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제8장 선종사상] 3. 돈오점수사상 비판 -(2) 돈오점수 - i. 수심결

通達無我法者 2007. 4. 30. 12:04

제8장 선종사상

 3. 돈오점수사상 비판

  (2) 돈오점수 - ⅰ. 수심결


앞으로 설명하겠지만 보조스님의 사상변화는 세 시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수심결(修心訣)과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으로 대표되는 초년 시대인데 이때에는 선과 돈오점수가 혼돈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은 돌아가시기 6개월 전에 펴낸 절요(節要) 시기인데 여기에서는 선과 교를 나누긴 하였지만 여전히 모순과 혼란이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돌아가신 뒤의 유고(遺稿)에서 나왔다는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과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의 시기인데 결의론에서는 선과 교를 명백히 구분하고 있습니다. 먼저 수심결(修心訣)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예로부터 모든 성인이 먼저 깨치고 뒤에 닦지 않음이 없으니 닦음을 인연하여 깨친다.

從上諸聖이 莫不先悟後修하야 因修乃證이니라. [修心訣]


예로부터 모든 성인들이 누구나 먼저 깨쳐 신해하고 뒤에 닦아 결국 구경각을 성취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깨침의 모양을 밝히면 두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첫째는 해오(解悟)니 성품과 모양을 밝게 밝히는 것이요, 둘째는 증오(證悟)니 마음이 현묘한 극치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若明悟相하면 不出二種이니 一者는 解悟니 謂明了性相이오 二者는 證悟니 謂心造玄極이니라. [節要]


해오(解悟)에서의 ‘해(解)’라 함은 지해(知解), 즉 알음알이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불법(佛法)의 성품 모양[性相]을 알긴 알았는데 그리하여 분별심으로 알았다는 것입니다. 분별심으로 아는 그것을 해오(解悟)라고 합니다. 이 해오(解悟)에 있어서는 번뇌망상과 사량분별이 그대로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증오(證悟)라 하는 것은 실지로 자성을 바로 깨쳐서 구경각을 성취해서 참으로 체득한 것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현묘한 극치를 이룬다’고 하는 것입니다.

증오(證悟)와 해오(解悟)의 구별이 전자는 구경각을 깨침을 말하고 후자는 사량분별로써 아는 것입니다. 심해(心解)니, 지해(知解)라 하기도 합니다. 해오에서는 구경각에 망상이 없다는 것을 이해했을 뿐이지 실지는 자기 마음에 체험이 되지 못한 것이고, 증오(證悟)란 완전히 마음으로 체험해 구경각을 성취한 것을 말합니다. 앞으로 법문해 나가면서 이 증오(證悟)와 해오(解悟)의 관계가 번번이 나오는데 철저히 이해해야 됩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육조선(六祖禪)에서 말하는 돈오(頓悟)는 증오(證悟), 즉 구경각(究竟覺)을 성취한 것을 말하는 것으로 해오(解悟)인 지해(知解)는 절대로 배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지해(知解)라는 것, 해오(解悟)라는 것은 삿된 종[邪宗]인 것입니다.


다만 번뇌의 마음속에 본래 깨달음의 성품이 있으니 마치 거울에 밝은 본성이 있는 것과 같음을 신해하여 결정코 의심이 없음을 해오라고 한다.

但信解煩惱心中의 本有覺性이 如鏡有明性하야 決定無疑를 名爲解悟니라. [節要]


중생이 번뇌망상 그대로 있긴 있지만 번뇌망상 그 자체가 공(空)해서 모든 부처님의 불성(佛性)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이것을 믿고 알아 여기에 조금도 의심이 없는 것을 해오(解悟)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실지로 깨쳐서 체득한 것이 아니고 분별심으로 믿고 안다[信解]는 것입니다.


규봉이 먼저 해오를 하고 뒤에 닦는다는 말의 뜻을 깊이 밝혀 말하였다. 얼음 못이 전부 물임을 아나 따뜻한 기운을 빌려 녹이고, 범부가 부처임을 해오하나 법력을 북돋우어 닦음을 돕는다. 얼음이 녹으면 물이 흘러 윤택하여 바야흐로 씻는 공을 나타내고, 망상이 다하면 신령하게 통하여 빛에 통하는 작용이 나타난다.

圭峰이 深明先悟後修之義 曰識氷池而全水하야 借陽氣以鎔消하고 悟凡夫而卽佛하야 資法力以熏修라 氷消則水流潤하야 方呈漑滌之功하고 妄盡則靈通하야 應現通光之用이니라.


이 글은 수심결에 나오는 것인데, 돈오점수(頓悟漸修), 즉 먼저 깨치고 뒤에 닦는다[先悟後修] 하는 근본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못 전체에 얼음이 꽝꽝 얼어붙어 있는데, 얼음이 본래는 물이라는 것을 확실히 아는 이것을 신해(信解)니 해오(解悟)라 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범부인 중생 이대로가 본래 부처라는 것, 범부의 본래 성품이 천진해서 부처님의 성품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아는 것이 해오(解悟)라는 것입니다. 알긴 알지만, 실지에 있어서 부처를 이룬 것은 아니고 범부 그대로 있습니다. 얼음 그대로가 물이라는 것은 확실히 알았지만 얼음은 그대로 있듯이,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것은 알았지만 중생의 번뇌망상 그대로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력(法力)에 의지해서 자주 닦아 가야 되는 것입니다. 돈오점수는 곧 선오후수(先悟後修)입니다. 여기서 돈오(頓悟)라 하는 것은 얼음이 본래 물이라는 것은 분명히 알았지만 얼음이 그대로 있고, 중생이 본래 부처인 것을 확실히 알았지만 중생 그대로임을 깨친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돈오(頓悟)를 해오(解悟)라고 합니다. 그러니만치 얼음이 그대로 있듯이 망상은 그대로 있으니까, 얼음을 녹이기 위해서는 따뜻한 기운을 빌려야 하고, 망상을 없애기 위해서는 자꾸자꾸 닦아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점수(漸修)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앞에서 말한 육조스님의 선종정맥에서 말하는 돈오하고는 정반대입니다. 선종정맥에서는 돈오(頓悟)라 하면 일체 망상이 다 끊어진 것을 말했습니다. 돈오한 동시에 돈수(頓修)여서 후수(後修)가 필요 없습니다. 선종정맥에서 말하는 돈오(頓悟)는 얼음이 본래 물임을 안 것만으로는 되지 않고, 얼음이 녹아서 물로 완전히 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물 자체도 볼 수 없는 무소득(無所得)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유소득(有所得)이니 제8 아뢰야 무심(無心)을 물에다 비유한 것입니다.


한편 돈오점수에서 주장하는 깨달음[悟]이란 얼음이 본래 물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아직 얼음이 그대로 있고,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것을 알았지만 망상이 그대로 있으니, 따뜻한 기운을 빌려 얼음을 녹이듯이 공부를 부지런히 부지런히 해서 망상을 다 끊어야 하니 거기에 점수가 필요하고 그래야 성불한다는 것입니다. 육조의 선종정맥에서 주장하는 돈오돈수는 그런 것이 아니고 깨달음[悟]이라 하면 일체 망념이 다 끊어지고 망념이 끊어진 자체, 무심의 경계 이것도 벗어남을 말합니다. 얼음이 다 녹아 물이 되어 물이라고 하는 자체도 볼 수 없는 이 구경지(究竟地)를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돈오(頓悟)라는 말만으로 겉으로 볼 때는 다 같지만, 깨달음의 내용에 있어서는 근본적으로 틀립니다. 그래서 닦아야 될 수 있는, 점수라야 될 수 있는 이것을 사종(邪宗)이라 하고 지해종(知解宗)이라고 했지 육조스님의 정전이라고는 취급하지 않습니다. 이 돈오점수를 처음 주장한 사람은 하택 신회(荷澤神會)이며, 그 주장을 따르는 이가 규봉(圭峰)으로 규봉이 돈오점수를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규봉이 먼저 깨치고 뒤에 닦는다는 뜻을 총괄하여 결정하였다. 자성이 원래 번뇌가 없고 무루지의 성품이 본래 스스로 갖추어 부처와 조금도 다름이 없음을 단박에 깨달아[頓悟] 이것에 의지하여 닦는 것을 최상승선이라 하며 또한 여래청정선이라 한다. 만약 능히 생각생각에 닦아 익히면 자연히 점점 백천삼매를 얻는다. 달마문하에 구르고 펼쳐 서로 전한 것이 이 선이다. 곧 돈오점수의 뜻은 마치 수레의 두 바퀴와 같아서 하나가 없어도 옳지 않다.

圭峰이 摠判先悟後修之義 云頓悟此性이 元無煩惱하며 無漏智性이 本自具足하야 與佛無殊하나니 依此而修者는 是名最上乘禪이며 亦名如來淸淨禪也라 若能念念修習하면 自然漸得百千三昧하나니 達磨門下에 轉展相傳者는 是此禪也라 하니 則頓悟漸修之義는 如車二輪하야 闕一不可니라. [修心訣]


방금 앞에서도 말했지만 돈오점수를 교가(敎家)에서만 말한 것이라 하면 별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보조스님은 ‘달마문하에 굴리고 펼쳐 서로 전한 것’이 돈오점수의 선(禪)이라고 선언하여 버렸으니, 이것이 큰 문제이며 육조스님이 말씀하신 선과는 정면 충돌이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육조스님은 돈오돈수를 말하고 점차(漸次)가 없는 것을 말했는데, 여기서는 돈오를 해서 점수를 한다 하였으니 육조정전(六祖正傳)의 선(禪)과는 근본적으로 반대입니다. 또 돈오점수를 달마의 선종이라고 말함으로써 일대 혼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한 생각에 빛을 돌이켜 자기의 본성을 보니 이 자성자리에 원래 번뇌가 없으며 무루지의 성품이 본래 스스로 구족하여 모든 부처와 더불어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돈오(頓悟)라고 한다. 비록 본성이 부처와 다르지 않음을 깨쳤다 할지라도 시작 없는 습기를 갑자기 단박 없애 버리기가 어려운 까닭으로 깨침을 의지해 닦아서 점점 훈습하며 노력하여 오래 성태(聖胎)를 길러 마침내 성인을 이루는 까닭에 점수(漸修)라고 말한다.

一念廻光하야 見本自性하야 而此性地에 元無煩惱하며 無漏智性이 本自具足하야 卽與諸佛로 分毫不殊일새 故로 云頓悟也요 雖悟本性이 與佛無殊나 無始習氣를 難卒頓除故로 依悟而修하야 漸熏功成하야 長養聖胎하야 久久成聖일새 故云漸修也니라.


여기에서도 문제가 되는 것이 얼음이 본래 물인 것을 알았지만 얼음은 그대로 있고, 중생이 본래 부처인 것은 알았지만 망상이 그대로 있는 것을 돈오니 견성(見性)이니 하고 있는 점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입이 아프도록 말했듯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이나 마명보살이 기신론에서 말씀하신 것이나, 그 뒤에 원효나 현수 같은 대법사들이 말씀하신 것이나 선종의 육조 혜능대사가 말씀하신 것은 모두 ‘십지보살도 견성하지 못하였다’, ‘구경각을 성취해야만 견성이다’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가 오매(寤寐)가 일여(一如)하여 대무심지에 있다 하여도 이것은 견성이 아니라고 했는데 보조스님의 수심결(修心訣)에서는 번뇌망상이 그대로 있는 것을 견성이라 해버렸으니 여기에도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돈오점수를 말할 때에 달마선이 돈오점수라 한 것도 선종정맥 사상과 정반대가 되어 있고, 이것을 또 견성이라 한 것도 정반대가 되어 있습니다.


이 돈오와 점수 두 가지 문은 일천 성인의 가는 길이다.

此頓漸兩門은 千聖軌轍也니라.


일천 성인 일만 성인이 다 이 돈오, 점수 두 가지 문에 의지해서 공부를 성취했다는 말입니다.


자성이 본래 공적하여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돈오하였으나 이 옛날 습기를 갑자기 없애기 어려운 까닭에 역순 경계를 만나면 성내고 기뻐하거나 옳고 그름이 불꽃처럼 일어났다 없어졌다 하여 객진 번뇌가 전과 다름이 없다. 만약 반야로 노력하고 힘쓰지 않으면 어찌 무명을 다스려서 크게 쉰 곳에 이를 수 있겠는가?

頓悟自性이 本來空寂하야 與佛無殊나 而此舊習을 卒難頓斷故로 逢順逆境하면 瞋喜是非가 熾然起滅하며 客塵煩惱가 與前無殊하나니 若不以般若中로 功中着力하면 焉能對治無明하야 得到大休歇之地리오.


돈오점수 사상에서 말하는 돈오(頓悟)의 내용입니다. 즉 객진 번뇌가 전과 다름없다 하였으니 중생 그대로입니다.중생이 부처인 것은 알았지만 일체 망상이 다 끊어져서 실지로 본성을 바로 깨치기 전에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뒤에 닦아서[後修] 무명을 다스려서 구경에 이른다는 것이 점수(漸修)입니다. 돈오한 뒤에는 어떻게 점수(漸修)해야 되는가?


깨친 뒤에는 오랫동안 모름지기 비추어 살펴서 망념이 홀연히 일어나거든 결코 따라가지 말고 덜고 또 덜어서 무위에 이르러야 비로소 구경이니 천하 선지식의 깨친 뒤 목우행(牧牛行)이 이것이다.

悟後에 長須照察하야 妄念이 忽起어든 都不隨之하고 損之又損하야 以至無爲하야사 方始究竟이니 天下善知識의 悟後牧牛行이 是也니라.


중생이 본래 부처인 줄 알았지만 망상은 그대로 있으니까 지해심으로써 자꾸 덜고 덜어서 망상이 다 끊어져야만 무위(無爲)에 들어가서 구경이 되며, 천하 선지식들도 망상이 있는 거기에서 자꾸자꾸 목우행을 하여 비로소 구경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목우행(牧牛行)을 보림(保任)이라고도 하는데 점수설(漸修說)에서 말하는 것은 예전 큰스님들의 목우행과는 천지차이입니다. 자명(慈明)스님이 지은 목동가(牧童歌)가 있는데 거기 보면 참으로 구경을 성취해서 호호탕탕히 자재하고 무애한 행을 목우행이라 하였지 망상이 전과 다름없는 것을 목우행이라 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먼저 돈오하였으나 번뇌가 두텁고 익힌 업이 여물고 무거워 경계를 대함에 생각생각에 정을 낳고 인연을 만남에 마음마음에 상대하여 혼침, 산란에 시달려 항상한 적지(寂知)를 잃어버리는 자는 상(相)을 따르는 문인 정혜를 빌어서 다스림을 잊지 않고 혼침과 산란을 균등히 조복하여 무위에 들어가는 것이 마땅하다.

雖先頓悟나 煩惱濃厚하고 習業이 堅重하야 對境而念念生情하고 遇緣而心心作對하야 被他昏亂의 使殺하야 昧却寂知常然者는 卽借隨相門定慧하야 不忘對治하고 均調昏亂하야 以入無爲卽其宜矣라.


비록 깨치긴 깨쳤으나 번뇌가 많고 익힌 업이 무거워서 경계를 대하거나 인연을 만나거나 하면 혼침과 산란이 그대로 있습니다. 망상이 그대로 있느니만치 망상이 일어났을 때는 산란이 되고 또 망상이 없을 때에는 혼침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상생활이 혼침 아니면 산란이고 산란 아니면 혼침이니 그렇기 때문에 ‘객진의 번뇌가 전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혼침, 산란을 정혜(定慧)를 빌어서 다스리고 균등히 조절하여 구경을 성취한다고 합니다.


먼저 반드시 돈오하여 바야흐로 점수한다 함은 이는 해오이다. 장애를 없앰으로 말하면 해가 단박 떠오름에 서리와 이슬이 점점 사라지고, 덕을 이룸으로 말하면 어린아이를 낳음에 기운이 점점 서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화엄경에 말씀하되, 처음 발심할 때 정각을 이루고 연후에 삼현, 십성을 차례로 닦아 깨친다고 하였다.

先須頓悟하야 方可漸修者는 此約解悟也니 約斷障說하면 如日頓出에 霜露漸消오 約成德說하면 如孩子頓生에 志氣漸立이니라 故로 華嚴에 說호대 初發心時卽成正覺然後에 三賢十聖을 次第修證이라 하니라. [節要]


‘처음 발심할 때 정각을 이룬다’ 함은 우리의 본성이 본래 부처인 것을 알았다는 것이지 깨쳤다는 뜻은 아닙니다. 삼현(三賢)의 끝이 40위(位)이며 십지(十地)의 끝이 50위인데 자꾸 계단을 밟아 올라가듯이 삼현, 십성을 차례로 닦아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돈오돈수라 함은 이는 상상지(上上智)를 말함이니 근기의 성품과 욕락이 모두 뛰어나 하나를 들으면 천 가지를 깨닫고 대총지를 증득한다. 한 생각도 나지 않고 앞뒤가 끊어진다. 이 사람의 세 가지 업은 오직 스스로 분명히 밝아서 다른 사람이 미칠 바 아니다. 장애를 끊음은 마치 한 타래 실을 끊음에 만 가닥이 단박 끊어짐과 같고, 덕을 닦음에는 마치 한 타래 실을 물들임에 만 가닥이 물드는 것과 같다. 하택이 말하였다. ‘한 생각에 본래 성품과 상응하여 팔만 바라밀행을 일시에 함께 쓴다.’ 또한 사적상에서 말하면 우두 융대사와 같은 부류의 사람을 말한다.

頓悟頓修者는 此說上上智니 根性樂欲이 俱勝하야 一聞千悟하고 得大摠持하야 一念不生하야 前後際斷이니 此人三業은 唯獨自明了하야 餘人所不及이니라 斷障은 如斬一綟絲에 萬條頓斷이오 修德은 如染一綟絲에 萬條頓色이니라 荷澤이 云一念에 與本性相應하야 八萬波羅蜜行을 一時齊用也라 하니 且就事迹而言之컨댄 如牛頭融大師之類也니라.


돈오점수와 돈오돈수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전자는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것은 알았지만 번뇌망상이 그대로 있으니까 차제로 삼현, 십성을 닦아서 올라가는 것을 말하고, 후자는 한칼에 한 뭉치 실을 다 베어 버리듯이, 또한 뭉치실을 다 물들여 버리듯이 하나 끊을 때 전체가 다 끊어지고 하나 물들일 때 전체가 다 물들여지는 것을 말합니다. ‘한 생각도 나지 않고 앞뒤가 끊어진다[一念不生 前後際斷]’고 하였는데 만약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이것도 육조스님이 말하는 돈오돈수는 아닙니다. 여기에 머물러만 있어서는 제8 아뢰야식에 주저앉게 되어 실지 돈오돈수가 아닙니다.


만약 신해가 있으면 옛날 성인과 손을 잡고 같이 간다.

若有信解處하면 與古聖으로 把手共行이니라.


만약 믿음이 이룩되면 의정이 단박에 쉬어 올바른 견해가 나서 스스로 긍정하는 곳에 이르니 이것이 해오이다. 믿음의 원인 속에서 모든 부처님 과덕에 계합하여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아야 바야흐로 믿음을 이룬다.

若信得及하면 疑情頓息하야 發眞正見解하야 自到自肯之地 則是解悟處也니 亦云於信因中에 契諸佛果德을 分毫不殊하야사 方成信也라 하니라. [節要]


믿음을 이룸이란 얼음이 본래 물이고 중생이 본래 부처인 것을 확실히 믿음을 말합니다. 그렇게 믿어서 망분별의 의심이 없는 데 이르는 것을 해오(解悟)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중생이 부처님 자성과 똑같은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이것을 확신해서 의심하지 않는 데에서 실질적인 믿음, 신해(信解)가 성립된다는 것입니다. 해오(解悟)와 신해(信解)를 설명하기 위해서 인용하였습니다.


먼저 모름지기 자신의 성품이 청정하고 묘한 마음임을 신해(信解)하여 성품을 의지해 선(禪)을 닦는다. 이것이 예로부터 스스로 부처의 마음을 닦고 스스로 부처님 도를 이루는 긴요한 기술이다.

先須信解自身의 性淨妙心하야사 方能依性修禪이니 是乃從上己來로 自修佛心하야 自成佛道之要術也니라. [結社文]


보조스님이 결사문에서 돈오점수를 주장한 말씀입니다. 신해(信解)라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만 내용은 해오(解悟)와 똑같습니다.


먼저 모름지기 심성이 본래 청정하고 번뇌가 본래 공함을 신해하고 신해에 의지하여 차차로 닦음이 무방하다. 신해, 즉 해오에 의지해서 차차로 닦는다는 것, 즉 점수를 한다는 뜻입니다.

先須信解心性이 本淨하고 煩惱本空하야 而不妨依解熏修者也니라.


지금 논하듯이 심성이 본래 청정하고 번뇌가 본래 공하다는 이치는 최상승선에 해당된다.

今之所論心性이 本淨하고 煩惱本空之義는 是當最上乘禪이니라. [結社文]


규봉의 도서(都序)에 있는 말을 보조스님이 인용하였는데 앞에서 ‘달마문하에서 굴리어 펴서 서로 전한 것은 이 선이다’고 말한 것과 같은 내용입니다. 결사문(結社文)에서도 신해(信解)가 곧 달마 최상승선이라고 해버렸습니다.


만약 큰 마음의 중생이 이 최상승 법문에 의지하여 자기의 마음이 부처의 마음이요 자기의 성품이 법의 성품임을 결정코 신해하여 이 신해에 의지해서 닦는 이는 상근기이다.

若是大心衆生이 依此最上乘法門하야 決定信解自心이 是佛心이요 自性이 是法性하야 依解而修者는 爲上根也니라. [修心訣]


신해(信解)에 의지하여 점수를 하는 것을 상근기라 하고 결국 최상승법문이라 하고, 달마가 바로 전한 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돈오했다는 것, 신해하고 해오했다는 그 깨친 정도가 어떠냐 하는 것입니다.


처음은 아직 말을 하지 못하나(처음 깨친 사람은 설법이나 다른 사람의 질문에 답하는 것이 모두 적확하지 않다) 점점 말을 하게 됨에 이르고(법을 해설한다), 점점 행동하여(십지의 십바라밀이다) 바로 평소같이 (성불)된다.

初未能言이나(初悟之人은 說法答他問難이 悉未的也니라) 乃至漸語하여(解說法也라) 漸漸行季하야(十地十婆羅蜜也라) 直至平復(成佛)하나니라. [節要]


보조스님이 말하는 돈오한 사람, 해오한 사람의 경지가 어찌 되느냐 하면 중생이 본래 부처인 것은 알았지만, 망상이 그대로 있기 때문에 법문도 옳게 못하고 문답도 못 하지만 점점 닦아 가서 부처를 이룬다고 하였습니다. 선종정맥에서는 깨쳐서 법담을 잘한다 하여도 그것을 잘 인정하지 아니하고 원오스님 같은 이는 수좌를 저 폭포수에 집어넣고 아주 어려운 질문을 물어서 척척 대답하니까 그때서야 옳게 알았다고 인정해 주는 것과는 전연 다릅니다. 그런데 규봉이나 보조스님은 아직까지 법문도 못 하고 문답도 못 하는 것을 돈오하고, 해오라고 하여 깨쳤다고 하니 이것을 어찌 선종이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면 이렇게 해오(解悟)한 사람의 자리[位]는 어떻게 되느냐?


해오 후에 십신 처음 자리에 드느니라.

悟後에 入十信初位니라. [節要]


십신(十信)이라는 것은 삼현(三賢)의 앞입니다. 삼현의 앞인 십신위(十信位)를 오해(悟解)라 하고, 해오(解悟)라 하고, 신해(信解)라 하고, 돈오(頓悟)라 하고, 견성(見性)이라 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이나 고불고조(古佛古祖)는 모두 다 십지, 등각도 견성을 하지 못했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십신위(十信位)를 견성위(見性位)라 했으니 문제가 달라져도 너무 많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변명하기를 원교십신(圓敎十信)이라고 말합니다. 원교십신이란 원융무애하여 십신(十信)이 십지(十地)고 십지(十地)가 십신(十信)이라고 할 수 있다고 변명하지만 그 실지의 경계는 객진 번뇌가 전과 다름없어 번뇌망상은 그대로 있느니만치 십신(十信)은 어디까지나 십신(十信)이지 이것이 십지(十地)는 절대로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자성이 청정하고 자성이 해탈임을 돈오하여 점점 닦아서 때를 여읜 청정과 때를 여읜 해탈을 얻게 된다.

必須頓悟自性淸淨自性解脫하야 漸修令得離垢淸淨離垢解脫이니라. [圭峰]


‘때를 여읜 청정’, ‘때를 여읜 해탈’이란 말은 섭대승론에 나온 말입니다. 규봉이 돈오점수를 설명할 적에 중생이 본래 부처인 것을 안 것이 자성 청정과 자성 해탈을 깨친 것이라 하고, 그리고 점점 닦아서 망상을 제거하여 실지 때를 다 없애 버리면 때를 여읜 청정[離垢淸淨], 때를 여읜 해탈[離垢解脫]을 얻게 된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돈오점수에서 주장하는 것은 자성이 청정함과 자성이 해탈임을 먼저 깨달아서 다음에 점수해서 때를 여읜 청정과 때를 여읜 해탈을 성취하는 것이 근본인 것입니다.그런데 선종정맥에서는 자성청정(自性淸淨)이나 이구청정(離垢淸淨)이나 할 것 없이 실지로 구경각을 성취해야 이것을 견성(見性)이라 하고 돈오(頓悟)라 하였지 그 이외는 돈오라고 취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육조스님이 말씀한 바에 따르면 이런 것이 전부 사종(邪宗)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육조스님이 ‘세상에 나와 사종(邪宗)을 부순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홍주는 돈오문엔 비록 가까우나 적중하지 못하고, 점수문엔 전연 어긋난다.

洪州는 於頓悟門엔 雖近而未的이오 於漸修門엔 而全乖니라. [圭峰―節要]


‘홍주(洪州)’는 홍주에 계신 마조(馬祖)스님을 말합니다. 마조는 돈오문에 가깝긴 가까운데 확실히 바로 깨치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마조스님이 말씀하는 돈오는 설사 십지, 등각이라 해도 침공체적(沈空滯寂)해서 견성한 것이 아니고 구경각을 성취해야만 견성이니, 제8 아뢰야 무심경계까지도 완전히 벗어난 참다운 무념의 상태를 성취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규봉스님은 번뇌망상이 있는 그대로를 견성이라 하였으니, 규봉이 볼 때는 마조스님이 말하는 견성이 돈오문에 가깝긴 가까운데 틀렸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조(馬祖)는 점수문에 있어서는 도무지 맞는 것이 없어 잘못되어서 전부 어긋난다고 규봉도 주장합니다. 마조에게는 점수문은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조스님은 구경각을 성취한 데서 견성이라 하고 돈오라 하여 절대로 후수(後修)가 없습니다. 규봉 자기가 보는 것은 마조스님에게 점수문이 없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마조스님은 병이 다 나아서 약을 더 쓸 필요가 없는 입장이고 규봉스님은 아직 병이 그대로 있어 약을 더 써야 할 입장입니다. 규봉스님 말대로 하자면 병 다 나은 사람도 생다리를 부러뜨리고, 생배를 째서 억지로 병원으로 가서 약을 써야 하는 격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느 편을 가야 하겠습니까? 결국은 병신을 따라가야 될 건가 아니면 성한 사람을 따라가야 될 건가, 그것은 스스로 생각해 보면 자연히 알 걸로 생각됩니다. 도를 닦는 근본은 병이 다 나아서 약을 쓸 필요 없이 참으로 자유자재한 근본 해탈이 목적이지, 실제로 병 그대로 가지고 약을 먹고 붕대를 첩첩이 감고 다니면서 내가 돈오했다, 견성했다는 길을 어찌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규봉스님의 입장과 마조스님의 입장이 이렇게 틀려 있습니다. 선종에 있어서 누구든지 간에 마조가 정맥이냐 규봉이 정맥이냐 하면, 천하의 선종에서 규봉을 지해종(知解宗)이라 배격을 했지 마조를 틀렸다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조가 틀렸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오직 규봉 혼자만이고 그 규봉을 지지한 사람이 보조스님입니다.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망정의 습기가 다하지 않았으면 곧 깨친 마음이 원만하지 않기에 그러하다. 혹 마음을 깨침이 원만하지 못하면 모름지기 아직 원만하지 못한 자취를 쓸어 버려야 하니 다시 생애를 세워서 크게 깨침을 기약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혹 깨친 마음이 다하지 못함을 실천으로써 다하고자 하면 마치 섶을 지고 불을 끄려는 것과 같아서 더욱 불타오를 뿐이다.

若有纖毫라도 情習이 未盡하면 卽是悟心不圓而然也라 或心悟不圓하면 須是掃其未圓之跡이니 別立生涯하야 以期大徹이 可也오 其或謂悟心未盡을 以履踐으로 盡之라 하면 如抱薪救焚하야 益其熾矣니라. [中峰 山房夜話]


마음을 깨침이 원만치 못하다 함은 객진 번뇌가 전과 다름이 없는 경계는 말할 것도 없고 아주 미세한 제8 아뢰야 근본 무명이 남아 있는 경계를 말한다. 실지로 바로 깨치지 못한 것임을 확실히 알 때는 다시 발심하여 크게 철저하게 깨쳐야 하는데, 깨치지 못한 상태에서 이천(履踐) 즉 보림(保任)한다, 점수(漸修)한다 하여 공부를 성취하려는 사람은 섶을 지고 불을 끄려고 하는 것과 같아서 불은 끄지 못하고 불꽃만 더욱 사납게 타오르도록 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