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제8장 선종사상] 3. 돈오점수사상 비판 -(1) 돈오돈수

通達無我法者 2007. 4. 30. 12:03

 

제8장 선종사상

 3. 돈오점수사상 비판

  (1) 돈오돈수


오직 돈교문만을 전하여 세상에 나가서 삿된 종(宗)을 부수게 하니 미(迷)할 때에는 누겁을 지나고 깨친 즉 찰나간이로다.

唯傳頓敎門하야 出世破邪宗하노니 迷來엔 經累劫이오 悟則刹那間이로다. [六祖壇經]


육조 혜능(六祖慧能)대사의 말씀입니다.

선종(禪宗)이란 ‘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直指人心]’을 근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이마에 박힌 구슬 얘기를 했는데 선종이란 그 이마에 있는 구슬을 바로 가리켜 주듯이 자성(自性)을 바로 깨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선이란 곧바로 깨쳐서 성불하는 것이 근본이지 절대로 점차(漸次)를 둔다든지 단계를 둔다든지 하여 시간을 끌며 삥삥 둘러서 가는 공부가 아닙니다.


선종에서 말하는 돈(頓)과는 정반대로 교가(敎家)에서는 점(漸)을 주장합니다. 즉 중생의 근기(根機)에 따라서 마음을 닦아 가는 과정을 단계적으로 나누어 시간적인 점차(漸次)를 둡니다. 선종에서는 단박 찰나[頓]간에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루는[見性成佛] 법을 주장합니다. 반면에 교문(敎門)에서는 일 찰나간에 성불한다는 것은 모든 중생들에게 다 해당되기는 어려운 일이므로 점차로 한 계단 한 계단 층층계 올라가듯이 시간적으로 거리를 두어 점차(漸次)를 가지고 공부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 방법도 부처님께서 방편으로 설하신 방법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중생의 근기가 열악(劣惡)하기 때문에 방편(方便)으로 말씀하신 것이지 실법(實法)은 아닙니다. 이와 같이 선종에서 주장하는 것은 오직 돈(頓)으로써만 성불하는 길을 가르치지 절대로 점차적인 공부를 가르치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돈교문만을 전해 세상에 나가 삿된 견해를 부순다’고 하는 것입니다. 돈교문(頓敎門), 즉 견성법(見性法) 이외에 점차적으로 공부를 가르치고 단계적으로 공부 길을 인도하는 것은 모두 다 방편인 동시에 삿된 종(宗)이라는 것입니다.


또 삿된 종[邪宗]이라 하지만 이것도 혹 중생의 근기 따라서 필요치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지만 부처님이 중생을 위해 어쩔 수 없어 말씀하신 방편의 길을 따라가서 삼아승지겁이라는 상상할 수 없는 기나긴 세월 동안을 보내면서 헛고생할 필요가 무엇 있습니까? 그러므로 선종에서는 ‘곧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키는[直指人心]’ 돈교문(頓敎門)만을 주장하고 교가의 점차문(漸次門)은 삿된 종(宗)으로 취급해 버리는 것입니다.


선종의 근본이 단박에 깨치는 데[頓悟] 있는 만큼 점차문은 육조 혜능(六祖慧能)대사의 조계정맥(曹溪正脈)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고 그 점에 대해서 앞으로 육조스님의 법문인 육조단경(六祖壇經)을 중심으로 설명할 것입니다.


자기 성품을 스스로 깨쳐서 단박에 깨치고 단박에 닦으니 또한 점차가 없느니라.

自性自悟하야 頓悟頓修하야 亦無漸次니라.


‘깨친다[悟]’고 하는 것은 한번 깨칠 때 근본 무명을 완전히 끊고 구경각을 성취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또 ‘단박에 깨친다[頓悟]’고 하며 그렇기 때문에 ‘단박에 닦는다[頓修]’라고 합니다. 더 이상 닦을 필요가 없습니다. 전체가 다 마쳐졌다는 뜻이니 등각(等覺)까지 넘어서 묘각(妙覺), 즉 구경각을 성취해 버렸는데 그 뒤에 어떤 점차가 있을 수 있겠는가 하는 육조스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선종에서 말하는 돈오문(頓悟門)에서는 한번 깨침에 있어 구경각을 성취하여 제8 아뢰야 근본 무명까지 완전히 끊어 버려서 그 뒤에 더 닦을 것이 없는 것을 견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육조 혜능대사께서도 견성한 것을 돈오(頓悟)라고 말씀하시는만큼 견성(見性)해 가지고 점수(漸修)하여 성불(成佛)한다는 말은 절대로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선종의 근본 종취가 돈오돈수(頓悟頓修)이어서 점차를 세우는 데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만약 점차를 세운다면 그것은 선종이 아니며 육조정종(六祖正宗)이 아닙니다.


법에는 돈과 점이 없고 사람에게 영리함과 둔함이 있으니 어리석은 사람은 점차로 계합하고 깨친 사람은 단박에 닦느니라.

法無頓漸이오 人有利鈍이니 迷則漸契오 悟人은 頓修니라.


그러면 돈(頓)과 점(漸)이 왜 생겼느냐, 본래 법에 돈(頓)과 점(漸)이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에 대한 육조스님의 말씀은 본래 법(法) 자체에 있어서는 돈(頓)이니 점(漸)이니 하는 것이 없고 오직 사람에게 있어서 근기가 수승하여 예리한 사람과 어리석어 둔한 사람이 있기 때문에 돈(頓)과 점(漸)이 있다는 것입니다. 길을 가도 기운이 있는 사람은 씩씩하게 빨리빨리 가는데 기운이 없는 사람은 비실비실 꾸무적거리며 빨리 가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근기가 수승하고 예리한 사람은 돈문(頓門)으로 들어가서 지름길로 빨리 도를 성취하고, 근기가 하열하여 둔한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방편가설(方便仮說)인 점문(漸門)으로 떨어지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점문(漸門)을 방편인 줄 모르고 실법(實法)인 줄 알아서 그것을 참다운 선(禪)이라고 주장하게 되면 그것은 삿된 종[邪宗]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지로 깨친 사람은 구경각을 증득하기 때문에 더 닦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돈수(頓修)라 하고, 더 닦을 것이 있는 사람은 미(迷)한 사람으로서 깨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육조스님께서 분명히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금생에 만약 돈교문을 깨치면 깨친 즉 눈앞에 세존을 보는도다.

今生에 若悟頓敎門하면 悟則眼前에 見世尊이로다.


돈교문을 깨치면 찰나에 눈앞에 부처를 본다는 것이니 깨치면 곧 성불(成佛)한다는 말입니다. 견성(見性) 이대로가 성불(成佛)이고 돈오(頓悟) 이대로가 성불(成佛)이라는 것을 육조스님이 강조하신 것입니다. 육조스님은 돈오돈수(頓悟頓修)하여 구경각(究竟覺)을 성취한 것을 견성(見性)이라 하였지 점차(漸次)를 밟아서 닦으라고 말씀하신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돈오돈수(頓悟頓修)하는 돈교문(頓敎門)을 벗어나서 점차(漸次)를 세운다면 육조스님이 말씀하신 바대로 사종(邪宗)이라는 것입니다.


돈(頓)이란 단박에 망념을 없앰이요, 오(悟)란 무소득을 깨치는 것이니라.

頓者는 頓除妄念이요 悟者는 悟無所得이니라.


망념(妄念)이란 제8 아뢰야 근본 망념을 말하니 제8 아뢰야가 남아 있으면 그것은 유소득(有所得)입니다. 깨치기는 깨쳤지만 소득이 있는 것이니 그것은 진짜로 깨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돈오(頓悟)란 일체의 근본 무명까지 완전히 뿌리를 뽑아 버린 것이며 근본 미세망념인 제8 아뢰야까지도 완전히 끊어져서만 무소득(無所得)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돈(頓)이라 하는 것은 제8 아뢰야의 무기식(無記識)도 완전히 벗어나서 무소득(無所得)인 진여(眞如) 본성(本性)을 깨친 것, 불지(佛地)에 이른 것, 성불한 것, 묘각을 성취한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앞에서 육조스님이 말씀한 사종(邪宗)을 부순다는 것이 돈오(頓悟)를 드러내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돈오문은 무념을 종취로 삼고, 망념이 일어나지 않음을 참뜻으로 삼으며, 청정으로 본체를 삼고, 지혜로써 활용을 삼느니라.

此頓悟門은 …… 無念으로 爲宗이요 妄念不起도 爲旨며 以淸淨爲體요 以智爲用이니라.


무념(無念)이란 제8 아뢰야의 무기무념(無記無念)이 아니라 진여본성을 바로 깨친 구경각을 성취한 묘각의 무념이요 불지(佛地)의 무념을 말합니다.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망념은 제6식의 분별 망념만이 아니고 근본 미세망념까지 일어나지 않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다는 것이니 망념이 있는 이대로는 돈오(頓悟)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근본 미세망념까지 다 끊어져서 완전한 무념(無念)을 성취하게 되면 무구식(無垢識) 즉 대원경지(大圓鏡智)가 현발하는 동시에 진여자성을 깨치게 되니 이것이 ‘청정(淸淨)으로 본체를 삼는다’고 하는 뜻입니다. 이렇게 청정하게 되면 거기에서 일체지(一切智)가 성취되는데 그것을 활용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돈오(頓悟)란 제8 아뢰야 무기무념(無記無念)까지도 완전히 끊어지고 참으로 청정무구한 대원경지를 성취하여 일체지가 완전히 현발한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되면 여기에서는 점차(漸次)가 있을 수 없고 다시 후수(後修)가 없습니다. 다 공부를 해 마쳐 버린 뒤에 어떻게 닦을래야 닦을 것이 있겠습니까? 닦을 것이 있다 하는 것은 아직 병이 덜 나은 데서 하는 말입니다. 이 돈오(頓悟)란 완전히 병이 다 나아서 약을 지을 필요가 없는 경지를 말하고 그것을 견성(見性)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아직까지 자기 업식(業識)이라든가 망념(妄念)이라든가가 남아서 약을 더 쓸 필요가 있다면 육조스님이 말하는 조계정통의 선(禪)은 아닙니다. 요사이 선종(禪宗)을 보면 보조스님의 돈오점수(頓悟漸修)라는 방편이 있어 선계(禪界)를 지배하는데 그 내용이 어찌 되는지 자세히 검토를 하여 비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