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우주의 생명자리, 진여불성의 자리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천지우주 모두가 부처 아님이 없다 『육조단경』에 보면 불성ㆍ자성에 관한 말씀이 일백 군데가 넘습니다. 불성ㆍ자성에 대해서 얼마나 역설을 하셨기에 그렇겠습니까. 우리는 그 자리를 잊어버리고 삽니다. 따라서 불성자리, 자성자리, 본래면목 자리, 그 자리를 여의지 않고 공부해야 비로소 참선이 됩니다. 화두를 참구(參究)한다 하더라도 그 자리를 여의지 않고 참구를 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선 이치로 '천지우주 모두가 다 진여불성뿐이다'라고 생각할 때 나와 남의 구분이 없습니다. 불성이라는 것은 나와 남의 자리를 구분한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하나의 생명자리란 말입니다. 그 진여불성 외에 다른 것은 없는 자리입니다. 다른 것이 있다는 것은 우리 중생이 근원을 못 본 채 가상적인 상만 봐서 그럽니다. 『금강경』을 보나 『반야심경』을 보나 모두 제법공(諸法空)이고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 원래 물질이란 것은 있지를 않습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모두가 마음뿐이란 말입니다. 물질은 본래 없다는 것입니다. 물질은 본래 없다는 말을 가장 명백하니 말씀한 분이 부처님 아닙니까? 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보다도 훨씬 먼저 태어나신 파르메니데스, 헤라클레이토스 같은 분들도 역시 실존이 무엇인가, 우주가 무엇인가, 로고스가 무엇인가, 그런 말씀을 했습니다. 17세기의 철학자 스피노자 역시 굉장히 위대한 분입니다. 다락방에서 안경알을 닦으며 자기 생계를 유지해 가면서 철학체계를 세웠습니다. 그분의 체계원리가 무엇이냐 하면 범신론(汎神論)입니다. 우선 불자님들, 철학을 깊이있게 들어가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일신론과 범신론의 차이는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 사상은 범신론에 입각해 있기 때문입니다. 동양사상은 대부분 그렇습니다만 부처님 사상은 특히 철저합니다. 기독교신학에서는 이 범신론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브루노라는 분은 16세기의 위대한 천주교 수사입니다. 공부를 많이 한 분이기 때문에 당시 기독교에서 주장했던 것, 즉 일신론과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는 식의 이론을 반대했습니다. 저는 하도 비참해서 연대를 외우고 있어요. 1600년 2월에 그분은 불태워져 죽었습니다. 부처님 사상은 모두가 다 부처 아님이 없다는 이른바 범신론입니다. 다행히 기독교인 중에서도 이단시당하거나 심판을 받으면서도 범신론을 말하는 분들이 많이 있었어요. 15세기 니콜라우스 쿠사누스나 19세기 슐라이어마허 같은 분들은 기독교인인데도 당당히 범신론을 주장하신 분들입니다. 우리가 부처님 가르침을 믿고 따른다면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불이법문(不二法門)이라, 부처님 법문은 모두가 다 둘이 아닌 법문입니다. 모든 원리가 둘이고 셋이면 우리 마음이 안정되겠습니까? 오직 하나로 통일되어야 우리 마음이 가다듬어지고 안정이 되겠지요. 부처님 가르침은 일체 존재가 신 아님이 없고, 부처 아님이 없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 가르침은 차근차근 우주를 통일해 갈 것입니다.
진여불성 자리에 마음을 두면 모든 행동이 다 참선이 된다 우리가 부처님 공부를 하는 데 있어서 여러 가지 경계가 많지 않습니까? 우리 중생이 보고 들은 것이 많아서 그때그때 가만히 앉아 있으면 별의별 경계가 다 나옵니다. 그러나 경계라 하는 것은 사실 허망한 것입니다. 부처님 모양을 하는 경계도 나올 수 있는 것이고, 관세음보살과 같은 경계도 나올 수가 있고, 또 광명(光明)도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들은 모두가 다 허망한 것입니다. 비교적 더 좋고 나쁜 것은 있겠지요. 그러나 좋고 나쁘다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지 허망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경계가 나오든지 간에 제아무리 재미스럽고 환희스러운, 그야말로 광명찬란한 것이 나온다 하더라도 그런 것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집착하면 되레 악화됩니다. 그래서 집착은 하지 말고 근원적인 생명의 본래자리, 한도 끝도 없는 진여불성의 그 자리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 자리가 바로 무량광불 자리고 진여불성 자리며,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의 자리입니다. 우리의 불성 가운데는 자비나 지혜가 원만하고 충만합니다. 따라서 우리 불성을 자비로운 쪽으로 보면 관세음보살이고, 지혜로운 쪽으로 보면 문수보살이고, 또 전체로 보면 아미타불인데, 모두가 다 우리 불성공덕입니다. 불성공덕이 한도 끝도 없이 많아서 그와 같이 여러 갈래로 이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본래의 자리는 똑같이 우주의 근본자리, 일미평등한 진여불성 자리입니다. 일미평등한 그 진여불성 자리에다가 마음을 두고 공부를 해야 우리가 근본을 안 떠나게 되고, 비로소 참선이 됩니다. 똑같은 나무아미타불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단순히 복을 비는 자세에 얽매인 채 상에 걸리면 그때는 참다운 염불이 되지 못합니다. 같은 염불도 염불참선이라, 염불인 동시에 참선이 되기 위해서는 천지우주의 생명자리, 진여불성 자리를 안 떠나고 염불을 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염불인 동시에 염불참선입니다. 화두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기독교를 오랫동안 믿은 분들은 진여불성 자리를 하느님이라 생각하고 '오 주여' 하면서 공부해도 되지요. 그것 역시 하나의 참선이 됩니다. 꼭 불교적인 이름만 붙여야 참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생명의 본래고향 자리, 모든 존재의 근원자리, 거기에다가 마음을 두면 그때는 화두를 드나 화두를 안 드나, 염불을 하나 주문을 하나 다 참선이란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그와 같이 아무런 벽이 없습니다.
"껍데기 지혜로는 생사를 못 면하니..." 진여불성 자리는 우리 생명의 고향입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와서 거기로 갑니다. 업을 많이 지으면 더디 가고, 윤회전생을 많이 하겠지요. 우리 업이라는 것은 수백 겁 지나도 우리가 보상해야 합니다. 그 업 가운데서 먹는 것과 이성간에 사귀는 것, 그것을 꼭 떼어야 업이 녹아서 윤회를 하지 않고 해탈로 갑니다. 우리 선배들 가운데 그런 깊은 삼매에 못 들어서, 알기는 제법 알지만 함부로 행동한 분들이 없지 않아 있어요. 우리는 그것을 정확히 비판해야 합니다. 우리가 해오(解悟)는 조금 쉽게 이룰 수 있지요. 그러나 증오(證悟)는 깊은 삼매에 들어야 가능합니다. 부설거사(浮雪居士) 사허부구게(四虛浮漚偈) 가운데 "가령 비구름 몰아치듯 설법을 잘하여, 하늘꽃 감동하고 돌멩이 끄덕여도, 껍데기 지혜로는 생사를 못 면하니, 생각하면 이 또한 허망한 뜬 거품이로다[假使說法如雲雨 感得天花石點頭 乾慧未能免生死 思量也是虛浮漚]"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즉, 선정의 물이 없는 바싹 마른 지혜[乾慧], 곧 허망한 분별지혜로는 생사의 업을 못 녹입니다. 그래서 염불하는 분이나 화두를 참구하는 분이나 생각 생각에 부처님 자리, 자기 본래면목 자리, 영원한 마음의 고향자리를 떠나지 않으면서 최선의 길인 부처님 되는 공부를 열심히 하시길 바랍니다.
[- 불기 2547년 2월 성륜사, 동안거 해제법문 -]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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