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제8장 선종사상] 3. 돈오점수사상 비판 - (2) 돈오점수 - iii. 간화결의론

通達無我法者 2007. 4. 30. 12:05

제8장 선종사상

 3. 돈오점수사상 비판 

  (2) 돈오점수

   ⅲ. 간화결의론


보조스님의 사상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보조스님이 돌아가신 6년 후에 수제자되는 진각(眞覺)스님이 간행한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과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이라는 두 가지 책입니다. 보조스님이 돌아가신 뒤 유고 속에서 발견되어서 출판했는데 거기에 와서는 완전히 방향이 달라져 있습니다. 간화결의론에서는 ‘선이란 화두를 해서 깨친 증오(證悟)다’라고 철두철미하게 주장하여, 해오(解悟)라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볼 것은 돌아가시기 반년 전에 절요에 그런 모순과 혼란이 있었는데 반년 뒤에 과연 명백하게 ‘증오(證悟)만이 선이고 해오(解悟)는 선이 아니다’고 하여 평생에 주장해 온 사상의 대전환을 과연 할 수 있겠는가가 문제가 됩니다. 그리하여 이것들은 보조스님이 직접 쓴 것이 아니고 돌아가신 뒤에 수제자인 진각스님이 지었다고 혹 추측해 볼 수 있는 문제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 책이 생전에 나오지 않았으며, 돌아가신 뒤에 곧 출판한 것도 아니고 6년 뒤에나 나왔으니 6년이란 세월을 왜 그냥 흘러 보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렇든가 저렇든가 간화결의론이 절요보다 그 사상이 한 걸음 나아간 것만은 사실이며, 또 그것이 보조스님의 친저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보조스님 돌아가신 뒤에 조계산 송광사 문하에서 ‘돈오점수는 교종이며 선종은 아니다’고 분명히 표시한 것만은 사실입니다. 진각스님이 스스로 발문도 짓고 여러 가지 설명을 붙여서 출간했습니다. 그런데 팔백여 년 후 오늘날 선방에서는 어째서 보조스님의 돈오점수사상이 판을 치고 있는지 참으로 이해하기 곤란합니다. 보조스님을 몰라도 너무들 모르고 있습니다.


보조스님은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에서 원돈신해(圓頓信解), 즉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사구(死句)라 하고, 경절문(徑截門) 즉 선종의 화두를 깨치는 증오문(證悟門)을 활구(活句)라 하고서 사구(死句)를 근본으로 하는 원돈신해, 돈오점수의 문으로 들어가지 말고 활구(活句)를 근본으로 하는 증오문으로 들어가라고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원돈신해문은 말 길과 뜻 길이 있으며 듣고 알며 생각하는 것이어서 초심학자들도 믿고 받들어 가질 수 있다. 경절문은 비밀히 계합함을 스스로 증득하는 것이어서 말 길과 뜻 길이 없으며 듣고 알며 생각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만약 상근기의 큰 지혜가 아니면 어찌 밝게 얻을 수 있으며 어찌 뚫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보통의 배우는 무리가 의심하고 비방함은 이치가 자연히 그렇다.

圓頓信解門有語路義路하며 聞解思想故로 初心學者亦可信受奉持나 徑截門則當於親證密契하야 無有語路義路하며 未容聞解思想故로 若非上根大智면 焉能明得이며 焉能透得耶아 以故汎學輩가 飜成疑謗이 理固然矣이라.


돈오점수를 근본으로 삼는 원돈신해, 즉 해오라는 것은 말 길도 있고 뜻 길도 있고 듣고 알며 생각함도 있어서 누구든지 이해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경절문의 선종은 최후의 구경각을 성취하는 것이니, 거기에는 말 길도 없고 뜻 길도 없고 듣고 알며 생각함도 없어서 참으로 근기가 뛰어난 사람이 아닐 것 같으면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보통 사람들은 이것을 잘 알지 못하고 자꾸 의심을 하고 비방을 하니 당연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원돈의 이치가 비록 가장 원묘하나 모두 식정(識情)이 듣고 알며 생각하는 헤아림이므로 선문에서 화두를 자세히 참구하여 경절의 깨쳐 들어가는 문에서는 하나하나 모두가 불법에서 지해 병을 구별한다.

此(圓頓)義理가 雖最圓妙나 總是識情聞解思想邊量故로 於禪門話頭參詳徑截悟入로는 門에 一一全揀佛法知解之病也니라.


원돈신해의 이치가 원묘해서 들어보면 그럴 듯하지만 전체가 분별망상 속에서 하는 말이지 실지의 공부가 아니며 불법에 있어서 지해(知解)의 병이라고 한 것입니다. 즉 원돈사상은 불법에 있어 지해의 병이며 참된 선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원돈신해의 여실한 말과 가르침을 사구(死句)라 하니 사람들로 하여금 지해의 장애만 낳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초심학자로서는 경절문의 활구(活句)에 자세히 참구하기 어려우므로 법계 원융사상을 말하여 그것을 신해하게 하여 물러가지 않게 한다. 만약 상근기의 사람이 비밀히 전한 것을 감당하여 과굴을 벗어난 사람인댄 잠깐 경절문의 맛없는 말을 듣자마자 지해의 병에 막히지 아니하고 곧 떨어지는 곳을 안다. 이는 한번 들으면 천 가지를 깨쳐서 대총지를 얻은 사람이라고 한다.

圓頓信解如實言敎를 謂之死句니 以令人生解碍故라 並是爲初心學者 於徑截門活句에 未能參詳故로 示以稱性圓談하야 令其信解하야 不退轉故니 若是上根之土 堪任密傳하야 脫略窠臼者인댄 纔聞徑截門의 無味之談하면 不帶知解之病하고 便知落處하나니 是謂一聞千悟하야 得大摠持者也니라.


원돈신해, 돈오점수는 죽은 말[死句]이다. 왜냐하면 지해만 늘어가서 근본적으로 해탈할 길이 없으니 이 길을 가지 마십시오. 초심학자들은 경절문의 산 말[活句]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화엄의 법계원융사상을 신해하여 물러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혹 죽은 말을 하기는 하지만 만약 여기에 집착하면 결국은 영원히 살아나지 못하고 죽어 버리고 마는 것이니, 실지로 살아남는 길, 활구, 경절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상근의 사람이 교외별전을 감당하여 지해사상을 다 벗어 버리면 한번 깨칠 때 전체를 깨치고 한번 끊을 때 전체를 끊어서 돈오돈수의 구경각을 성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공부하는 사람이 경절문의 화두를 자꾸 참구할 것 같으면 즉 누구든지 활구(活句)를 의지해서 공부할 것 같으면 확철히 깨치고 대총지를 얻어서 구경을 완전히 성취하게 되는 것이니 이 길로 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무릇 참구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활구를 참구하고 사구를 참구하지 말아라. 활구 끝에서 깨치면 영원토록 잊지 않고, 사구 끝에 깨치면 스스로도 구제하지 못하느니라.

夫參學者는 須參活句하고 莫參死句니 活句下에 薦得하면 永劫不忘死句下에 薦得하면 自救도 不了니라.


공부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교가적(敎家的)인 원돈신해(圓頓信解), 돈오점수(頓悟漸修)의 사구(死句)로는 들어가지 말고 경절문(徑閒門)인 교외별전(敎外別傳)의 화두(話頭)를 참구해야 합니다. 활구를 의지하여 공부를 하면 마침내 영원토록 잊지 아니하여 부처와 조사의 스승이 되지만, 사구를 의지하여 공부를 하면 마침내 자기의 번뇌망상도 없애지 못하여 자기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맙니다. 이렇게 분명히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에서는 보조스님이 활구와 사구로 나누어서 말씀했습니다.


홀연히 재미도 없고 찾을 수도 없는 화두 위에서 확철히 깨치면 일심의 법계가 통연히 명백해진다. 그러므로 심성이 갖춘 백천삼매와 무량묘의의 문을 구하지 않아도 원만히 얻는다. 종전 치우친 의리와 문해로써 얻은 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선종 경절문의 화두를 자세히 참구하여 증입하는 비결이라고 말한다.

忽然 於沒滋味無摸索底話頭上에 噴地一發則一心法界가 洞然明白故로 心性所具百千三昧와 無量義門을 不求而圓得也니 以無從前一偏義理聞解所得故로 是謂禪宗徑截門 話頭參詳證入之秘訣也니라.


화두 참선하여 깨친 경계는 해오(解悟), 신해(信解)와는 전연 다른 것임을 말합니다. 그래서 간화결의론에 있어서는 언제든지 증오(證悟)로써 근본을 삼아 말하였지 해오(解悟)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만하면 보조스님이 임종에 가서는 선(禪)과 교(敎)를 분명히 알아서 돈오점수(頓悟漸修)라는 것은 교가의 방편설이지 교외별전의 선종정맥사상은 아니라는 것은 확실히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화두의 의심을 타파하여 확철히 깨친 사람은 무장애법계를 몸소 증득한다.

話頭疑破하야 噴地一發者는 乃能親證無障碍法界矣라.


선종의 경절문을 확철히 깨친 이는 법계 일심을 몸소 증득한다.

禪宗徑截門 噴地一發者는 親證法界一心이라.


여기에서 ‘증득한다[證]’ 함은 최후 구경각을 깨친 것을 말하며, 무장애법계(無障碍法界)나 법계일심(法界一心)은 같은 내용으로서 불지(佛地)를 말합니다.


홀연 확철히 깨치면 법계가 통연히 명백하여 자연히 원융하여 일체 덕을 갖춘다. 육조조사가 말씀하듯 자성이 삼신을 갖추고 사지를 밝혀서 성취하니 보고 듣는 인연을 떠나지 않고서 초연히 불지에 오른다는 것이 이것이다.

忽然噴地一發則 法界洞明하야 自然圓融具德하나니 如曹溪祖師所謂自性이 具三身하야 發明成四智니 不離見聞緣하고 超然登佛地가 是也니라.


화두를 깨쳐서 자성을 밝힌 사람, 곧 견성(見性)한 사람은 삼신(三身), 사지(四智)가 원만히 구족한 부처의 지위에 올랐다는 것이니 이것이 증(證)한다는 말의 참 뜻입니다.


이로써 선문에서 생각을 떠나 서로 전한 것은 법계를 돈증하는 곳임을 알라.

是知禪門離念相傳은 是頓證法界處也라. [圓頓成佛論]


이 말씀은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에 있습니다. 원돈성불론도 보조스님이 돌아가신 뒤 발견된다는 책으로서, 그 내용은 교가(敎家)를 위해서 해오(解悟)와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중심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외별전인 선종은 해오(解悟)가 아니고 증오(證悟)라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으니, 선과 교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뜻을 얻고 말을 잊어버리면 도를 친하기 쉽다’고 하니 이것은 법계처를 돈증하는 곳을 말한다.

故로 云得意忘言道易親이라 하니 是謂頓證法界處也라.


여기에서 인용한 것은 분양(汾陽)스님의 말씀입니다. ‘법계를 돈증한다’ 함은 삼신, 사지가 원만구족한 구경각을 말씀한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선종(禪宗)에서 깨친다 함은 해오(解悟)가 아니고 구경각(究竟覺)이라는 것, 또 견성이란 초발심에서 발현되는 것이 아니고 구경법이라는 것이 완전히 표시되어 있습니다. 보조스님이 선종(禪宗)을 위해서 지은 간화결의론에서뿐만 아니라 교가(敎家)를 위해서 지은 원돈성불론에 있어서도 선종(禪宗)이란 해오(解悟)가 아니고 증오(證悟)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간화결의론에서는 선(禪)과 교(敎)의 관계는 어떻게 되느냐?


선문의 경절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처음부터 법의 이치와 들어 이해하는 생각이 없이 바로 재미없는 화두로 드러내고 깨달을 뿐이다. 그러므로 말 길도 없고 뜻 길도 없고 심식으로 생각할 곳이 없고 또한 보고 듣고 알고 행하는 등 시간의 앞뒤가 없다가 홀연히 화두를 확철히 깨치면 일심법계가 통연히 두루 밝다. 그러므로 원교의 관행하는 이와 선문의 깨친 사람과 비교하면, 교내, 교외가 근본적으로 같지 않고 시간의 느리고 빠름이 또한 같지 않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교외별전이 교승보다 훨씬 뛰어나니 천박한 식견의 사람이 감당할 바 아니다.

禪門徑截得入者는 初無法義聞解當情하고 直以無滋味話頭로 但提撕擧覺而已라 故無語路義路心識思惟之處하며 亦無見聞解行生等時分前後라가 忽然話頭墳地一發則一心法界洞然圓明故로 與圓敎觀行者로 比於釋門一發者컨대 敎內敎外逈然不同故로 時分遲速이 亦不同을 居然可知矣니 故云敎外別傳이 逈出敎乘이라 非淺識者외 能所堪任이라 하니라.


선문의 경절문으로 들어가면 법의 이치나 들어 알고 생각하는 것이 없으며, 말 길과 뜻 길이 끊어집니다. 원돈신해문으로 들어갈 것 같으면 말 길과 뜻 길이 있어서 사구(死句)에 떨어져 돈오점수가 되고 맙니다. ‘재미가 없는 화두’란 듣고 생각하는 것이 붙을래야 붙을 수 없고 사량분별할 수 없기 때문이니 오직 그 화두만 참구할 뿐입니다. 거기에서는 견문이나 해행 등을 생각할 수 없고 시간적으로든 공간적으로든 일체 말이 다 끊어져 버립니다. 그러다가 홀연히 화두를 깨치면 교가와 전혀 틀립니다. 시간적으로 볼 때 교(敎)로 나아가면 삼아승지겁이라는 많은 시간이 걸려서 성불하지만, 선문의 경절문 활구로 들어가면 바로 깨쳐 버립니다. 교의 원돈신해문으로 나갈 것 같으면 돈오해서 점수하니까 말 길이 있고 뜻 길이 있어 듣고 이해하는 것, 즉 지해(知解)가 근본이 되어서 삼아승지겁이라는 시간이 걸려 성불은 늦어지는 것입니다. 선(禪)과 교(敎)의 내용을 모를 때는 선교일치를 부르짖었지만 알고 보니 선, 교가 틀리므로 돌아가실 때에는 간화결의론에서 바른 길을 제시한 것입니다.


선문 경절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돈교와 같지 않고 또 원교에 들어가는 것과는 교를 의지하고 떠남에 느리고 빠름이 전혀 다름을 알게 하겠다.

知有禪門徑截門得入이 不同頓敎하며 亦與圓敎得入者로 依敎離敎에 遲速이 逈異也라.


선종 경절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돈교(頓敎)와 다르고 또 일승원교와도 근본으로 틀립니다.


선종의 교외별전인 경절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격식과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므로 교(敎)를 배우는 이는 믿기도 어렵고 들어가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선종의 낮은 근기가 천박하게 아는 자도 망연하여 알지 못한다.

禪宗敎外別傳徑截得入之門은 超越格量故로 非但敎學者難信難入이오 亦乃當宗下根淺識도 罔然不知矣라. [節要]


이것은 선(禪)과 교(敎)가 다른 것을 말할 뿐만 아니라 선종의 참선하는 사람도 근기가 하열하고 머리가 밝지 못한 사람은 도로 비방하고 반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바라건대 출세간 하려는 사람은 선문의 활구를 자세히 참구하여 속히 보리를 증득하면 다행하고 다행하다.

伏望觀行出世之人은 參詳禪門活句하야 速證菩提하면 幸甚幸甚이로다. [看話決疑論]


바로 깨치는 최상승의 길인 경절문의 활구(活句)로 들어가서 깨쳐야지 원돈신해인 사구(死句)로 들어가지 말아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간화결의(看話決疑)의 마지막 결론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곤란한 것은 말세에는 사람들의 근기가 하열하므로 조사도리를 깨쳐서 공부를 성취하는 사람이 드물다고 하는 말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보조스님의 수심결에 그 당시에도 말세에는 조사도리를 깨친 사람이 없다고 했지만 본시 말세니 하는 것은 중생에게 방편으로 하는 말이지 법(法)에서는 해당이 안 됩니다. 800년 전 보조스님이 당시 기화상(琪和尙)의 말을 인용해서 그렇게 말했는데 그것은 정법을 모르는 사람이 한 말입니다. 중국과 비교해 보면 대혜스님 돌아가시기 5년 전인 1158년에 보조스님이 태어났는데 대혜스님을 전후한 100~200년 동안은 임제종 양기파의 전성시대로 많은 도인이 났습니다. 또 임제정맥으로 봐서 화선사, 중봉고불 등 보조스님 후 200년 뒤에도 확철대오한 대 도인이 무수히 났으며, 송, 원, 명 그리고 청나라 초까지 연계되어 왔습니다. 이렇게 볼 때 보조스님 당시 기화상이 말세에는 확철히 깨쳐 종사 노릇할 사람이 없다고 한 말은 빨간 거짓말입니다. 대혜스님 이후에도 송나라에는 일등 조사가 많았었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800년 전 보조스님 당시 대 조사가 없다고 하면서 지금의 말세에 경이나 보고 염불이나 하지 참선하지 말자는 사람이 많은데 그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소리입니다. 자성은 본시 고금도 없고 말세도 없어서 노력하면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하여 오직 바로 깨치면 그만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노력해야 달마경전을 깨치는가?


경산 대혜화상이 경의 게송을 인용하여 말했다. ‘보살이 이 부사의 경계에 머무르니 이 가운데에서는 생각은 끝이 없느니라.’ 이 부사의한 곳에 들어가면 생각과 생각 아님이 모두 적멸하다고 하느니라. 그러나 적멸한 곳에 머물러서도 되지 않는다. 만약 적멸한 곳에 머물러 있으면 곧 법계의 헤아림에 포섭되니, 교중에서 법진번뇌(法塵煩惱)라 하느니라. 법계의 헤아림을 없애 버리고 갖가지 수승한 것을 일시에 모두 없애 버려야만 비로소 뜰 앞의 잣나무나 마삼근, 마른 똥막대기, 개에게 불성이 없음, 한 입에 서강의 물을 모두 들이킴, 동산이 물 위로 간다는 등의 것을 볼 수 있느니라. 홀연히 한마디 끝에서 뚫어 지나야만 비로소 그것을 법계에 한없이 회향한다고 하느니라. 여실하게 보고 여실하게 행하고 여실하게 사용하여 한 터럭 끝에서 보배왕 세계를 드러낼 수 있고 미진 가운데 앉아서 대 법륜을 돌려 갖가지 법을 성취하고 갖가지 법을 파괴함은 모두 나로 말미암음이다. 마치 장사가 팔을 펼침에 남의 힘을 빌리지 않으며 사자가 나다님에 동행을 찾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 하였다. 이것으로 추측하건대 선문에서 화두를 자세히 참구하는 자는 법계의 헤아림을 없애 버리고 갖가지 수승함도 모두 없애 버리고 그 후에 뜰 앞의 잣나무 등 화두를 살펴봄이 좋으리라. 홀연히 한마디에 뚫어야만 비로소 그것을 법계에 한없이 회향한다고 말하느니라. 화두의 의심을 타파하여 한 소리를 내는 자는 장애 없는 법계를 직접 증득함이니라.

徑山大慧和尙이 引經偈云菩薩이 住是不思議하니 於中思議不可盡이라 入此不可思議處하야는 思與非思 皆寂滅이라 하니 然이나 亦不得住在寂滅處니라 若住在寂滅處하면 卽被法界量之所管攝이니 敎中에 謂之法塵煩惱라 滅却法界量하고 種種殊勝을 一時蕩盡了코사 方始好看庭前栢樹子와 麻三斤, 乾屎橛, 狗子無佛性과 一口吸盡西江水, 東山水上行之類하야 忽然一句下에 透得하야사 方始謂之法界無量廻向이라 如實而見하며 如實而行하며 如實而用하야 便能於一毛端에 現寶王刹하며 坐微塵裏하야 轉大法輪하야 成就種種法하며 破壞種種法을 一切由我홈이 如壯士展臂에 不借他力하며 師子遊行에 不求伴侶라 하니라 以此而推컨댄 禪門話頭參詳者는 滅却法界量하고 種種殊勝을 亦蕩盡了然後에 方始好看庭前栢樹子等話頭하야 忽然一句下에 透得하야사 方始謂之法界無量廻向이니 話頭疑破하야 噴地一發者는 乃親證無障碍法界矣로다. [看話決疑]


보살의 부사의한 도리는 다함이 없어서 일념불생 전후제단(一念不生 前後際斷)해서 대무심지(大無心地)에 들어가면 이것이 대적멸지입니다. 이것을 부사의라고 대혜스님이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그렇지만 적멸처에 머물러 있으면 죽어서 깨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여기선 오매가 일여하여 모든 것이 멸진되어서 대적멸지에 처해 있습니다. 여기서 언구를 의심치 않으면 깨어나지 못합니다.만약 적멸처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 실지 견성이 아니고 구경각이 아닙니다. 여기서 더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 삼아승지겁이 벌어지니 다시 화두를 참구해야 합니다. 원오스님도 대혜스님에게 대적멸처에 있어도 거기서 화두를 참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대적멸처인 오매일여에서도 크게 화두를 참구해서 살아나야만 비로소 바로 깨친 사람입니다. 선문에서 화두 참구하는 사람은 법계의 헤아림을 없애 버리고 일체를 모두 없애야 합니다. 오매일여한 대무심지라 해서 화두 참구 안 하면 외도입니다. 하물며 적멸처도 아닌 사량분별이 남아 있는 곳에서 보림한다, 목우자한다고 화두를 버리면 자기가 망하고 천하사람이 다 망합니다. 대적멸지, 오매일여에서도 화두 참구해서 확철히 깨친 사람은 증(證)한 것이지 해오(解悟)가 아닙니다. 이것이 실지 공부하는 사람의 생명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