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능엄경(楞嚴經)

능엄경 강의 11 / 송찬우 교수

通達無我法者 2007. 11. 28. 10:46


 
능엄경 강의 11
 
   
 
     唐天竺沙門般刺密帝譯
     鳥?國沙門彌伽釋迦譯語
     菩薩戒弟子淸河房融筆受
     明南獄沙門?山釋德淸述

◈ 二會六入
 
《初會眼入
 
◈ 2. 육입(六入)을 여래장성과 융합하다.

《 1. 안입(眼入)을 여래장성과 융합하다. 
復次阿難. 云何六入本如來藏妙眞如性. 阿難. 卽彼目睛發勞者. 兼目與勞同是菩提?發勞相. 因於明暗二種妄塵. 發見居中. 吸此塵象. 名爲見性. 此見離彼明暗二塵畢竟無體. 如是阿難. 當知是見非明暗來. 非於根出. 不於空生. 何以故. 若從明來暗卽隨滅. 應非見暗. 若從暗來明卽隨滅. 應無見明. 若從根生必無明暗. 如是見精本無自性. 若於空出前?塵象歸當見根. 又空自觀何關汝入. 是故當知眼入虛妄. 本非因緣非自然性

 “다음으로 아난아. 무엇 때문에 육입의 근본을 추구한다면 여래장 묘집여래성이라고 하겠느냐.
  가령 어떤 사람이 사람이 까닭없이 눈을 똑바로 뜬체 움직이지 않고 있으면 눈동자에서 피로현상이 일어나는데, 그 피로함[見分]과 피로를 일으키는 안근까지 동일하게 보리심 가운데서 일어난 무명의 모습이다. 즉 인식 대상인 색진만 망상이 아니라 인식하는 주체까지도 보리심에서 동시에 함께 일어난 무명번뇌의 모습일 뿐이다.
  안입의 작용이 있게 된 것을 인식대상인 광명과 어두움의 모습인 두 종류의 허망한 색진(色塵)과 상대적으로 마주함 때문에 안근으로 보는 작용이 일어나 이윽고 광명과 어두움이라는 두 색진을 안식분별로 집착하고 흡수하여 아뢰야식 속으로 들어간다.
  이를 두고 보는 성질이라고 한다[見性].
  이같은 보는 성질은 안근과 색진의 상대적인 의존관계에서 안식이 흡취하는 광명과 어둠을 떠나선 끝내 따로의 실체가 없다.
  아난아. 알아야만 한다. 이같은 의미를 지닌 안입으로서의 보는 성질은 광명과 어두움의 모습에서 오지 않았으며[不從他生]. 역시 안근자체에서 오지 않았으며[不從自生]. 허공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다는 것을[不無因生].
  왜냐하면 가령 사물을 보는 성질이 광명으로부터 왔다면 어두움의 모습이 목적에 나타날 땐 보는 성질은 이미 광명을 따라서 소멸하였으므로 어두움을 보지 못해야만 한다.
  또 보는 성질이 어둠으로부터 왔다면 광명이 목전에 나타나면 보는 성질은 어둠을 따라서 이미 소멸하였으므로 광명은 볼 수 없어야만 한다.
  가령 안근에서 나왔다면 그 안근은 하나의 자체일 뿐이므로 그곳엔 광명과 어둠이라는 두 모습이 없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이같이 보는 성질인 안입은 광명과 어둠을 흡취하여 그 훈습하는 세력이 아뢰야식속으로 들어갔으므로 요컨대, 광명과 어둠이라는 두 색진을 상대해야만 안입(眼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금은 이미 보는 성질이 알 처소가 아뢰야식의 상분인 색진을 떠나서 따로 상대해서 일어나는 보는 성질도 역시 광명과 어둠을 떠나서 따로의 자체라곤 없다.
  또 가령 보는 성질이 허공에서 원인없이 나왔다면 목전의 모든 사물을 바라보다가 다시 되돌아 오면 우리의 눈을 상대적으로 마주 보며 되돌아 와야만 하며, 또 허공 자체가 스스로 보는 성질이라면 무엇 때문에 너의 보는 성질인 안입과 상관하랴.
  이처럼 안근과 색경과 허공, 이 셋에서 따로의 보는 성질이 독자적인 모습으로 없으므로 알아야만 한다. 안입은 허망하여 그 일어난 근본을 추구해 본다면 인연화합성으로 있질 않으며, 자연의 성으로 있지도 않은 여래장청정성에서 일어난 망상임이 분명해 진다.

[要義] 여기에서는 육입의 근본이 여래장성임을 총론적으로 따져 묻고 있다. 일반적으로 육입을 육근이라고 말들 하는데, 즉 육근은 육진이 흡취되 들어가는 처소[所入處]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경전의 의미를 자세하게 살펴보았더니 그렇지 않은 듯도 하다. 왜냐하면 안입을 팔식 견정(見精), 문성(聞性) 등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기 때문인데, 이를 어떻게 단순히 청정색근인 안근으로만 헤아리랴.
  여래장성은 유일하고 견고하여 빈 틈 없는 법신의 이치여서 그곳엔 주관?객관이 끝내 단절하였으므로 근본적으로 상대적으로 들어가는 일이 불가능하다.
  이같은 여래장심에서 최초 일염이 허망하게 요동하여 이윽고 근본무명을 일으켜 여래장진심을 미혹함으로써 팔식망상을 이루었다. 이는 본 경문에서 식정원명(識精元明)이라고 한 부분에 해당한다. 즉 식정은 제팔식이고 원명은 여래장성이다.
  이같은 팔식엔 자증분체와 그곳에서 일어난 인식주관인 견분과 인식대상인 객관 상분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 이를 삼분(三分)이라고 한다.
  식자증분에서 동시에 일어난 견분과 상분이 상대적으로 마주하면 육진상분을 육식분별심이 집착하고 흡수하여 그 훈습하는 세력이 제8아뢰야식으로 들어간다. 이것을 종자라고 한다. 이처럼 육진 상분 경계를 흡수하기 때문에 육입(六入)이라고 하며, 여기에서 육식분별작용인 견분취상각지를 일으키는데, 이는 육근이 근원이 되어 일어난다. 맑고 고요했던 여래장성실체가 이 때문에 나뉘어 육수용근(六受用根)이 이를 의지하여 성립한다. 이로서 이윽고 육진이 흡수돼 들어간다. 따라서 입(入)은 단순하게 안근만을 말함은 아니다.
 “눈을 똑바로 뜨고 있으면 피로가 일어나는데 그 눈과 피로는 동일하게 보리에서 눈을 똑 바로 떠서 일어난 피로 현상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육근과 육식이 일어난 근원은 동일한 하나의 자체. 즉 여래장성임을 말한다.
  여기에서 “눈”은 안근(眼根)인데 이는 무명세력으로 형성된 껍질에 속한 상분으로서 청정사대색근(淸淨四大色根)에 해당한다.
  이 색근이 육근의 작용이 일어나는 근원이다.
  “피로”는 견분인데 이는 제7식의 근원이며, “보리에서 눈을 똑 바로 떠 피로가 일어난다”함은 최초일념 생상무명(生相無明) 즉 식자증분이다. 이는 상분과 견분이 동일하게 식자증분체에서 일어났음을 나타낸 것이다. 그렇다면 육입과 육식은 동일하게 식정원명(識精元明)이 그 자체이다.
  이는 단지 무명훈습 때문에 육식분별인 견문각지가 일어나 이를 육근이 작용하는 근원으로 삼았을 뿐이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눈을 똑바로 뜬다”함은 무명에 비유하였고, 피로는 상분?견분에 비유하였고, “동일하게 세력이 진여를 훈습하여 팔식삼분(八識三分)이 있게 되었음을 말한다.
  이로써 추리하여 팔식삼분이 실체가 없어 원래 동일하게 하나의 진심이 그 근원이었음을 안다면 육근ㆍ육식ㆍ육진이 셋이 따로의 자체 성질이라곤 전혀 없게 된다.
  그 때문에 인연의 화합에도 자연성에도 소속하지 않은 여래장묘진여성이 일어난 근본일 뿐이다. 하였다.

《二會耳入 《2. 이입(二入)을 여래장성과 융합하다. 
阿難. 譬如有人以兩手指急塞其耳. 耳根勞故頭中作聲. 兼耳與勞同是菩提?發勞相. 因於動靜二種妄塵. 發聞居中. 吸此塵象. 名聽聞性. 此聞離彼動靜二塵畢竟無體. 如是阿難. 當知是聞非動靜來. 非於根出. 不於空生. 何以故. 若從靜來動인隨滅. 應非聞動. 若從動來. 靜卽隨滅. 應無覺靜. 若從根生必無動靜. 如是聞體本無自性. 若於空出有聞成性卽非虛空. 又空自聞何關汝入. 是故當知耳入虛妄. 本非因緣非自然性

  아난아.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양쪽 손가락으로 그의 귀를 급히 막으면 이근(耳根)이 피로를 느끼기 때문에 미리 속에서 소리가 일어남과도 같다. 이는 이근과 소리의 피로가 동일하게 보리자성에서 눈을 똑바로 떠 일어난 피로 현상과도 같다.
  이같은 이입은 원래 자체 성질이란 없고 단지 이근이 소리의 진동과 고요라는 두 종류의 허망한 성진(聲塵)을 상대적으로 마주한 인연 때문에 듣는 성질이 일어나 두 종류의 성진을 집착흡취하여[耳識] 아뢰야식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듣는 성질이라고 한다.
  이러한 의미를 지닌 이입을 아난아. 알아야만 한다. 이처럼 듣는 성질은 소리의 진동과 고요에서 오질 않았고, 이근에서 나오지도 않았으며, 허공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다는 것을.
 가령 듣는 성질이 소리가 고요한 경지에서 왔다면 소리의 진동이 나타날 땐 듣는 성품은 이미 소리의 고요함을 따라서 사라졌으므로 소리의 진동은 듣지 못해야만 하며,
  만일 소리의 진동에서 왔다면 소리의 고요함이 나타나면 그 듣는 성품은 소리의 진동을 따라서 사라졌으므로 소리의 고요함은 지각할 수 없어야만 하며,
  또 이근으로부터 일어났다면 이근은 하나의 자체일 뿐이므로, 그곳엔 소리의 진동과 고요라는 두 모습은 없어야만 한다.
  이처럼 듣는 성질은 성진을 따라 이입이라고 하기 때문에 진동과 고요라는 두 성진을 마주해야만 이입이라고 말할 수 있으므로 그 근본을 추구한다면 자체 성질이라곤 없다.
  가령 이입이 허공에서 나왔다면 이는 허공 자체가 들을 수 없는 이근을 자체적으로 이루었으므로 그것은 지각 없는 허공이 아니며, 또 허공이 자체적으로 듣는데 너의 이입과 무슨 상관이 있으랴. 그렇다면 허공에서 오지 않았다는 것도 분명해 진다.
  그러므로 알아야만 한다. 이입은 허망하여 그 근본을 추구해 보면 인연의 성품도 아니고 자연의 성질도 아닌 여래장성 청정심에서 발현했다는 것을.

《三會鼻入 《3. 비입(鼻入)을 여래장성으로 융합하다. 
阿難. 譬如有人急畜其鼻. 畜久成勞. 則於鼻中聞有冷觸. 因觸分別通塞虛實. 如是乃至諸香臭氣. 兼鼻與勞同是菩提?發勞相. 因於通塞二種妄塵. 發聞居中. 吸此塵象. 名?聞性. 此聞離彼通塞二塵畢竟無體. 當知是聞. 非通塞來. 非於根出. 不於空生. 何以故. 若從通來塞則聞滅. 云何知塞. 如因塞有通則無聞. 云何發明香臭等觸. 若從根生必無通塞. 如是聞機本無自性. 若從空出是聞自當??汝鼻. 空自有聞何關汝入. 是故當知鼻人虛妄. 本非因緣非自然性
  아난아.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그의 콧구멍을 급히 막아 오래동안 호흡을 토해 내지 않아 피로가 일어나면 콧구멍 속 호흡 기운에서 차가운 감촉의 냄새를 맡게 되며, 이같은 차가운 감촉 때문에 다시 콧구멍이 소통하여 비었는지 아니면 콧구멍이 막혀 꽉차있는지를 분별함과 같다. 이같이 소통하고 막힘으로부터 모든 냄새를 맡는 것까지가 콧구멍의 피로협상이며, 뿐만 아니라 콧구멍과 거기에서 일어난 피로까지가 동일하게 보리자성에서 눈을 똑바로 떠서 일어난 피로현상과 같을 뿐이다.
  소통과 막힘이라는 두 종류의 허망한 향진(香塵)과 상대적으로 마주함으로 인해 냄새를 맏는 성질이 일어나 그 향진을 흡취하여 아뢰야식으로 들어감을 냄새를 맡는 성질이라고 한다.
  이처럼 냄새를 맡는 성질이 소통과 막힘에 따른 두 종류의 향진을 떠나면 끝내 따로의 실체라곤 없다. 즉 비입은 원래 자체성질이 없고 단지 비근이 소통하면 냄새를 맡고 막히면 냄새를 맡지 못할 뿐 따로의 실체라곤 없다.
  그러므로 알아야만 한다. 이같은 냄새를 맡는 성질은 소통과 막힘으로부터 요지 않았으며, 비근에서 나오지 않았으며, 허공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다는 것을.
  왜냐하면 가령 소통으로부터 왔다면 코가 막히면 냄새를 맡는 성질을 이미 소통을 따라 함께 소멸하였는데 어떻게 코가 막힘을 알겠으며, 또 코 막힘으로 인해서 냄새 맡는 성질이 있다면 소통하면 막힘과 함께 사라졌으므로 냄새를 맡을 수 없어야만 하는데 어떻게 그 가운데서 냄새 등의 감촉이 분명하게 일어나겠으며,
  또 비근에서 나왔다면 비근은 하나의 자체일 뿐이므로 그곳엔 반드시 막힘과 소통에 따른 두 종류의 향진은 없어야만 한다.
  이처럼 냄새를 맡는 성질은 향진을 상대적으로 의지해야만 하므로 그 근본을 추구하면 비입의 실체는 없다.
  가령 다시 허공에서 나와 모든 냄새를 맡는다면 냄새 맏는 성질이 회전하여 너의 비근 냄새를 맡아야만 하며, 또 허공 자체에 비근의 성질이 없다면 너의 냄새 맡는 비입과 무슨 상관이 있으랴.
  그러므로 알아야만 한다. 인연의 성질도 자연성도 아닌 추구하면 실재하는 인연의 성질도 자연성도 아닌 여래장청정성에서 일어난 망상의 모습일 뿐임을.

《四會舌入 《4. 설입(舌入)을 여래장성으로 융합하다. 
阿難. 譬如有人以舌?吻. 熟甛令勞. 其人若病則有苦味. 無病之人微有甛觸. 由甛與苦顯此舌根不動之時淡性常在. 兼舌與勞同是菩提?發勞相. 因甛苦淡二種妄塵. 發知居中. 吸此塵象. 名知味性. 此知味性. 離彼甛苦及淡二塵畢竟無體. 如是阿難. 當知如是嘗苦淡知. 非甛苦來. 非因淡有. 又非根出. 不於空生. 何以故. 若甛苦來淡則知滅. 云何知淡. 若從淡出甛卽知亡. 復云何知甛苦二相. 若從舌生必無甛淡及與苦塵. 斯知味根本無自性. 若於空出虛空自味非汝口知. 又空自知何關汝入. 是故當知舌入虛妄. 本非因緣非自然性

  아난아.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아무런 까닭없이 혀를 바짝 붙이고 혀가 뜨겁게 핥기를 쉬지 않아 혀를 피로 하게 하면 그 사람이 가령 병이 들면 혀를 핥는 것으로 인해 쓴맛이 있게 되고, 병이 없는 사람은 약간의 단맛이 있는 것과도 같다.
  이처럼 혀를 뜨겁게 핥은 것으로 인해 허망으로 있는 단맛과 쓴맛 때문에 설근의 작용이 나타날지언정 혀를 움직이기 이전엔 담담한 맛이 항상 간직되어 있다.
  이같은 설근의 피로뿐만 아니라 그 설근과 피로까지 동일하게 보리자성에서 눈을 똑바로 떠 일어난 피로 현상과 같을 뿐이다.
  이같은 설입은 담담한 맛을 바탕으로 해서 일어난 쓰고 단맛이이라는 두 종류의 미진(味塵)과 상대적으로 마주함 때문에 맛을 아는 성품이 일어나 이 두 종류의 미진을 흡취하여 아뢰야식으로 들어가는 것을 맛을 아는 성질이라고 한다.
  이처럼 맛을 아는 성질은 달고 쓴맛과 이 두 맛의 바탕이 되는 담담한 맛을 떠나면 끝내 따로의 실체라곤 없다. 이같은 의미를 아난은 알아야만 한다. 이처럼 쓰고 달고 담담한 맛을 아는 성질은 달고 쓴맛에서 오질 않았으며, 또 담담한 맛에서 있지 않으며, 비근에서 나오지 않았으며, 허공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다는 것을.
  왜냐하면 가령 달고 쓴맛에서 왔다면 담담한 맛을 마주하면 담담한 맛을 아는 성품을 소멸해야만 하는데 어떻게 담담한 맛을 알겠으며,
  가령 담담한 맛에서 나왔다면 단맛을 마주하면 단맛을 아는 성품을 없어져야만 하는데 다시 어떻게 달고 쓴 두 맛을 알겠으며.
  또 설근에서 나왔다면 설근은 하나의 자체일 뿐이므로 그곳엔 반드시 달고 담담한 맛과 쓴맛은 없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맛을 아는 설근은 미진을 떠나선 본래 자체 성질이라곤 없다.
  가령 또 허공에서 나왔다면 허공 자체에 맛을 아는 성질이 있으므로 너의 입으로 맛을 아는 것은 아니며, 또 허공자체가 맛을 아는데 무엇 때문에 너의 설입과 상관하랴.
  그러므로 알아야만 한다. 설입은 허망하여 그 근본을 추구해 보면 실재하는 인연성도 아니며 자연성도 아닌 여래장청정성에서 일어난 망상일 뿐임을.

《五會身入 《5. 신입(身入)을 여래장성과 융합하다. 
阿難. 譬如有人以一冷手觸於熟手. 若冷勢多熟者從冷. 若熟功勝冷者成熟. 如是以此合覺之觸顯於離知. 涉勢若成因於勞觸. 兼身與勞同是菩提?發勞相. 因於離合二種妄塵. 發覺居中. 吸此塵象. 名知覺性. 此知覺體. 離彼離合違順二塵畢竟無體. 如是阿難. 當知是覺. 非離合來. 非違順有. 不於根出. 又非空生. 何以故. 若合時來離當已滅. 云何覺離. 違順二相亦復如是. 若從根出必無離合違順四相. 則汝身知元無自性. 必於空出空自知覺何關汝入. 是故當知身入虛妄本非因緣非自然性

  아난아. 비유하면 어떤 일없이 한가한 사람이 한쪽의 차가운 손으로 또 한쪽의 뜨거운 손을 간혹하여, 가령 차가운 세력이 많으면 뜨거운 세력이 차가운 세력을 따르고 또 뜨거운 세력이 능가하면 차가운 세력이 뜨거운 세력쪽을 이루는 것과 같다.
  이처럼 두 손을 합해서 느끼는 감촉은 먼저 분리했다가 합한 뒤에야 지각하게 된다.
  차고 뜨거운 세력이 서로에게 들어가 차고 더운 두 세력이 손에서 형성되는 것은 이 모두가 오랫동안 감촉하여 피로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신입에서 이같은 감촉에 허망으로 일어난 것이다.
  이도 역시 신입과 거기에서 일어난 피로 현상까지 동일하게 보리자성에서 눈을 똑바로 떠서 일어난 피로의 모습과 같을 뿐이다.
  이같은 신입은 먼저 분리하였다가 합한 뒤에 지각하는 두 종류의 허망한 촉진(觸塵)과 상대적으로 마주함 때문에 감촉이 일어나 이 두 종류의 촉진을 흡취하여 아뢰야식 속으로 들어감을 감촉을 지각하는 성품이라고 한다.
  이같이 지각하는 자체는 먼저 분리했다가 합한 뒤에 그 감촉이 나의 감정을 위배하는가. 아니면 나의 감정에 순종하는가 하는 이 둘의 촉진을 떠나선 끝내 그 실체라곤 없다.
  이같은 의미를 지닌 신입을 아난을 알라. 이처럼 지각하는 성품은 분리했다가 합한 데서 오지 않았고, 위배하고 순종하는 두 감정작용에 있지 않으며, 신근에서 나오지 않았고, 역시 허공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다는 것을.
  왜냐하면 가령 위배하고 순종하는 감촉이 합할 때 왔다면 분리하면 합했던 때를 따라서 이미 소멸하는데 어떻게 합했다간 분리했다는 감촉을 알겠느냐. 내지는 그 감촉에 의한 감정의 위배와 순종도 역시 이와같다.
  이같이 지각하는 자체는 먼저 분리했다가 합한 뒤에 그 감촉이 나의 감정을 위배하는가. 아니면 나의 감정에 순종하는가 하는 이 둘의 촉진을 떠나선 끝내 그 실체라곤 없다.
  이같은 의미를 지낸 신입을 아난은 알라. 이처럼 지각하는 성품은 분리했다가 합한 데서 오지 않았고, 위배하고 순종하는 두 감정작용에 있지 않았고, 신근에서 나오지 않았고, 역시 허공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다는 것을.
  왜냐하면 가령 위배하고 순종하는 감촉이 합할 때 왔다면 분리하면 합했던 때를 따라서 이미 소멸하는데 어떻게 합했다간 분리했다는 감촉을 알겠느냐. 내지는 그 감촉에 의한 감정의 위배와 순종도 역시 이와 같다.
  가령 신근에서 나왔다면 신근은 하나의 자체일 뿐이므로 그곳엔 반드시 분리하고 위배하고 순종하는 네 가지 감촉의 모습은 없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너의 몸으로 하는 지각작용은 원래 자체성질이라곤 없고 요컨대 분리하고 합하고 위배하고 순종하는 네 가지 감촉을 마주해야만 신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허공에서 나왔다면 허공 자체가 지각하고 있는데 너의 신입과 무슨 상관이 있으랴.
  그러므로 알아야만 한다. 신입은 허망하여 그 근본을 추구한다면 실재하는 인연성도 아니고 자연성도 아닌 여래장청정성에서 허망으로 일어난 망상의 모습일 뿐임을.

《六會意入 《6. 의입(意入)을 여래장성으로 융합하다. 
阿難. 譬如有人勞倦則眠. 睡熟便寤. 覽塵斯憶. 失憶爲忘. 是其顚倒生住異滅. 吸習中歸. 不相踰越. 稱意知根. 兼意與勞同是菩提?發勞相. 因於生滅二種妄塵. 集知居中. 吸撮內塵. 見聞逆流流不及地名覺知性. 此覺知性離彼寤寐生滅二塵畢竟無體. 如是阿難. 當知如是覺知之根. 非寤寐來. 非生滅有. 不於根出. 亦非空生. 何以故. 若從寤來寐卽隨滅. 將何爲寐. 必生時有滅卽同無. 今誰受滅. 若從滅有生卽滅無. 請知生者. 若從根出寤寐二相隨身開合. 離斯二體此覺知者同於知華畢竟無性. 若從空生自是空知何關汝入. 是故當知意入虛妄. 本非因緣非自然性

 아난아. 비유해 보자. 어떤 사람이 그 의지가 조급하고 피로한 상태가 지나쳐 권태로운 지경에 이르면 잠을 자고 싶어 하고 잠을 깊이 자고 나면 문득 잠에서 깨어나서 목전에 사물을 보면 기억해 알지만 그러나 잠을 자면 그 기억을 잃는다.
  이는 의입의 잊음엔 각자 생주이멸(生住異滅)이 있는데. 이를 흡취하여 훈습하는 기운이 아뢰야식으로 들어가면서 전념과 후념이 찰나찰나에 서로를 넘지 못함을 의지근(意知根)이라고 말한다. 이 의지근과 거기에서 일으킨 피로는 동일하게 보리자성에서 눈을 똑바로 떠 일어난 피로의 현상과 같을 뿐이다.
  이같이 찰나찰나 정지함 없이 생멸하는 두 종류 허망한 법진(法塵)을 마주함 때문에 의식의 앎이 안으로 법진을 흡취하고 묶어 아뢰야식 속으로 들어가면서 육식분별인 견문각지가 단지 안으로 역류하여 의식 속에서 만 흐를 뿐 제8식엔 육식분별이 도달하지 못함을 지각하는 성품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같이 지각하는 성품은 잠을 자고 깨어남을 따라서 생멸하는 두 법진을 마주함을 떠나선 끝내 실체가 없다.
  의입의 의미가 이와같다. 아난아. 알아야만 한다. 이같이 지각하는 의근은 잠을 자고 깨는 데서 오지 않았으며. 생멸로 해서 있지 않으며, 의근에서 나오지 않았으며. 역시 허공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가령 잠을 깬 데서 왔다면 잠이 들 땐 이미 잠 깬 상태를 따라서 소멸하였는데 무엇을 가지고 잠을 잔다 하겠으며.
  반드시 망상이 일어나는 모습[生相]에서 있다 한다면 망상이 사라지는 모습[滅相]이 나타나면 망상이 일어나는 모습과 이미 함께 사라졌는데 무엇으로 망상이 사라지는 모습을 받아들이게 하겠으며.
  반드시 망상이 일어나는 모습[生相]에서 있다 한다면 망상이 사라지는 모습[滅相]이 나타나면 망상이 일어나는 모습과 이미 함께 사라졌는데 무엇으로 망상이 사라지는 모습을 받아들이게 하겠으며.
  가령 망상이 사라지는 모습에 있다면 망상이 일어나는 모습이 나타나면 망상이 사라지는 모습과 이미 함께 사라져 없는데 누가 일어나는 망상의 모습을 알겠으며.
  가령 의근에서 나왔다면 의근은 몸이 잠을 깨면 활동이 열리고 잠을 자면 활동이 닫히므로 자고 깨는 이 두 자체를 떠나면 지각하는 성품은 본래 없는 허공 꽃과 같아 의근은 끝내 따로의 체성이 없으며.
  또 허공에서 일어났다면 허공 자체가 지각해 아는데 무엇 때문에 너의 의입과 상관하랴.
  그러므로 알아야만 한다. 의입은 허망하여 그 근본을 추구하면 실재하는 인연성도 아니고 자연성도 아닌 여래장청정심에서 일어난 망상의 모습일 뿐임을.

[要義] 기억하면 일어나고[生] 잊으면 사라지고[滅] 일어나는 법이 잠시 머무는 것을 주[住], 머문다 해도 오래 있지 않음을 이[異]라고 하는데, 이를 일념사상(一念四相)이라고 한다.
  이같은 생주이멸사상을 흡수하고 하나로 묶어 의식 안에서 법진이 구성된다. 이는 앎에서 열거 했던 오진(五塵) 각자의 인식처럼 외부에서 오지 않았다.
  육경ㆍ육근ㆍ육식 이 셋은 유식(唯識)의 변화일 뿐이다.
  그리고 의식은 생멸하는 모습을 흡수하여 안으로 법진을 삼을 뿐이데, 그곳에 무슨 실재하는 법이 있으랴.
  보고 듣는 등의 작용을 일으키는 전오근(前五根)도 밖으로 순류하면서 오진경계를 인식하나 지금의 의근은 밖으로 오진경계를 인식하나 지금의 의근은 밖으로 오진경계를 직접 인식하지 않고 단지 전오근이 밖에서 인식한 오진의 그림자를 의식 안에서 분별하면서 생멸이 정지하지 않는다. 이 때 그 법진을 낙사영자(落謝影子)라고 한다. 그 때문에 안으로 역류한다 하였다.
  생멸하는 법진은 단지 의근으로 들어 갈 뿐 제팔식 본체는 육근분별의 작용이 도달하지 못하므로 그곳은 육식분별이 도달하지 못한다.
  이상으로 육입이 낱낱이 여래장성에서 일어난 실체 없는 허망한 모습일 뿐임을 논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