시함에 있어서 옷은 필요가 없다 하였으니 이것은 옷을 전할 필요가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내가 옷을 전해 받은 이래로 옷을 서로 뺏으려고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하물며 후대에는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즉 옷 때문에 싸움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옷은 조계산에 그대로 두고 너희는 마땅히 딴 곳으로 가서 교화를 하라’며 이 법을 단절치 않게 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여기서 옷은 ‘산문에 두라[留鎭山門]’ 함은 조계산에 그대로 두라는 뜻입니다.


또 육조단경에서 인용해 보겠습니다.

법해(法海) 상좌가 재배하고 여쭈었다. “스님께서 입멸하신 후에 옷과 법은 마땅히 어떤 사람에게 맡기십니까.”

“내가 대범사에서 설법한 이래 지금에 이르도록 기록하여 유통되는 것이 있으니 이것을 법보단경이라 한다. 너희들이 수호하여 번갈아 전해 주고 모든 중생을 제도하되 다만 이 단경에 의지하여 설하면 이것이 정법(正法)이다. 지금 너희들을 위해 법을 설하고 옷은 전해 주지 않는다. 너희들의 신근(信根)이 순숙(淳熟)하기 때문에 결정코 의심이 없으며 큰 일을 감당할 만하다. 그러므로 이전 조사인 달마대사께서 붙이신 게송의 뜻에 의거하여 옷은 전하지 않을 것이다” 하시고 그 게송을 말씀하셨다.


내가 본래 이 땅에 와서

법을 전하고 어리석은 중생을 구하니

한 꽃에 다섯 잎 피어

열매가 저절로 이루리라.


法海上座가 再拜問曰하기를 和尙入滅之後에 衣法當付何人하니이고 師曰 吾於大梵寺에 說法해서 以至于今이라 抄錄流行하니 目曰法寶壇經이라 汝等이 守護하여 遞相傳授하라 度諸群生일댄 但依此說이요 是名이 正法이라. 今爲汝等說法하야 不付其衣라 蓋爲汝等 信根이 淳熟하야 決定無疑거든 堪任大事라 然이나 據先祖達磨大師가 付授偈意에 衣不合傳 偈曰.

吾本來玆土 傳法救迷情

一花開五葉 結果自然成.

[法寶壇經;大正藏 48, p. 361上]


이것뿐만 아니라 육조스님이 옷을 조계산에 두고 전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글을 지은 것이 있는데 이것이 유명한 불의명(佛衣銘)입니다. [劉禹錫撰;大正藏 48, p. 364中] 여기의 첫머리에 ‘부처님 말씀은 행하지 않고 옷이 싸움의 근본이 된다[佛言不行佛衣乃爭].’ 그래서 옷을 전하지 아니한다고 나와 있습니다.그리고 현종(玄宗) 초 육조스님이 돌아가신 뒤 얼마 안 되어 현종이 육조스님의 의발을 청해서 궁중에 모셔 놓았는데 그 아들인 숙종이 죽고 난 뒤에도 옷을 조계산에 돌려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숙종 아들 대종(代宗)이 꿈을 꾸었는데 육조스님이 의발을 조계산으로 도로 돌려보내 달라고 현몽을 했습니다. 그래서 영태(永泰) 원년 5월 5일에 조칙을 내려 조계산에 돌려보냈다는 대목이 육조스님의 비문에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짐이 꿈에 혜능대사를 보았는데 전해 내려온 옷 가사를 조계로 보내달라고 청하니 내가 진국 대장군 유순경을 시켜서 받들어 모시고 보내며, 이것은 나라의 국보이니 본사에게 여법하게 잘 보관하라 하였다.

朕이 夢感能禪師 請하건대 傳衣袈裟에 却歸曹溪라 今遺鎭國大將軍劉崇景해서 頂戴而送하니 朕謂之國寶니 卿可於本寺如法安直하라. [六祖大師緣記外記;大正藏 48, p. 364中, 下]


이러한 여러 가지의 증거를 보아서 육조스님이 옷을 전하지 않았다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