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능엄경(楞嚴經)

능엄경 강의 9 / 송찬우 교수

通達無我法者 2007. 11. 28. 10:39
 
 
 
능엄경 강의 9
 
   
 
《三破見精以示始覺分三 ◎ 初徵破妄計 
阿難. 吾復問汝. 諸世間人說我能見. 云何名見. 云何不見. 阿難言. 世人因於日月燈光見種種相名之爲見. 若復無此三種光明則不能見. 阿難. 若無明時名不見者應不見暗. 若必見暗此但無明云何無見. 阿難. 若在暗時不見明故名爲不見. 今在明時不見暗相還名不見. 如是二相俱名不見. 若復二相自相陵奪. 非汝見性於中暫無. 如是則知二俱名見. 云何不見

《3. 팔식견정을 타파함으로써 시각(始覺)을 세 분야로 나타내다. 
◎ 1. 아난의 허망한 헤아림을 따져 묻고 논파하시다.
32. 아난아. 나는 다시 너에게 묻겠다.
  “모든 세간 사람들이 각각 그들 스스로 말들 하기를 나는 볼 수 있다고 하는데 무엇 때문에 볼 수 있으며, 다시 무엇 때문에 보질 못한다고 말하느냐.”
  아난은 말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해?달?등불의 광명으로 인해 갖가지 물상을 볼 수 있으며, 이 세 종류의 광명이 없으면 보지 못한다고들 합니다.”
  “아난아. 가령 이들 세 종류의 광명이 없을 때를 보지 못함이라고 말한다면 어두움마저도 보질 못해야만 한다.
  그런데도 반드시 어두움을 본다면 이는 단지 광명이 없을 뿐, 어떻게 보는 마음이 없다 하겠느냐.
  아난아. 가령 어두움에 있을 땐 광명을 보지 못함 때문에 보지 못함이라고 한다면 지금 광명에 있을 땐 어두움의 모습을 보지 못하므로 이도 역시 보지 못함이라고 해야겠구나.
  그렇다면 광명을 볼 땐 어두움의 모습이 없고 어두움을 볼 땐 광명의 모습이 없으므로 이 두 모습을 동시에 보지 못함이라고 해야 하는데 이같은 이치가 있더냐.
  가령 다시 광명이 찾아오면 어두움이 사라지고, 어두움이 당도하면 광명이 소멸하여, 이는 광명과 어두움이라는 두 모습이 서로가 서로를 멀리 낼지언정 너의 보는 성품이 그 둘 사이에서 잠시 있다간 잠시 없어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어둠과 광명, 이 둘을 동시에 본다 말해야만 한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광명이 없을 땐 보지 못한다고 하느냐.”

◎ 二的示始覺分二
 
▣ 先揀緣 
是故阿難. 汝今當知見明之時見非是明. 見暗之時見非是暗. 見空之時見非是空. 見塞之時見非是塞

◎ 2. 시각(始覺)을 분명히 보이기를 두 분야로 하다. ▣ 1. 보는 성품. 즉 팔식견정은 인연성이 아님을 우선 간별하다. 
33. 그러므로 아난아. 너는 지금 알아야만 한다. 광명을 볼 땐 보는 성품이 광명의 인연으로 있지 않으며, 어두움을 볼 땐 보는 성품이 어두움의 인연으로 없질 않으며. 허공을 볼 땐 보는 성품이 허공의 인연으로 있질 않으며, 막힌 공간을 볼 땐 보는 성품이 막힌 인연으로 있지 않다는 점을, 그렇다면 이들 네 차별상을 본다해도 그들 네 모습에 소속하지 않는다.”

▣ 次的示
四義成就. 汝復應知見見之時見非是見. 見猶離見. 見不能及. 云何復說因緣自然成和合相

▣ 2. 견정을 분명히 보이시다. 
34. “바로 이 광명?어두움. 막힌 공간으로서의 색법?허공이라는 이 네 가지 의미로 추리해 본데로 견정은 그들 인연을 빌리지 않고 오진경계를 떠나서 자체로 있는 이치가 성취된다.
  너는 다시 진실하게 보는 마음이 팔실견정을 볼 때 그 진실하게 보는 마음은 팔식견정까지도 초월하였음을 알아야만 한다.
  견정이 아직 일어나기 이전. 즉 증자증분(證自證分)이 열반의 실체적 본성자리이다.
  증자증분으로서의 진실하게 보는 마음은 오히려 팔식 견정. 즉 자증분까지도 떠나 있어, 그 견정도 도달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 곳을 인연성이다. 또는 자연성이다. 또는 네 종류의 인연이 화합해서 안식견분이 일어난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 三結責勸修
汝等聲聞. 狹劣無識. 不能通達淸淨實相. 吾今誨汝. 當善思惟. 無得疲怠妙菩提路

◎ 3. 견론 짓고 수행을 권유하시다. 
35. “너희들 성문승들은 도량이 좁고 무식하여 청정한 실상의 이치를 통달하지 못한다.
  나는 지금 너희들에게 가르치노니 잘 생각해서 오묘한 깨달음의 길에서 피로와 권태심을 일으키지 말라.”

[要義] 여기에서는 제팔식 견정까지 타파하여 본각(本覺)을 시각(始覺)하여 시각본각이 합일[始本合一]하였음을 나타냈다.
  지금까지 보는 마음을 논변한 이래로 제8식견정을 빌려 육식분별대상인 육진과 내지는 제7식분별대상인 법진, 즉 상분경계를 논파하고 다음으로는 그들 대상에 대한 주관 분별인 견분을 논파하여, 이로써 견상이분(見相二分)이 동시에 일어나는 자체인 제8식자증분체. 즉 견정을 나타냈다.
  견분과 상분은 제8식자증분. 즉 견정을 동일하게 의지하여 동시에 일어난다. 때문에 상분과 견분이 혼잡하여 구분하기 어렵다.
  그 때문에 아난은 혹 견분을 사물로 인식하기도 하고, 혹은 그 사물에 견분이 있다고 집착하여 갖가지 외도의 허망한 견해까지 일으키게 되었다.
  이러한 아난에게 세존께선 그가 집착한 사물에 나아가서 그 견분은 사물에 있고 있지 않는 문제를 따졌다.
  이 때문에 아난은 이윽고 견정까지를 타파하고 나서 유일진심. 즉 증자증분이 나타나 그곳엔 다시는 다른 불건이란 없이 시비의 밖으로 아득히 초월하였다. 아난의 인연성이다. 또는 자연성이다 하는 이 모든 의심이 여기에서 결단날 것이다.
  처음에 견분을 끊어 견정으로 귀결시켰는데, 그 견정까지도 망상에 소속하는 무명업식이다. 이를 식온이라고 하는데, 이는 마치 제2월과도 같다.
  가령 이 식온 자증체까지 타파하지 않는다면 본각진심(本覺眞心)이 일치하기란 어렵다. 그러므로 이 한 구절의 경문은 제8식견정까지 타파하여 시각지(始覺智)로 타파함에 있어서 세존께서 광명과 어두움 등을 따라서 보는 성품이 있느냐. 또는 없느냐 하고 따져 물은 이유는 앞에서는 목전경계를 마주하면서 논변하였으나, 여기에서는 분별대상을 떠난 상태에서 논변하였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서 이 견정은 대상경계의 인연을 의지해서 있지 않음으로 인연화합성으로 일어나지 않음을 나타내려 하였다.
  이처럼 제팔식견정은 진실한 마음에 절실하게 근접하여 있다. 때문에 이 식온마저 타파되고 나면 오온이 모두 다 공적해지는데, 이러한 지혜를 최초로 얻는 상태를 시각지라고 한다.
  아난이 최초에 오묘한 사마타수행법문을 청한 이래로 여기에 이르기까지 오온신심을 통론적으로 논파하여 인공(人空)의 이치를 나타냈다. 이는 오온신심의 아집이 공적했을 뿐, 법집은 아직까지 그대로 남아 있으므로 다음부턴 이종세계(二種世界)를 논파함으로써 법집마저도 타파하고 계시다.
  이상으로 오온팔식을 타파함으로써 인공(人空)의 이치를 드러내는 일은 끝을 냈다.

△ 二例破二種世界本空以明法空分二 ◈ 初當機呈請 
阿難白佛言. 世尊. 如佛世尊爲我等輩宣說因緣及與自然諸和合相與不和合心猶未開. 而今更聞見見非見重增迷悶. 伏願弘慈施大慧目. 開示我等覺心明淨. 作是語已悲淚頂禮. 承受聖旨

△ 2. 이종세계(二種世界)가 본래 공적함을 인공(人空)의 예로써 타파하여 법공(法空)의 이치를 두 분야로 밝히다.

◈ 1. 아난이 의심을 드러내고 법문을 청하다. 
36. 아난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저희들을 위하여 말씀해 주신 우리의 진실한 마음 자체는 변치 않으므로 인연성도 아니고, 동시에 생멸의 인연을 따르므로 자연성도 아니다 하신 의미는 이미 들었습니다.
  그러나 원래 정명(精明)한 일심이 육근?육진?육식과 화합한 모습이다.
  또는 화합하지 않은 모습이다. 한데 이르러선 마음이 아직 열리지 않았습니다만 이 문제는 좀더 기다렸다 밝혀보기로 하겠습니다.
  앞에서는 말씀하시기를 견정과 보이는 해와 달 등 네 차별상이 그 근원은 진실한 한 마음의 이치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견정까지도 오묘하게 지각하는 본성의 모습임이 분명한데도 무엇 때문에 네 가지 차별상을 볼 때 네 차별상에 소속하지 않는 견정마저 진실한 마음이 아니라고 하십니까.
  이 말씀을 듣는 데 이르러선 다시 거듭 미혹하고 답답할 뿐입니다.
  업드려 바라옵건대 커다란 자비심으로 큰 지혜를 베푸사 밝고 청정하게 지각하는 근본 마음의 이치를 깨우쳐 주옵소서."
  이 말을 끝내고 슬피 눈물을 흘리면서 정례하옵고 성스러운 깊은 가르침을 받들려 하였다.

[要義] 지금 법집을 타파하는 시초에 아난이 앞에서 인연과 자연의 이치는 이미 들었으나 화합하고 화합하지 않는 문제는 아직 분명하질 않았다. 때문에 아직은 마음이 활짝 열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앞에서 오온은 본래 공적한 진공일심의 모습으로서 오온이므로 그것은 인연도 자연도 아님을 말하여 그것은 단지 허구적인 명칭만 타파했을 뿐. 실제하는 법은 그대로 간직되어 그것은 본래 공적한 이치. 즉 진공일심의 실체는 변치 않으므로 오온신심과 호합상도 아니고, 다시 그것은 인연을 따르므로 화합상 아님도 아닌 이치를 아직 통달하지 못했다. 때문에 마음이 열리지 않았었다.
  지금은 오온신심을 보는 팔식견정까지도 진실한 마음의 이치는 아니다 라는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거듭 미혹이 더한 것이다.
  그 이유로 소승인은 아집은 비록 공적하였으나 법집까지는 아직 잊지 못했기 때문에 신심과 세계에 대한 허망한 견해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각진심이 아직은 청정하질 못하여 거듭 법문을 청하게 된 것이다.

◈ 二世尊許說分二   《初許說誡聽
爾時世尊憐愍阿難及諸大衆. 將欲敷演大陀羅尼諸三摩提妙修行路. 告阿難言. 汝雖强記但益多聞. 於奢摩他微密觀照心猶未了. 汝今諦聽. 吾當爲汝分別開示. 亦令將來諸有漏者獲菩提果

◈ 2. 세존이 설법해 주리라고 허락하기를 부 분야로 하였다.

《1. 설법을 자세히 들으라고 훈계하시다. 
37. 그때 세존께선 아난과 모든 대중들을 연민하게 여기시여 다라니와 모든 수능엄삼마제와 오묘한 여래장성을, 즉 삼마제를 수행하는 중요한 길을 연설해 주시려고 아난에게 고하셨다.
  “너는 그 많은 학문을 애써 기억하고 있으나 그것은 단지 다문(多聞), 즉 명언습기(名言習氣)를 더욱 증가할 뿐, 사마타로 은밀하게 관조하는 마음에 있어선 아직 명료하질 못하다.
  너는 지금 자세히 이치에 일치하도록 하라. 정말로 이같이 할 수 있다면 너를 위해서 이 점을 분별하고 열어 보여주리라. 뿐만 아니라 미래의 모든 유루의 초학들까지도 이 사마타의 은밀한 관조를 의지하고 수행함으로써 보리열반과를 얻게 하리라.”

《二正示二妄分二
 
◎ 初總示
阿難. 一切衆生輪廻世間. 由二顚倒分別見妄當處發生當業輪轉. 云何二見. 一者衆生別業妄見. 二者衆生同分妄見

《2. 허망한 견해를 정면으로 보이시길 두 분야로 하시다.

◎ 1. 허망한 견해를 총체적으로 보이시다. 
38. “아난아. 범부와 외도는 성범동거토(聖凡同居土)에서 분단생사(分段生死)와 윤회를 받고, 소승과 대승초기보살은 방편유여토(方便有餘土)와 실보장엄토(實報莊嚴土)에서 변역생사(變易生死)의 윤회를 받는다. 이것이 일체중생이 세간에서 윤회 전생하는 모습이다.
  이는 모두가 최초 일념무명이 망상으로 요동하여 본체 오묘하고 밝았던 성품을 전환하여 이윽고 무명업식[제8아뢰야식]이 이루어졌고, 이 업식을 의지해서 본래없던 허망한 견상이분(見相二分)을 이루었다.
  이같은 두 종류 전도된 미혹인 분별 견해가 일어나는데, 즉 범부와 외도는 현재있는 그 자리에서 견사혹(見思惑)을 일으켜 유루선악업(有漏善惡業)과 고락에 요동하지 않는 유루선정(有漏禪定) 속의 부동업(不動業)을 조작하며, 소스인은 진사혹(塵沙惑)을 일으켜 무루편진업(無漏偏眞業)을 지으며, 대승보살은 무명혹(無明惑)을 일으켜 선정에 들면 무루업(無漏業)을 짓다가 선정에서 벗어나면 역시 유루업(有漏業)이 일어나는 이변업(二變業)을 짓는다. 이같은 미혹에 따른 업이라는 원인이 있기 때문에 그 지은 업에 따른 당연한 결과로서 생사윤회가 상속하게 된다. 이것이 혹업고(惑業苦)가 인과로 상속하는 총체적인 모습이다.
  무엇을 두 종류의 전도된 허망한 견해. 즉 미혹이라고 하는가. 첫째는 모든 중생들 개개인이 근신과 기계에서 홀로 일으키고 개인적으로 업을 짓는 별업망견(別業妄見)이며.
  두 번째는 많은 사람이 개개인의 많은 분별심을 가지고 근신과 기계에서 공동으로 미혹을 일으켜 공동의 업을 짓는 동분망견(同分妄見)이다.
  별업망견과 동분망견이 비록 다르나 그것이 허망이라는 점에 있어선 한결같다. 왜냐하면 견분으로서의 망견과 망견을 일으키게 하는 상분으로서의 근신과 기계는 그 근본을 추구하면 진여일심에서 일어난 이치를 통달하지 못한데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허망하게 생사윤회를 받는 것이다.”

◎ 二別示分三 

▣ 初別業妄見

云何名爲別業妄見. 阿難. 如世間人目有赤?. 夜見燈光別有圓影五色重疊. 於意云何. 此夜燈明所現圓光爲是燈色. 爲當見色. 阿難. 此若燈色. 則非?人何不同見而此圓影唯?之觀. 若是見色. 見已成色則彼?人見圓影者名爲何等. 復次阿難. 若此圓影離燈別有. 則合傍觀屛帳?筵有圓影出. 離見別有應非眼?. 云何?人目見圓影. 是故當知色實在燈. 見病爲影. 影見俱?. 見?非病. 終不應言是燈是見. 於是中有非燈非見. 如第二月非體非影. 何以故. 第二之觀?所成故. 諸有智者不應說言此?根元是形非形離見非見. 此亦如是目?所成. 今欲名誰是燈是見. 何況分別非燈非見

◎ 2. 허망한 견해를 따로 셋으로 보이다.

▣ 1. 별업망견(別業妄見) 
39. 무엇을 별업망견이라고 하겠느냐. 가령 세간 사람이 눈에 분명[無明妄見]이 생겨 밤[迷位]에 등불[衆生本具如來藏]을 보면 등불과 따로 떨어진 별도의 둥근 그림자가 있어서 다섯 겹으로 주첩한 모습을 보인다[五蘊五塵?身境]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밤의 등불광명에 나타난 둥근 오색광채는 등불자체에 있는 색깔이 겠느냐. 아니면 보는 눈 자체에 있는 색이겠느냐. 즉 근신과 기계로 그 자체가 여래장성이겠느냐. 아니면 중생의 허망한 견해로 이루어졌겠느냐.
  아난아. 이 등불 그림자 빛이 등불 자체에 있는 빛깔이라면 눈병이 나지 않은 사람[眞見眞智 諸佛菩薩]은 무엇 때문에 동일하게 보질 못하고 오직 눈병 난 사람에게만 보이겠느냐. 즉 여래장성 자체에 근신과 기계가 실제로 있다면 무엇 때문에 모든 부처님은 보질 못하느냐.
  가령 그 그림자 빛이 보는 눈 자체에 있는 색깔이라면 보는 눈 자체가 이미 빛깔을 이루었는데, 그런데도 눈병 있는 사람이 둥근 그림자를 보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라고 해야겠느냐. 즉 근신과 기계가 허망한 견해의 자체에 있다고 그 허망한 견해 자체가 이미 근신과 기계를 이루고 있는데, 중생에게 따로 보이는 근신과 기계는 다시 어떤 물건이겠느냐.
  다시 아난아. 등불 밖의 둥근 그림자가 등불자체를 떠나서 따로 있다면 그 곁으로 보이는 병풍?휘장?책상?앉는 자리에서도 둥근 그림자가 나와야만 하리라. 즉 여래장성을 떠나 따로의 범천(梵天)이나 신아(神我)에서도 일체만법이 일어나야만 하리라.
  또 보는 눈을 떠나서 따로 있다면 그것은 보는 눈에 보이질 않아야만 하는데도 무엇 때문에 눈병있는 사람의 눈에만 둥근 그림자가 보이겠느냐. 즉 중생의 허망한 견해를 떠나서 근신과 기계가 따로 보인다면 중생의 허망한 견해에 보이질 않아야만 하는데 무엇 때문에 중생의 허망한 견해에만 보이겠느냐.
  그러므로 알아야만 한다. 둥근 오색 빛은 실제로 등불 자체의 모습을 있으므로 등불 자체가 오색 그림자를 따로 이룬 것이 아니라 단지 보는 눈에 병이 있어 그 등불이 오색 그림자를 따로의 모습을 이루었을 뿐이다. 즉 근신과 세계가 여래장 자체의 모습이건만 중생이 허망한 견해를 일으키면 그것이 따로의 모습으로 보이게 된다.
  등불 그림자와 그것을 따로의 그림자로 보는 눈은 동시에 눈병으로 이루어졌을 뿐. 즉 근신?기계와 그것을 따로의 모습으로 보는 허망한 견해[見相二分]을 동시에 무명업식으로 이루어졌을 뿐 눈병을 일으킨 눈 자체는. 즉 진실한 견해 자체는 허망한 견해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이미 알았다면 끝내 등불자체에 둥근 그림자[身境]가 있다. 또는 그것은 보는 눈에 있다고 말하지 않아야만 하며, 이 가운데서 등불[眞見]이 아니다. 또는 그것을 보는 눈이 아니다 라고도 말하지 않아야 한다.
  이는 마치 제2월이 달의 자체[眞見]도 아니며, 따로 실제하는 달 그림자[妄見]도 아님과 같다.
  왜냐하면 제2월을 보는 이유는 단지 눈꺼풀을 눌러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모든 지혜있는 사람이라면 손가락으로 누른 근원인 눈 자체[如來藏性]가 달의 형체다 또는 달의 형체가 아니다 말하지 않아야만 하며, 그것은 보는 눈을 떠나서 따로 있다. 또는 보는 눈 자체를 떠나지 않은 상태에서 바로 그 눈에 있다고 말하지도 않아야만 한다.
  이도 역시 그러하여 둥근 그림자는 등불 자체도 아니며, 그렇다고 눈 자체에 있지도 않다. 그것은 단지 눈병으로 이루어졌을 뿐이다.
  그런데도 지금 그것을 어떤 실제적인 명칭을 붙여, 그 그림자는 등불 자체에 있다. 또는 눈 자체에 있다고 말하려 하느냐. 하물며 그 그림자는 등불자체에 있지 않다. 그것은 눈 자체에 있지 않다 라고 분별하겠느냐.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견상이분(見相二分)은 원래 진실한 여래장성이여서, 그것은 본래없는 이치가 마치 허공화(虛空華)가 본래 일어난 일도 없고 새삼 사라지는 일도 없음과도 같다.”

▣ 二同分妄見 
云何名爲同分妄見. 阿難. 此閻浮提除大海水中間平陸有三千洲. 正中大洲東西括量大國凡有二千三百. 其餘小洲在諸海中. 其間或有三兩百國. 或一或二至於三十四十五十. 阿難. 若復此中有一小洲祗有兩國. 唯一國人同感惡緣. 則彼小洲當土衆生覩諸一切不祥境界. 或見二日. 或見兩月. 其中乃至暈適珊?彗?飛流負耳虹?. 種種惡相. 但此國見. 彼國衆生本所不見亦復不聞

▣ 2. 동분망견(同分妄見)

40. “무엇을 동분망견이라고 하겠느냐.
  아난아. 수미산 남쪽 염부제에서 대해수(大海水)를 제외하고 그 중간에 있는 평원육지에 중생들의 생활공간을 모두 합하면 삼천주(三千州)가 있다.
  그 가장 중간에 위치한 큰 주를 동서로 그 수량을 포괄한다면 큰 나라는 이천 삼백국이 있고, 그 나머지 마다 가운데 있는 작은 주의 중간엔 혹은 삼백국. 이백국이 있으며. 혹 가장 작은 나라들은 하나 둘부터 삼십 사십 오십 나라도 있다.
  아난아. 다시 이들 주 가운데 하나의 작은 주가 있는데 그 주엔 단지 두 나라가 있을 뿐이다. 이 두 나라 가운데서 한쪽나라 사람들은 모두가 공동으로 악업을 지은 인연 때문에 그 작은 주의 국토에 사는 중생들은 일체의 상서롭지 못한 주변 환경을 보게 된다.
  그들은 혹 두 개의 해를 보기도 하고, 혹은 두 개의 달을 보기도 하며, 그 해와 달 가운데서 악한 해무리?달무리가 주위를 두른 모습과 해와 달이 서로 부딪치는 모습과 혹은 요망한 기운이 패결(??)처럼 나타난 모습과 혜성이 날으며 떨어지는 모습과 음향의 기운이 서로 등지면서 조화롭지 못한 무지개 모습들인 이 같은 갖가지 악한 모습들을 단지 이쪽 한 나라 사람들만 보고 상대방 저쪽 나라 중생들은 원래부터 보지 못했고 듣지도 못했다.

▣ 三進退合明分三 

△ 初進別例同 
阿難. 吾今爲汝以此二事進退合明. 阿難. 如彼衆生別業妄見?燈光中所現圓影. 雖似前境. 終彼見者目?所成. ?卽見勞非色所造. 然見?者終無見咎. 例汝今日以目觀見山河國土及諸衆生. 皆是無始見病所成. 見與見緣似現前境. 元我覺明見所緣?. 覺見卽?. 本覺明心覺緣非?. 覺所覺?. 覺非?中. 此實見見. 云何復名覺聞知見. 是故汝今見我及汝. 幷諸世間十類衆生. 皆卽見?非見?者. 彼見眞精性非?者故不名見

▣ 3. 동분망견과 별업망견을 진퇴(進退)의 논리로 종합해서 밝히기를 셋으로 하다.

△ 1. 별업망견에 나아가서 동분망견에 견주다.[進別例同]

41. “아난아. 나는 지금 너를 위해서 이들 두 별업망견과 동분망견으로써 진퇴의 형식을 빌려 종합해 밝히리다.
  그들 중생의 별업망견으로 보는 등불 가운데 둥근 오색 그림자[見與見緣]는 흡사 실제있는 듯이 목전경계로 나타나나 그것은 끝내 보는 사람의 눈병으로서 이루어졌을 뿐이다.[元我覺明, 見所緣生] 즉 국토와 모든 중생을 눈으로 보는 것은 그 모두가 무시이래 견병(見病)으로 보인 것이다.
  눈병은 눈의 피로함 때문에 나타난 일시적 현상일 뿐 실제의 오색으로 조성되진 않았다.[覺見卽?], 그러나 그 병이 일어난 자체[眞覺眞見] 자리는 끝내 허물이 없다.[本覺明心, 覺緣非?], 즉 바로 지각하고 진실하게 바로 본래 밝은 마음자체의 이치는 견병이 아니다.
  이를 네가 너의 눈으로 산하국토와 모든 중생들을 상대적으로 분별하고 보는 일에 견주어 본다면 그것은 모두가 무시이래의 견병으로 이루어졌을 뿐이다.
  주관적으로 분별하며 보는 마음[見分]과 분별로 보이는 대상[相分]은 흡사 실재하는 목전경계로 나타난 듯하나 그것은 원래 나의 각명심(覺明心)의 직각진견(直覺眞見)에서 일어난 견분과 상분일 뿐이며, 따라서 본각명심(本覺明心) 가운데서 이같은 견분과 상분을 직각진견하는 여래장청정체는 끝내 눈병의 모습이 아니다.
  직각진견을 자체로 해서 일어난 견분망심과 상분망경계는 눈병이고, 직각진견하는 근본 마음의 실체는 눈병, 즉 허망한 견분과 상분경계에 떨어지질 않는다.
  이는 실로 상분경계를 견분분별로 보는 이 둘이 일어나기 이전 상태인 직각진견인데, 어찌 그것을 육식분별인 견문각지(見聞覺知)의 분별견이라고 하겠느냐. 이는 상대적 분별이 끊긴 자리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지금 나의 모습과 너와 모든 세간의 십류중생까지를 함께 살펴보라. 그 모두는 직각진견 자체에서 일어난 허망한 눈병일 뿐, 진견자체는 눈병은 아니다.
  그 진견은 정미하고 진실하여 그 자체성품은 눈병과 함께 하질 않는다. 그러므로 이는 진견이라는 차별적 명칭까지도 성립하지 않는다[不立文字].”

△ 二退同例別
阿難. 如彼衆生同分妄見例彼妄見別業一人

△ 2. 동분망견을 물리쳐 별업망견에 견주다.(退同例別) 42. “아난아. 그들 많은 중생의 동분망견을 한 사람의 별업망견에 견주어 보기로 하자.”

△ 三進退合明 
一病目人同彼一國彼見圓影?妄所生. 此衆同分所見不祥同見業中?惡所起. 俱是無始見妄所生. 例閻浮提三千洲中兼四大海娑婆世界幷?十方諸有漏國及諸衆生. 同是覺明無漏妙心見聞覺知虛妄病緣和合妄生和合妄死

△ 3. 별업망견에 나아가서 이로써 동분망견에 견주고 동분망견을 물리쳐 별업망견에 견주어 이 둘을 종합해서 밝히다[進退合明]

43. “눈병이 있는 한 사람의 허망한 별업망견이 그들 한 나라에 모여 사는 많은 사람의 동분망견과 같으며, 한 사람의 눈병에서 허망하게 일어난 둥근 그림자와 한 나라의 많은 사람의 동분망견에 나타난 상서롭지 못한 일들인 이 둘이 동일하게 허망한 견해와 그에 따라 지은 업 가운데 나타난 결과로서 악한 모습들이라는 점에선 같다.
  그러므로 알아야만 될 것은 동분망견과 별업망견이 둘로 다르긴 하나 이는 동시에 무시이래의 전도된 망상에서 나타난 모습들이라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이 이치를 좀더 크게 확대하여 염부제에 있는 삼천주 가운데 있는 모든 국토와 중생들에게까지 견주어 본다 해도 이 모두는 동일하게 허망한 분별견에서 일어난 모습들이며, 더 나아가 수미산 주위의 사대해(四大海)와 사바세계와 시방세계의 모든 유두국토와 그 안에 살고 있는 모든 중생들까지도 무루의 묘각명심에서 최초일념무명불각을 일으켰기 때문에 그 진실했던 본래의 마음이 망상 생멸의 인연을 따라서 이윽고 하나의 심체에서 견상이분이 단박에 이루어졌다. 그 때문에 견분엔 견분각지의 육근분별[見分]과 상분인 색성향 등 육진[相分]의 차별상이 목전에 상대적으로 있게 되었다.
  이 모두는 최초 일념무명이 원인종자[因]가 되고 업식이 경계 연[緣, 境]이 되어 이들 인연이 화합하면 일어나고 그 화합이 분리하여 끝내 다하면 소멸한다. 즉, 의보는 성주괴공의 천류상이 있고, 정보는 생노병사의 생멸상이 있는 것이다.”

[要義] 이상으로 법공의 이치를 나타내는 일은 끝났다.

△ 三顯本覺離緣以示眞如出纏 若能遠離諸和合緣及不和合. 則復滅除諸生死因. 圓滿菩提不生滅性. 淸淨本心本覺常住

 △ 3. 본각은 생멸의 인연을 떠났음을 나타냄으로써 진여는 번뇌의 속박을 벗어났음을 보이다.

  “가령 모든 인연의 화합[別業境]과 인연이 화합하지 않음[同分境], 이 둘을 동시에 멀리 여의면 모든 생사의 원인[別業妄見 分別事識의 分段生死, 因과 同分妄見無明業識의 變易生死因]까지를 다시 제거하여 별업망견과 동분망견인 주관번뇌를 전환함으로써 이루어진 원만보리와 이종생사를 전환하여 성취한 불생불멸의 열반의 청정한 본심, 즉 원만지과(圓滿智果)로 회복하면 번뇌를 벗어난 본각진여성은 원만단과(圓滿斷果)로서 상주하리라.”

[要義] 여기에서는 오온의 예로써 세계를 논파함으로써 법집을 타파하고 있다. 우선적으로 “대다라니의 모든 삼마제 오묘한 수행로”를 부연설명해 보기로 한다.
  “다라니”는 총지(總持)라고 번역한다.
  앞에서 결론짓고 권하기를 “오묘한 보리의 수행로에서 피로와 권태를 내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그것은 왜냐하면 그 때는 단지 인공(人空)의 이치마져 나타내지 않았으므로 그 때는 단지 인아집이 공적했을 뿐 법집까지 잊질 못했었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에서 삼관 가운데 공관(空觀)의 원융한 실체를 보인다면, 삼관 가운데 어느 하나만 들어도 나머지 둘까지 동시에 겸하게 되어 셋을 동시에 갖추며, 셋을 말한다. 그 때문에 “모든 삼마제”라고 하였다.
  지금은 법집이 한번 타파되고 나자 공여래장의 실체가 전체로 단박 나타났는데, 공여래장은 단지 공관수행이 의지하는 실체로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삼관이 원융한 공여래장으로서의 실체이다.
  따라서 우주만유를 총괄하고 융합하여 삼관이 절대 보편한 일심으로 귀결하기 때문에?總持三昧? 즉 ?모든 삼마제”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모든 삼마제이며 오묘한 수행로이다”한 까닭이다. 이는 진공이 가유에 상즉한 진공이지 단순한 따로의 진공만이 아닌 의미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부처님은 아난에게 “많이 듣고 애써 기억할 뿐 사마다로를 비밀하게 관조하는 데 있어선 마음이 아직 열리지 않았다”라고 책망하고 계시다.
  여기에서 우리의 근본마음의 이치를 생멸인연의 화합상에 소속하지도 않고 상주자연의 모습에도 소속하지 않음을 바로 지적했다 하겠는데, 그러나 아직은 가유에 상즉한 진공의 이치까지는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야 이 이치를 거듭 열어 보이신 것이다.
  법집은 무엇을 말함이겠는가. 우주만유를 크게 요약하면 그것은 단지 안으로 오온신심과 밖으로 산하대지?허공?세계 일 뿐인데, 이 같은 큰 틀의 현상세계에 있어서 그것은 실재하는 사물로 따로 있다고 집착하는 마음일 뿐이다.
  앞에서는 말하기를 “너의 몸과 마음으로부터 밖으로는 허공?산하?대지에 이르기까지 그 모두는 묘명진정묘심(妙明眞精妙心中) 가운데 나타난 사물이다. 이같은 진심을 버리고 망심을 진실로 오인하는 것은 마치 백천이나 되는 큰 바다를 버리고 하나의 물거품만을 전체의 바다로 인식함과 같다. 이것이 전도된 망상이다”라고 하였다.
  지금은 이같은 두 종류의 망상을 타파하려고 부처님께선 우선적으로 아난에게 고하시길 “일체중생이 세간에서 생사윤회를 반복하는 이유는 두 종류의 전도된 분별 망견 때문이다”라고 하셨다.
  그러나 이 두 종류의 분별 망견은 일진법계, 즉 본각진심 그 자리를 자체로 의지하여 이처럼 망상의 미혹이 발생하고 나면 반드시 허망한 망상의 활동[妄業]이 있게 마련인데, 이는 기신론에서 말하고 있는 “망상이 요동하면 그 결과 반드시 생사의 괴로움이 뒤 따른다”한 경우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그 망상의 업에서 생사유전을 반복할 뿐이다.
  무엇을 두 종류의 망견이라고 하는가. 첫째는 별업망견이고 두 번째는 동분망견이다.
  별업망견은 중생의 정보인데, 모든 유정들 각자마다의 오온신심은 각자가 개인적으로 따로 업을 지어 불러들인 과보이다.
  동분만견은 중생의 의보인 세계인데, 이는 모든 사람들이 공동으로 불러들인 결과물이다.
  이 두 종류의 망견은 본래부터 실체가 있질 않다. 단지 진정묘명한 마음 가운데서 최초 일념이 허망하게 요동을 쳐 무명이 있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이윽고 진여일심이 변하여 진심과 망심이 화합한 모습인 제팔아뢰야식이 형성되었다.
이 아뢰야식이라는 식자증분의 망상종자 활동을 의지함 때문에 견상이분(見相二分)의 활동이 일어나 그 가운데 견분은 주관분별인 망심이 되고, 상분은 분별대상인 망경이 되었다.
  이처럼 견분망심과 상분망경이 상대적 의존관계를 형성하자 그 가운데서 미혹을 일으키고 업을 지어 그 결과 윤회를 반복하게 되는데, 이같은 생사의 모습은 그 원인이 두 종류의 망견에 그 허물이 있다.
  이것은 본 경문에서 말하고 있는“주관분별심[見]과 분별대상경[見緣]과 그 가운데서 일어나는 인식분별[想]은 마치 허공 꽃이 본래 없는 이치와도 같다.”한 경우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망견이 일어나기 전의 진심은 건강한 눈과 같고, 진심을 자체로 의지해서 일어난 망심은 눈병과도 같고, 오온신심은 등불 주변에 나타난 둥근 오색 그림자와 같고, 산하대지는 허공에서 어지럽게 되는 꽃과도 같다.
  가령 눈에 병이 원인임을 안다면 두 종류의 망상은 본래 공적함을 깨달을 수 있다. 그 때문에 허깨비를 실체로 잘못 보는 눈병의 편에서 이 두 종류의 망상을 타파하고 있다.
  무엇을 별업망견이라고 하는가. 그것은 다름 아닌 중생 각자의 오온신심인 정보이다.
  중생 각자의 오온신심은 본래 공적하여 그것은 단지 망견을 의지해서 있을 뿐임을 나타내려 하였다. 이것이 별업망견을 설명한 이유이다.
  이를 비유하면 병이 난 눈엔 등불에 오색의 둥근 그림자가 보이는 것과도 같다. 좋은 눈과 등불은 모두 진심에 비유하였다. 그 때문에 바로의 등불[卽燈]과 등불 자체를 떠난[離燈], 이 둘의 측면에서 망견과 진심을 논변하고 있다. 망견과 오색 그림자는 본래 없는데 이를 어떻게 시비로써 유무를 논변하겠는가.
  오색 그림자가 실제는 등불 자체에 있다함을 망상이 진심을 떠나지 않은데 비유하였고, 눈병 때문에 오색 그림자가 보인다 함은 미혹 때문에 망상이 있게 되었음을 비유하였으며, 그림자와 눈병이 동시라 함은 마음과 경계를 함께 미혹했음을 비유하였으며, 병이 일어난 눈 자체는 눈병이 아니다 하여, 이를 다시 제1월은 제2월이 아니다 라고 비유하였는데, 이를 통해서 명료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진심에는 끝내 시비유무의 모습이 없다는 점이다.
  제2월은 단지 눈꺼풀을 손가락으로 눌러서 일어났음을 안다면 오색 그림자와 그것을 보는 눈은 눈병이 그 허물이라는 것까지도 알 수 있다. 등불자체에서 무슨 시비의 허망한 헤아림을 일으키겠는가.
  이를 알았다면 오온은 본래적으로 공적함을 알 수 있는데, 그 곳에 무슨 인연이니 자연이니 하는 의심이 있을 수 있으랴.
  무엇을 동분망견이라고 하는가. 그것은 다름 아닌 시방의 중생들이 동일하게 불러들인 의보의 세계이다. 세계는 원래 망견을 의지해서 일어났으므로 그것은 실제로 있지 않음을 나타내려고 하였다.
  그 때문에 수미산 남쪽 염부제의 크고 작은 많은 나라들에서 일어나고 있는 재앙과 상서로움이 한결같지 않은 이치로써 밝혔다.
  한쪽 나라 사람들은 동일하게 악업을 지은 인연으로 불러들인 국토에서 그날 사람들은 상서롭지 못한 일들만 동일하게 본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악업을 지은 일이 없는 국토의 중생들은 그같은 상서롭지 못한 재앙은 보지도 듣지도 못한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사바예토는 악업으로 불러들인 세계이며, 따라서 불국정토 사람들은 이 사바세계를 본래적으로 아예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는 법화경에서 말한 “삼천대천세계가 겁화(劫火)에 타오른다 해도 내가 거처하는 이 국토는 안온하기만 하다”한 경우 때문이다.
  지금 이 두 가지 일을 진퇴로써 종합해서 밝혀보기로 하자[進退合明]. 이는 중생이 별업망견에 나아가서 동분망견에 견주고, 다시 동분망견을 물리쳐 별업망견에 예를 들겠다는 말이다.
  중생들은 내적으로 오온이 본래 공적한 이치는 쉽사리 깨달은 수 있으나 밖으로 세계마저 실제로 있지 않다 한 데세 이르러선 그 이치를 실로 밝히기 어렵다.
  그 때문에 변업과 동업의 두 종류 일을 빌려 이를 진퇴의 논리 형식으로 종합해서 밝히고 있을 뿐이다.
  중색각자의 별업망견의 결과로 나타난 오온신심은 비유하면 등불이 나타난 오색의 둥근 그림자와 같다. 그 그림자는 흡사 실제있는 듯 하나 그러나 그것은 끝내 눈병으로 인해 나타났을 뿐이므로 등불자체에 본래적으로 있질 않음과 같다. 가령 그것은 눈병이 원인임을 알았다면 등불자체를 보는 데엔 병통이 없을 것이다.
  이로써 중생들이 동분망견으로 보는 산하대지?국토와 그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모든 중생들은 모두가 시작없는 이래의 무명망견의 병통으로 이루어졌을 뿐임을 견주어서 밝히고 있다.
  무명망견과 그에 의해 보이는 모든 현상세계는 흡사 실제하는 목전경계인 듯 나타나나 그것은 진실한 모습으로 있질 않고 원래 나의 본각진심에서 일어난 무명견병일 뿐이다. 그러므로 허망한 견해로 허망한 세계를 실제인양 보는 병통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본각의 밝은 마음으로 모든 경계를 분별없이 직각진견(直覺眞見)하는 자체는 무명의 병통이 아니다.
  그러므로 직각진견하는 본각명심에서 일으킨 견분망심과 상분망경이 병통일 뿐 자체인 본각은 병통이 아니므로 견분과 상분에 함께 떨어지질 않는다. 이 자리가 진견(眞見)이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만 할 것은 일진법계 가운데선 중생과 부처의 차별적인 모습이란 본래 없다. 그런데도 중생과 부처의 모습이 따로 실재하는 모습이라고 보는 것은 그 모두가 망견의 병통일 뿐 망견이 일어안 자체인 진견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상으로 별업망견에 나아가서 이를 동분망견에 견주어, 이 둘을 종합해서 관찰함으로써 의보의 세계는 본래 공적함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다시 동분망견을 물리쳐 이를 별업망견에 그 예를 든다면 즉 그들 중생의 동분망견을 별업망견의 한 사람에게 견주어 본다면 눈병난 한 사람이 보는 둥근 오색 그림자는 눈병에서 허망으로 일어났을 뿐이다.
  이를 한 나라 사람들이 동분으로 보는 상서롭지 못한 재앙에 견주면 그것은 동일하게 악업에서 일어났다. 그러므로 그들 국토는 동시에 시작없는 이래의 동분망견에서 일어났을 뿐이다.
  한 나라로써 염부제의 크고 작은 모든 국토와 모든 중생들에게 견주어 본다면 그들은 동일하게 일념무명으로 인해 오묘하고 밝은 마음을 미혹하여 견문각지(見聞覺知)의 허망한 육식분별을 이루어 안으로는 육근과 밖으로 육경이 인연으로 화합하여 그 가운데서 허망하게 죽었다간 허망하게 태어날 뿐이다.
  이를 따라서 관찰한다면 그동안 실재하다고 여겼던 안으로 정보인 오온신심과 밖으로 의보인 세계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소멸하여 일진법계로 귀결할 것이다.
  그러므로 별업망견으로 동분의 세계, 즉 정토와 예토를 타파함으로써 법공의 이치를 나타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시가(始覺)을 통해서 아집과 법집이 논파되고 나면 본각(本覺)이 나타난다.
  이로써 진여본각은 생멸인연화합을 떠났음을 나타내 그 진여의 이치는 번뇌생사의 속박을 벗어났음을 나타냈다.
  그 때문에 “인연화합과 화합 아님을 멀리 여의고 다시 모든 생사의 원인인 동별망견(同別妄見)까지 제거한다면 불생불멸하는 청정본각이 상주한다”라고 말하였다.
  처음 칠처징심으로부터 망견을 논변한 이래로 많은 방편을 열어 그들 망견을 타파하고 진심을 나타냈었다. 그리곤 여기에 이르러서 아집과 법집이 모두 논파되고서야 본각진심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는 화합식(和合識)인 아뢰야식만을 논파하여 본각진여를 나타냈으므로 아직은 진여일심의 근원에까지 도달하진 못했다.
  그러므로 다음의 경문부터서 다시 시각?본각?화합에 대한 헤아림까지 논파하여 그것을 모두 여래장성으로 회귀하고 있다.
  이상으로 진여본각은 인연화합을 떠났음을 나타냄으로써 본각진여는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났음을 보이는 일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