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제8장 선종사상] 2. 견성의 본질 - (6) 상적상조

通達無我法者 2007. 4. 30. 12:01

 

제8장 선종사상

  2. 견성의 본질

   (6) 상적상조


영락경에서 말씀하되 ‘등각은 조적이요 묘각은 적조니라’ 하였다. 지금 제8지 자재위보살 이상의 무생도 또한 조적(照寂)이다. 그러므로 만약 적조를 증득하면 부처님 지위와 같다.

瓔珞에 云 等覺은 照寂이요 妙覺은 寂照니라 今八地無生도 亦照寂이니 若得寂照하면 卽同佛地故니라. [淸凉疏]


제8지 자재위보살 이상도 멸진정의 오매일여가 되어 무분별지를 체득하는데 어째서 이것을 조적(照寂)이라 하느냐 하면 이 무분별지에는 아직까지 조체(照體)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참다운 부처님 지위는 이 조체(照體)까지도 찾아볼 수 없는 무소득인데 적적하게 비치는 조체가 남아 있어서 적조라 하지 않고 조적이라고 합니다. 백장스님도 여기 대해서 많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진속 2제(二諦)를 쌍조하는 번뇌중에 있는 것이 8지 자재위보살 이상의 경지인데, 이 경지를 타파하고 일체가 다 적적하여 무소득인 적조의 경지와 아직 무분별지가 남아 있어 무소득이 아니며 조체가 남아 있는 조적의 경지와는 구별해서 말합니다.


위없는 대열반이여 둥글고 밝아 항상 적조하니라.

無上大涅槃이여 圓明常寂照로다. [壇經]


사마타인 까닭에 비록 고요하나 항상 비추고, 비바사나인 까닭에 비록 비추나 항상 고요하며, 우필차인 까닭에 비침도 아니요 고요함도 아니니라. 비치나 항상 고요한 까닭에 속(俗)을 말하나 곧 진(眞)이요, 고요하나 항상 비치는 까닭에 진(眞)을 말하나 곧 속(俗)이며, 고요함도 아니요 비침도 아닌 까닭에 유마거사가 비야리에서 입을 다물었느니라.

以奢摩他(止, 定)故로 雖寂而常照요 以毘娑舍那(觀慧)故로 雖照而常寂이요 以優鉢又(捨, 平等)故로 非照而非寂이니라 照而常寂故로 說俗而卽眞이요 寂而常照故로 說眞而卽俗이요 非寂非照故로 杜口於毘耶니라. [永嘉集]


사마타는 죽은 가운데서 산 것이요 비바사나는 산 가운데서 죽은 것이니 실지로 구경각을 성취하고 적이쌍조(寂而雙照)하고 조이쌍적(照而雙寂)하여 차조(遮照)가 동시이며 명과 암이 쌍쌍(雙雙)한 중도의 구경경계를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대반야가 비추니 해탈의 깊고 깊은 법이로다. 법신의 적멸체에 셋과 하나의 이치가 원융하다. 공행이 같은 곳을 알고자 하면 이를 상, 적, 광이라 하느니라.

摩訶般若照하니 解脫甚深法이로다 法身寂滅體가 三一理圓常이니 欲識功齊處인댄 是名常寂光이니라. [長沙岑]


남전스님이 제자되는 장사 경잠(長沙景岑)선사가 과상열반(果上涅槃)에 대한 문답 끝에 답하신 게송입니다. 대개 상(常)은 법신이요, 적(寂)은 해탈이요, 광(光)은 반야에 비유합니다. 그래서 상, 적, 광이라 하면 법신과 해탈과 반야 이 세 가지가 하나로 원융무애한 것을 말합니다. 적(寂)이라 하면 분별망상은 말할 것도 없고 제8 아뢰야 미세념까지도 완전히 끊어져 없어진 곳을 말하느니만큼 이것이 대원경지이니 상적광(常寂光)이 여기서 성립되는 것입니다.


내가 사라쌍수 사이에서 대적멸정에 들어 본원(本源)으로 돌아가서 시방 삼세의 모든 부처님들과 더불어 법계에 상주하여 항상 고요하고 항상 비추느니라.

我於雙樹間에 入大寂滅定하야 反本還源하여 與十方三世一切諸佛로 常住法界하여 常寂常照하느니라. [都序 下]


부처님 경계라는 것은 살았거나 열반하였거나를 막론하고 미래겁이 다하도록 상적상조(常寂常照)한 이 경계 가운데에서 백억화신을 나투어서 일체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근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공부를 성취하는 데 있어서는 상적상조하는 법을 성취하지 않고서는 공부가 아니니까 상적이라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분별망상이 조금이라도 그대로 기멸하면 상적이 될 수 없고, 일체 분별망상이 다 떨어진 대무심지에 들어간다 해도 무분별지라는 조체(照體)가 남아 있으면 상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참다운 상적은 구경각을 성취하여 대원경지가 나타나는 데서 성립되는 것이니 이 경계를 우리가 실지로 성취해야 됩니다. 그 방법은 화두를 부지런히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일체 중생 내지 무구지까지도 모두 정토가 아니며 과보에 머무르는 까닭이요, 오직 부처님만이 중도 제일인 법성의 땅에 사느니라.

一切衆生이 乃至無垢地 盡非淨土니 住果報故요 唯佛이 居中道第一法性之土니라. [瓔珞經;大正藏 24]


너희들 이치를 통한 사람들에게 말하노니 방망이와 할은 때를 따라 쓸지니라. 만약에 근본 뜻을 밝게 알면 밤중에 태양이 빛나리라.

報汝通玄士하오니 棒喝을 要臨時라 若明端的旨하면 半夜에 太陽輝로다. [慈明三玄三要總頌;大正藏 48]


이것은 자명스님이 삼현삼요(三玄三要)의 총송(總頌)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삼현삼요를 바로 알려면 상적상조한 구경법, 중도 제일 법성을 바로 깨쳐야 알 수 있지 그 전에는 절대로 삼현삼요를 모릅니다.


이상으로 견성성불이라든지 무심무념이라든지 오매일여라든지 하는 등의 문제에 대해서 대강 얘기한 것 같습니다.

이를 한 번 더 요약하면 교외별전에서는 견성성불을 표방하는데 견성이 즉 성불이고 성불이 즉 견성입니다. 견성해서 성불한다는 식으로 두 단계로 나누어 보는 경향은 잘못된 견해입니다. 부처님과 조사들이 말씀하신 견성은 구경각을 말하며 무생법인을 그 내용으로 하는 것입니다. 제8 아뢰야 무기식까지 벗어난 무심지에 들어감에 있어서 한번 뛰어넘어 바로 여래지에 들어가면 그만이지만, 중생이라는 것은 근기가 여러 가지가 있어 바로 들어가기 어려운 동시에 또 오매일여라는 관문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참으로 철저한 무심지에 들어가려면 오매일여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되는데, 설사 오매일여의 관문을 통과해서 숙면일여의 무심지에 들어갔다 하여도 보통 중생이 생각하는 무심은 크게 죽었을 뿐이지 죽은 데서 크게 살아나지는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제8 아뢰야 무기식, 미세유주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매일여가 되었다 해도 거기에 머무르지 말고 살아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원오스님이 몽중일여에 들어간 대혜스님에게 ‘언구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라 하여 ‘유구와 무구가 등칡이 나무를 의지함과 같다’는 화두를 자꾸 참구시켜 결국은 바로 깨쳐서 구경각을 성취케 한 것처럼 우리도 무심지에 들었다 해도 부지런히 화두를 의심하여야 합니다. 대혜스님뿐만 아니라 설암스님이라든지 고봉스님이라든지 큰스님네들이 모두 다 같은 경로를 밟아서 오매일여한 데서 확철히 깨쳐서 공부를 성취한 것입니다.


그런데 요사이 보면 공부를 해나가다가 어떤 생각이 좀 나면 사량분별이나 객진번뇌가 그대로 있는 여기서 뭐 알았다 하고 견성했다 하고 보림한다고 하여 화두고 뭐고 다 내버리고 앉았는데 이것은 고불고조가 말씀하신 방법과는 십만팔천 리나 떨어져 있습니다. 크게 죽은 데서, 대무심에서 깨쳐서 크게 살아나면 이것이 상적광이며 쌍차쌍조(雙遮雙照)한 것이며 중도 제일 법성의 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고불고조가 밟아간 것, 경험한 것을 우리가 바로 성취해야지 이것을 바로 성취하지 않고서 어떤 다른 것을 법이라 도라 견성이라 하면 이것은 고불고조가 바로 전한 법이 아니고 일종의 외도적인 마구니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크게 죽어서 다시 살아나지 않을 것 같으면 생사를 절대로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불교라는 것은 생사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근본인데 생사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 같으면 불법에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에 대해서 자세한 행상을 알아서 공부하는 데 귀감을 삼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