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능엄경(楞嚴經)

능엄경 강의 10 / 송찬우 교수

通達無我法者 2007. 11. 28. 10:43
 
 
 
능엄경 강의 10
 
   
 
△ 四拂跡入玄以顯眞如絶待分二
◈ 初世尊特示 
阿難. 汝雖先悟本覺妙明性非因緣非自然性. 而猶未明如是覺元非和合生及不和合

△ 4. 자취를 쓸어 내고 현묘한 이치로 깨달아 들어감으로써 상대성이 끊긴 진여를 두 분야로 나타내다.

◈ 1. 세존께서 특별히 보이시다. 
 “아난아. 네가 비록 먼저 본가묘명성은 인연화합의 모습이 아니며, 자연의 성질도 아님을 깨닫긴 하였었다. 그러나 이같은 근원적인 본각은 인연화합으로 일어나지 않지만 그렇다고 인연화합으로 일어나지 않은 성질도 아님까진 아직도 분명히 밝히지 못하였다.”

◈ 二重拂妄計分二
 
《初破和合
阿難. 吾今復以前塵問汝. 汝今猶以一切世間妄想和合諸因緣性而自疑惑. 證菩提心和合起者. 則汝今者妙淨見精爲與明和. 爲與暗和. 爲與通和. 爲與塞和. 若明和者. 且汝觀明. 當明現前何處雜見. 見相可辯雜何形像. 若非見者云何見明. 若卽見者云何見見. 必見圓滿何處和明. 若明圓滿不合見和. 見必異明. 雜則失彼性明名字. 雜失明性和明非義. 彼暗與通及諸?塞亦復如是. 復次阿難. 又汝今者妙淨見精爲與明合. 爲與暗合. 爲與通合. 爲與塞合. 若明合者. 至於暗時明相己滅. 此見卽不與諸暗合云何見暗. 若見暗時不與暗合. 與明合者應非見明. 旣不見明. 云何明合了明非暗. 彼暗與通及諸?塞亦復如是

◈ 허망한 헤아림을 거듭 쓸어 내기를 두 분야로 하다.

《1. 화합상을 논파하다.
“아난아. 나는 지금 다시 목전에 나타난 밝음(明)?어두움(暗)?허공(空)?물질(色), 이 네 종류의 인연으로 너에게 묻겠다.
  너는 지금도 오히려 모든 망상의 인연으로 화합한 일체의 세간에서 스스로 의혹을 일으키기를 깨달음을 성취할 보리의 마음까지도 인연화합식 즉 제팔아뢰야식으로부터 일어난다고 여기고 있다.
  그렇다면 너는 지금 묘정견정(妙淨見精)을 추리해 보라. 그 견정이 광명의 인연과 화합하느냐. 어두움의 인연과 화합하느냐. 공간이 통하는 허공의 인연과 화합하느냐. 공간을 막는 물질과 인연으로 화합하느냐.
  가령 너의 견정이 대상을 바라 볼 때 그 광명과 인연으로 화합한다면 네가 눈을 뜨고 광명을 바라 볼 때 그 광명이 목전에 나타나면 광명의 어느 곳에 너의 견정이 그 인연과 화합하더냐.
  너의 견정과 보이는 광명의 모습이 아직 화합하지 않았을 땐 분명하게 지적하지 못하겠지만 그러나 광명을 마주하면 이를 분별할 수는 있다. 그 광명의 모습은 어느 곳으로부터 너의 견정과 화합하더냐.
  지금 보는 성품과 보이는 광명의 이들 두 모습이 뒤섞여 화합한다면 너의 견정은 보는 성품을 잃게 되고, 광명도 그 자체 성질을 잃게 되는데 그렇다면 뒤섞여 화합한 꼴이 다시 어떤 형상이겠느냐.
  일반적으로 사물이 뒤섞여 화합하려면 그 전제로 서로가 다른 성질이어야 하는 조건이 충족돼야만 한다.
  가령 광명의 모습이 목전에 나타났을 때 그것은 견정의 성질이 아니라면 광명은 견정과 다른 것이며, 견정도 광명과 다른 성질이므로 이 둘은 각자 한쪽 방향에 따로 거처하여 서로가 서로를 전혀 몰라야만 하는데도 지금 어떻게 목전의 광명을 볼 수 있겠느냐.
  만일 목전에 나타난 광명이 바로 너의 견정이라고 한다면 광명이 바로 너의 견정이고 견정이 이미 광명의 모습인데 어떻게 너의 견정이 다시 광명과 하나로 화합한 견정을 마주 보겠느냐.
  이와 같다면 견정과 광명이 서로 다른 성질이라 해도 안되고, 서로 합한다 해도 안되는 데, 다시 무엇을 따라서 이 둘이 인연성으로 화합하겠느냐.
  가령 견정이 광명 속으로 들어간다 해도 그 견정 자체는 잃지 않은 채 광명이 모습과 함께 원만하다면 그렇다면 견정 아닌 곳이 없는데, 어느 곳에서 광명의 모습을 따로 용납하여 그 광명과 화합하겠느냐.
  만일 다시 광명이 원만하다면 광명의 모습 아닌 곳이 없는데 어느 곳에 견정을 용납하겠느냐. 따라서 그 광명은 견정과 화합한다 함이 온당하질 않다.
  견정은 반드시 견정일 뿐이고, 광명은 반드시 광명일 뿐이어서, 이 두 모습은 각자 서로 다르다하자. 이같이 서로 다른 두 성질이 하나로 뒤섞이고 화합한다면 견정과 광명이라는 명자를 잃게 되므로 이 둘이 하나로 뒤섞여 화합하면 광명의 모습과 견정의 성품까지 모두를 잃게 된다. 때문에 광명과 견정이 화합한다는 의미가 옳지 않게 된다.
  나머지 어두움과 공간의 통함과 모든 물질의 막힘까지도 광명과의 화합과 같은 논리도 논파된다.
  다음으로 아난아. 또 지금 너의 오묘하고 청정한 견정이 광명과 인연으로 화합하느냐. 어두움과 화합하겠느냐. 공간의 통함과 화합하겠느냐. 물질의 막힘과 화합하겠느냐.
  너의 견정이 이미 광명과 하나로 화합했다면 어두움이 다가올 땐 광명의 모습은 이미 사라졌으므로 견정 역시 그 광명을 따라서 소멸하므로 모든 어두움과 화합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어두움이 찾아와도 어떻게 다시 그 어두운 모습을 볼 수 있겠느냐.
  가령 어두움을 본다해도 이 때 어두운 모습과 화합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미 어두움을 볼 때 화합하지 않았으므로 반드시 화합할 땐 보지 못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앞에서 말했던 광명과 화합한다함도 광명을 보지 못해야만 한다. 이미 광명을 보지 못했다면 어떻게 견정이 광명과 화합한다하겠으며, 또 어떻게 이것은 광명일지언정 어두움이 아님을 명료하게 알겠느냐.
  광명의 모습뿐만 아니라. 나머지 어두움과 공간의 통함과 모든 물질의 막힘까지도 역시 광명의 예로써 논파된다.”

《二破不和合
阿難白佛言. 世尊. 如我思惟. 此妙覺元與諸緣塵及心念慮非和合耶. 佛言. 汝今又言覺非和合. 吾復問汝. 此妙見精非和合者. 爲非明和. 爲非暗和. 爲非通和. 爲非塞和. 若非明和. 則見與明必有邊畔. 汝且諦觀何處是明. 何處是見. 在見在明自何爲畔. 阿難. 若明際中必無見者則不相及. 自不知其明相所在畔云何成. 彼暗與通及諸?塞亦復如是. 又妙見精非和合者. 爲非明合. 爲非暗合. 爲非通合. 爲非塞合. 若非明合. 則見與明性相乖角. 如耳與明了不相觸. 見且不知明相所在云何甄明合非合理. 彼暗與通及諸?塞亦復如是

《2. 인연과 화합하지 않는다 함을 논파하다. 45. 아난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제가 생각하기로 이 오묘한 본가 근원심이 이미 인연화합이 성립하지 않는다면 모든 목전의 인식대상인 상분경과 주관분별심인 견분심에 화합하지 않는 의미가 성립한다 하겠습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너는 지금 다시 말하기를 본가자체는 견분?상분과 인연으로 화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다시 너에게 묻겠다.
  이 오묘한 견정이 인연과 화합하지 않는다면 광명과 화합하지 않겠느냐. 어두움과 화합하지 않겠느냐. 공간의 통함과 화합하지 않겠느냐. 물질의 막힘과 화합하지 않겠느냐.
  너의 견정이 광명과 화합하지 않는다면 그 견정과 광명은 반드시 각자의 모습으로서 자체상의 한계가 있어야 만 한다.
  너는 그 견정과 광명의 자체상 한계에서 자세히 관찰해 보라.
  어느 곳까지가 광명의 모습이며, 어느 곳까지가 견정의 모습이더냐.
  견정과 광명에 있어서 어디로부터 한계선을 긋겠느냐.
  아난아. 광명의 한계에선 견정의 한계는 필연적으로 없다면 견정과 광명은 각자의 자체 한계가 따로 있으므로 서로가 서로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이처럼 이미 각자가 상대방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견정은 광명의 소재처를 몰라야 하는데, 견정의 한계선이 다시 무엇을 상대해서 성립하겠느냐.
  나머지 어두움과 공간의 통함과 모든 물질의 막힘까지도 역시 이 예로써 논파된다.
  또 오묘한 견정은 인연과 화합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 견정은 광명과 화합하지 않느냐. 어두움과 화합하지 않느냐. 공간의 통함과 화합하지 않느냐. 물질의 막힘과 화합하지 않느냐.
  가령 견정이 광명과 화합하지 않는다면 견정과 광명이 그 성질과 모습이 이근(耳根)과 광명이 서로 마주 감촉하지 않음과 같을 것이다. 따라서 견정으로 본다 해도 광명의 소재처를 몰라야 하는데 어떻게 견정이 광명과 화합한다. 또는 화합하지 않는다 한 도리를 분별하겠느냐.
  나머지 어두움과 공간의 통함과 모든 물질의 막힘도 역시 이 예로써 논파된다.

[要義] 앞에서 이미 열어 보였던 인위적인 시각(始覺) 공부가 있어야만 진여본각(眞如本覺)이 나타난다 함은 보리의 마음이 일어남과 동시에 생멸망심이 사라진다 하는 경우인데, 이도 역시 생멸심에 속한다. 왜냐하면 이는 아직도 보리심과 생멸심이 상대적인 의존관계를 이루기 때문이다.
  아난은 앞에서 화합의 의미를 아직 분명히 몰랐었다. 앞에선 수행의 시각공부가 본각에 합하는 것을 최후의 깨달음인 구경각이라고 하였다. 아난은 이 점을 두고 생각하기를 보각진심도 역시 시각과 합해서 일어난다고 생각했음직하다.
  그 때문에 여기에서 아난의 이같은 잘못된 생각을 거듭 쓸어내고 절대 진심을 나타냄으로써 시각수행과 보각진심의 상대적 의존관계가 동시에 단절하게 하였다. 그런 뒤에야 진여일심의 경지에 오묘하게 일치할 수 있다. 때문에 이 과목을“拂跡入玄”이라고 하였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여기에서 말하는“和合”은 진여일심의 편에서 시각수행심을 구별하였으므로 앞에서 화합식을 타파하여 허망한 헤아림을 구별한 것과는 동일하지 않다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오묘하고 청정한 견정(見精)이 모든 인식대상경계와 화합을 한다던가. 아니면 화합하지 않는다 한 이 두 관점 모두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제8식 자체분인 견정도 시비를 벗어났는데 하물며 증자증분인 묘각진심을 시비화합으로써 헤아릴 수 있겠는가.
  생멸하는 망상심과 생멸하지 않는 진심이 화합하여 제8아뢰야식이 형성되었다. 때문에 지금 이같은 화합제8식을 타파한다면 모든 망상이 다하여 시각이 본각에 합함으로써 시각수행과 본각지가 상대적 의존관계가 끊긴 절대진심으로 나타나게 된다. 여기에 이르러야 적멸일심이 환하게 나타나게 된다.
  이상으로 생멸문의 편에서 진심과 망심을 구별하여 본각진심을 나타내는 일은 끝냈다.

? 二約不生不滅會妄歸眞以顯眞空如來藏性分二 ? 初直指一心
阿難. 汝猶未明一切浮塵諸幻化相當處出生隨處滅盡. 幻妄稱相. 其性眞爲妙覺明體. 如是乃至五陰六入從十二處至十八界. 因緣和合虛妄有生. 因緣別離虛妄名滅. 殊不能知生滅去來本如來藏常住妙明不動周圓妙眞如性. 性眞常中. 求於去來迷悟生死了無所得

? 2. 불생불멸하는 진여일심의 편에서 망심을 진심으로 귀결시킴으로써 진공여래장성을 두 분야로 나타내다.

? 1. 진여일심을 바로 지적하다. 
46. “아난아. 너는 단지 보는 성품에서만 여래장성을 알아차리고 실재하지 않는 육신과 진심을 장애하는 육진경계. 이 모든 허깨비 변화의 모습이 본래 의지하는 자체가 없이 단지 진심을 미혹하여 홀연히 그 자리에서 일어났으므로 왔다해도 온 바가 없으며, 그 자리를 따라서 사라지므로 일어났다 해도 일어남이 없이 본래 스스로 적멸하여 가도 가는 바가 없는 이치까지는 아직 밝히지 못했구나.
  진실이 아닌 허깨비 같은 망상은 단지 허망한 모습일 뿐이라고 말하지만 그 자체 성질을 관찰하면 원래 진실이여서 그 자체를 묘각명체(妙覺明體)라고 한다.
  이처럼 모습은 허망하나 그 자성은 원래 진실하여 내지는 오음유입(五陰六入)과 십이처(十二處)와 실팔계(十八界)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은 인연이 화합하여 허망한 모습으로 일어났다간 인연이 분리하여 허망한 모습이 사라진다고들 안다.
  그러나 그들은 생멸 거래하는 허망한 모습들이 그 근본을 추구하면 여래장성이므로 그 성품은 상주하고 오묘하게 밝으며, 요동하지 않고 두루 원만하고 오묘한 진여성임을 전혀 모르고 있다.
  이같은 진여상주의 여래장성에선 거래(去來)ㆍ미오(迷悟)ㆍ생사(生死)의 허망한 모습을 추구해 보아도 끝내 그 실체를 얻을 수 없다.”

[要義] 여기에서는 불생불멸하는 여래장성이 진실한 근원임을 바로 지적하여 진심과 만법을 하나의 이치로 융합하려 하였다.
  진여일심을 미혹함 때문에 불생불멸하는 여래장성이 생멸망상과 화합하여 아뢰야식을 형성하고, 여기에서 다시 견분과 상분의 변화가 일어나 상분은 색법이 되고 견분은 심법이 되었다.
  이리하여 안으로는 오온중생과 밖으로는 허공세계가 형성되어 모든 인식대상으로서의 만법이 모두 여래장성 가운데 나타나게 되었다. 이처럼 진심과 망심이 화합하여 세계와 중생이 이루어진 이치를 모르는 중생들이 허망한 견분과 상분을 실재로 인식하고 그것이 일어난 근본자체인 여래장성 진심을 미혹했기 때문에 끝없는 생사윤회를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아난이 대비심으로서 마등가의 음심에 잘못 떨어진 이유는 오온신심을 진실로 오인한 데서 기인한다. 그 때문에 아난은 특별히 세존께 간청하여 시방여래가 성취한 오묘한 사마타 산마선나에 깨달아 들어갈 수 있는 최초의 수행방편을 열어 보여 주십사고 말씀드렸다.
  이 때문에 세존께선 제일 먼저 오온을 타파하면서 심목(心目)이 그 허물임을 지적하였다. 이처럼 처음부터 지금까지 망심망견(妄心妄見)을 타파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망심망견은 제팔식의 인식작용인 견분심법이며, 인식대상인 육신과 세계로 제팔식의 모습인 상분일 뿐이다. 이것을 근본무명의 모습이라고 한다.
  팔식 견분과 상분이 단지 진심을 미혹해서 일어난 무명의 허상이므로 그들 모습은 있다 해도 그 자체가 본래 공적한 이치임을 명료하게 모른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 점진적으로 상분경계는 우리의 심식 밖에 실제로 있지를 않고 그것을 실재인양 인식하는 망견인 견분도 본래 그 실체가 없음을 밝혀, 견분과 상분을 끊어 식정, 즉 아뢰야식 자증분으로 귀결시키고, 그 식자증분마저 타파하여 시각으로 귀결시키고, 끝내는 시각을 본가일심, 즉 증자증분으로 귀결시킴으로써 공여래장의 실체가 드러나게 했다.
  앞에서 이미 망상을 타파함으로써 나타난 공의 실체는 단지 공 그자체일 뿐 아직은 현실세계인 유(有)까지를 동시에 포함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이 수준에선 아직 진실한 공의 이치는 아니다.
  이같은 이유 때문에 지금에야 오온ㆍ육근ㆍ육진ㆍ팔식ㆍ십팔계와 칠대(七大), 즉 지ㆍ수ㆍ화ㆍ풍ㆍ공(空)ㆍ식(識)ㆍ견(見)까지를 여래장성의 근본으로 융화시켰는데, 이것이 유에 상즉한 공이다.
  이것을 실상진공(實相眞空)이라고 하며, 여기에 이르러야만 대승의 원융한 공여래장의 실제적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같은 실상진공의 원융한 이치를 명료하게 안다면 그 가운데 무슨 생멸 거래하는 허깨비 망상의 모습이 실체적으로 존재하랴.
  가령 망상으로 관찰한다면 생사거래의 차별상이 현실적으로 목전에 있는 듯 하나 올바른 지혜로 관조한다면 진여상주의 여래장성 가운데선 거래ㆍ생사ㆍ미오의 모습을 끝내 얻을 수 없다.
  종전에 망상을 타파하여 나타낸 진공여래장성의 오묘한 극치를 여기에서 다하였다 하겠다.
  다음부터선 오온ㆍ삼과(三科)ㆍ칠대(七大)를 낱낱이 여래장성으로 귀결시켜 진공여래장성의 실체를 극진히 하였다.
  이상으로 진여일심을 바로 지적한 일은 끝냈다.

?二頓融萬法分三 △ 初會三科以顯卽事卽理分四 ◈ 初會五陰 

《一會色陰
阿難. 云何五陰本如來藏妙眞如性. 阿難. 譬如有人以淸淨目觀晴明空. 唯一晴虛逈無所有其人無故不動目睛?以發勞. 則於虛空別見狂華. 復有一切狂亂非相. 色陰當知亦復如是. 阿難. 是諸狂華非從空來. 非從目出. 如是阿難. 若空來者. 旣從空來還從空入. 若有出入卽非虛空. 空若非空自不容其華相起滅. 如阿難體不容阿難. 若目出者. 旣從目出還從目入. 卽此華性從目出故當合有見. 若有見者. 去旣華空旋合見眼. 若無見者. 出旣?空旋當?眼. 又見華時目應無?云何晴空號淸明眼. 是故當知色陰虛妄本非因緣非自然性

? 2. 여래장성과 만법의 융합을 세 분야로 하다.

△ 1. 삼과(三科)를 묶어 즉사즉리(卽事卽理)를 나타내기를 네 분야로 하다.

◈ 1. 오온을 여래장성과 융합하다.

《1. 오온 가운데 색온을 여래장성과 하나의 이치로 융합하다. 
47. “아난아. 무엇 때문에 오온의 근본이 여래장묘진여성이라고 하겠느냐.
  비유하면 여기에 한 사람이 있다 하자. 그 사람은 깨끗하고 좋은 눈[體具正智]으로 밝은 허공을 보면 그 허공은 한결같이 텅빈 광명의 공간일 뿐[本覺妙明心體] 끝내 그 어떤 것도 없었다[理智一如無法可得].
  그러다가 그 사람이 까닭없이 눈을 똑바로 뜨고 눈동자를 움직이지 않아 눈이 피로하게 되면[여래장성을 의지하여 見相二分이 성립] 차별없는 허공에서 차별적인 헛꽃[狂華]이 어지럽게 일어났다간 사라지고, 다시 헛꽃 이외의 모든 광란의 모습까지 보일 것이다[妄心과 妄境을 총체적으로 비유하였다]
  색온도 허공에 헛꽃이 본래 없었던 비유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아난아. 이같은 광란의 헛꽃은 밝은 허공으로부터 오지 않았으며, 그 사람의 눈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아난아. 이같은 헛꽃이 허공에서 왔다면 이미 허공에서 왔으므로 다시 허공으로 되돌아 들어가야만 한다. 가령 이처럼 출입이 있다면 그것은 허공이 아니다. 허공이 실제로 텅 빈 허공이 아니라면 자연히 헛꽃이 광란으로 일어났다간 사라지는 모습을 용납하지 못하기를 아난의 몸에 아난을 받아들이지 못함과 같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미 출입할 안과 밖이 있다면 이는 실재하는 사물이지 텅 빈 공간으로서의 허공은 아니기 때문이다.
  허공의 헛꽃이 허공에서 나오지 않고 그 사람의 눈에서 나왔다면 이미 눈에서 나왔으므로 사라질 때도 역시 눈으로 다시 들어가야만 한다.
  바로 이 헛꽃의 자체는 눈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 헛꽃엔 사물을 볼 수 있는 성질이 있어야만 하며, 가령 볼 수 있는 성질이 있다면 눈을 떠나서 이미 허공만 가릴 뿐이라면 눈에서 나와 이미 허공을 가리었으므로 되돌아오면 당연히 그 눈도 가리어야만 하리라.
  또 가령 이 꽃이 이미 눈에서 나왔다면 헛꽃이 나오고 나서 그 눈으로 헛꽃을 볼 때 그 눈엔 가리움이 없다. 이처럼 이미 가리움이 없다면 그 눈은 이미 깨끗하고 좋은 눈인데 무엇 때문에 헛꽃이 없는 밝은 허공을 볼 때만 깨끗하고 밝은 눈이라고 하겠느냐.
  헛꽃은 허공에서 오지 않았고, 즉 원인 없이 자연으로 오지 않았고, 눈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즉 인연화합으로 있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색온은 일념이 허망하게 요동하여 일어났을 뿐 그것은 본래 인연화합으로 있는 것도 아니며, 자연의 성질로 있는 것도 아님을 안다면 바로 그 자리가 여래장성진심이다.
  즉 일어나도 일어난 실체가 없으므로 화합의 인연이 아니며, 일어난 실체 없이 일어났음으로 화합의 자연성 아님도 아니며, 그 근본은 바로 여래장성일 뿐이다. 본래 실체 없는 색온이 중생이 지은 허망한 업을 따라 발현했을 뿐이다.

《 二會受陰
阿難. 譬如有人手足宴安百骸調適. 忽如忘生性無違順. 其人無故以二手掌於空相摩. 於二手中妄生?滑冷熟諸相. 受陰當知亦復如是. 阿難. 是諸幻觸不從空來. 不從掌出. 如是阿難. 若空來者. 旣能觸掌何不觸身. 不應虛空. 選擇來觸. 若從掌出應非待合. 又掌出故合則掌知離則觸入. 臂腕骨髓應亦覺知入時?跡. 必有覺心知出知入. 自有一物身中往來何待合知要名爲觸. 是故當知受陰虛妄本非因緣非自然性

《 2. 여래장과 수온을 하나의 이치로 융합하다.
 “아난아. 비유하면 어떤 사람의 손과 발이 편안하고 몸도 쾌적하여 홀연히 삶의 무게를 잊은 듯 기분 나쁜 감성도 좋은 느낌도 없다가 그 사람이 아무런 까닭 없이 허공에서 두 손뼉을 마찰하면 두 손별 가운데서 깔끄러운 느낌[三途苦受]ㆍ부드러운 느낌[人天樂受]ㆍ차거운 느낌[二乘枯受]ㆍ뜨거운 느낌[權乘榮受]인 이 모든 모습들의 감정이 허망하게 일어난다.
  수음도 역시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아난아. 이 모든 허깨비와 같은 감촉은 허공에서 오지 않았으며 손뼉으로부터 나오지도 않았다. 아난아. 가령 이같은 감촉들이 가령 허공에서 왔다면 이미 신체의 한 부분인 손뼉을 감촉했는데 어떻게 몬 전체에 감촉하지 않았겠느냐. 그리고 허공은 분별심이 없기 때문에 허공이 선택적으로 찾아와 손뼉만을 감촉하진 않을 것이다.
  가령 손뼉이 하나로 합하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두 손뼉이 합하지 않았을 땐 무엇 때문에 차고 더운 등의 느낌이 없다가 반드시 두 손뼉을 합해서 마찰하기를 기다려서야 감촉이 나오겠느냐.
  또 그 감촉이 이미 손뼉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이 손뼉이 합할 땐 그 손뼉이 그 감촉이 나온다는 것을 알아야만 하며, 다시 두 손뼉이 분리하면 손뼉은 그 감촉이 손뼉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손뼉이 그 감촉이 들어가는 것을 이미 알았다면 손뼉과 연결된 팔뚝과 골수까지도 손뼉으로 들어 갈 때의 종적을 알아야만 하는데 무엇 때문에 모르겠느냐.
  팔뚝과 공수 가운데 반드시 지각하는 마음이 있어 감촉이 나오고 들어가는 것을 안다면 하나의 물건이 몸속에서 왕래하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두 손뼉이 합하기를 기다렸다가 그것을 알고 나서야 감촉이라고 부르겠느냐.
  그러므로 수음은 허망하여 본래 인연성도 아니며 자연성도 아님을 안다면 바로 그 당체가 진실한 여래장성이다.”

《 三會想陰
阿難. 譬如有人談說酢梅. 口中水出. 思?懸崖足心酸?. 想陰當知亦復如是. 阿難. 如是酢說不從梅生. 非從口入. 如是阿難. 若梅生者. 梅合自談何待人說. 若從口入. 自合口聞何須待耳. 若獨耳聞. 此水何不耳中而出. 想?懸崖與說相類. 是故當知想陰虛妄本非因緣非自然性

《 3. 여래장성을 상음과 하나의 이치로 융합하다. 
49. “아난아.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신맛을 내는 매화를 말하면 입 속에서 침이 나오고 깎아 지른 듯한 절벽 끝을 밟는 생각만 해도 발바닥에 사그라운 느낌이 든다. 상음도 역시 이같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즉 일념이 허망하게 요동하여 본래 없던 상음이 일어난 것이다.
  아난아. 이처럼 신맛을 말해서 입에서 나온 침은 매화자체의 신맛에서 나오지 않았고 역시 입으로 들어갔다가 나오지도 않았다.
  아난아. 이처럼 가령 매화의 신맛에서 침이 나왔다면 매화자신이 말하여 자체에서 나올 것이지 무엇 때문에 사람이 말하기를 기다린 뒤에야 입 속에서 나왔겠느냐.
  가령 입으로 들어가서 나왔다면 신 매화 맛의 말을 듣는 자기의 입으로 들어야만 하는데 무엇 때문에 귀를 의지해서 매화의 신맛에 대한 말을 듣겠느냐.
  만일 유독 귀만으로 매화가 시다는 말을 듣는다면 그 침은 무엇 때문에 귀 속에서 나오지 않았겠느냐.
  절벽 끝을 밟는다는 생각은 신 매화를 단론하는 것과 서로 비교하면 알리라.
  그러므로 상음은 허망하여 본래 인연성도 아니고 자연성도 아님을 안다면 바로 그 자체가 여래장성진심일 뿐이다.”

《 四會行陰
阿難. 譬如暴流波浪相續. 前際後際不相踰越. 行陰當知亦復如是. 阿難. 如是流性不因空生. 不因水有. 亦非水性. 非離空水. 如是阿難. 若因空生. 則諸十方無盡虛空成無盡流世界自然俱受淪溺. 若因水有. 則此暴流性應非水. 有所有相今應現在. 若卽水性. 則澄淸時應非水體. 若離空水. 空非有外水外無流. 是故當知行陰虛妄本非因緣非自然性

《 4. 여래장성을 행온과 하나의 이치로 융합하다. 
50. “아난아. 비유하면 빠른 물살의 파장이 전후로 상속하면서 앞 파도와 뒷 파도가 서로를 추월하지 않듯 행음도 역시 이 같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아난아. 이같은 폭포수의 흐름은 허공을 의지해서 일어나지 않았으며, 물로 인해서 있지도 않으며, 역시 물의 본성도 아니며, 그렇다고 허공과 물의 본성을 떠난 밖에 폭포수의 흐름이 따로 있지도 않다.
  이처럼 아난아. 가령 허공에서 일어났다면 모든 시방세계의 다함없는 허공이 다함없는 폭포수의 흐름을 이루어 세계는 자연히 모두 함께 물에 빠져야만 한다. 그러나 허공은 다함이 없으나 폭포수의 흐름은 다함이 있으므로 허공을 의지해서 일어나지 않았음이 분명하듯 진여는 다함이 없으나 행음은 다함이 있다는 것이 명료하다.
  만일 물의 본성을 의지해서 있다면 폭포수의 흐름은 물의 본성은 아니다.
  물의 본성과 그 본성에 소유한 폭포수의 모습이 지금 현재 물의 본성으로 인해 있다면 가령 이럴 경우 폭고수의 흐름이 바로 물의 본성이라면 물의 본성이 이미 폭포의 탁류로 자체성질을 삼게 되는데, 그렇다면 물이 깨끗할 땐 반드시 물의 실체가 아니여야만 한다.
  만일 허공과 물의 본성을 떠난 밖에 따로의 모습으로 폭포수의 흐름이 있다면 허공은 안과 밖의 모습이 있질 않으며, 물의 본성 밖에 따로 폭포수의 흐름도 없다.
  따라서 행음은 여래장인 하나의 모습도 아니고 역시 단정적인 두 모습도 아니다.
  진여일심이 일념허망으로 요동하여 아뢰야식을 이루고, 다시 경계의 바람에 요동하여 행음말나식을 이루었다면 여래장성을 떠난 밖에 따로의 행음법이란 없다.
  그러므로 행음은 허망하여 본래 인연화합성도 아니며 자연성도 아님을 안다면 바로 그 자체가 여래장성진심이다.”

《 五會識陰
阿難. 譬如有人取頻伽甁塞其兩孔滿中擎空. 千里遠行用餉他國. 識陰當知亦復如是. 阿難. 如是虛空非彼方來. 非此方入. 如是阿難. 若彼方來. 則本甁中旣貯空去. 於本甁地應少虛空. 若此方入. 開孔倒甁應見空出. 是故當知識陰虛妄本非因緣非自然性

《 5. 여래장성과 식온을 하나의 이치로 융합하다. 
“아난아. 비유하면 어떤 사람[善惡業力]이 빈가병[無明根身]을 가지고 양쪽의 구멍을 꼭 막고 그 병 속에 가득한 허공[無明根身中에 변치 않는 진여일심]을 높이 쳐들고 천리의 먼 길을 떠나 다른 나라에 공급하는 것과도 같다.[금생의 수명이 다하여 다시 후생으로 태어남을 비유함.]
  식음도 역시 이처럼 진심과 망심이 화합하여 아뢰야식을 이루었음을 알아야만 한다.
  아난아. 빈가병 속의 허공은 저쪽 방향에서 이쪽으로 오지 않았으므로 이 방향으로 새삼 들어 간 것도 아니다.
  이처럼 식온의 성질은 거래의 모습이 없다. 즉 진여장성은 본체를 요동하지 않은 체 현재생멸의 인연을 따라 업식과 근신 가운데 있다 해도 그곳에서 생멸거래의 모습을 얻을 수 없다.
  이처럼 아난아. 허공이 가령 저쪽 방향에서 왔다면 본래 병이 있던 곳에서 이미 허공을 저장하여 떠났으므로 본래 병이 있던 곳엔 병에 저장한 만큼의 허공이 부족해야만 하며, 만일 이쪽 방향으로 들어왔다면 이곳에서 병의 양쪽 업을 열고 병 속의 허공을 쏟아낼 때 허공이 나오는 모습을 보아야만 한다.
  그러나 병속의 한계있는 작은 허공과 병 밖의 무한히 광대한 허공은 본래 두 모습이 없으며, 서로의 간격도 없고, 역시 부족함도 남음도 없다. 단지 그 병을 부수기만 한다면 즉 무명의 껍질을 깨기만 한다면 광대무진한 한 덩어리의 허공일 뿐이다.
  그러므로 식음은 허망하여 본래 인연성이 아니며, 역시 자연성도 아님을 안다면 바로 그 당체가 어래장성 진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