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

[마음] 참다운 자성, 불성을 참구합시다 1

通達無我法者 2007. 11. 28. 11:37

참다운 자성(自性)ㆍ불성(佛性)을 참구(參究)합시다


우리의 번뇌, 다생겁래(多生劫來)로 내려온 번뇌는 보통 질긴 것이 아닙니다. 내 번뇌는 내 개인의 것이고 이것은 별로 신통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간단히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번뇌란 것은 우리 중생계에 있어서 무량세월 동안 내려온 업의 습기(習氣)이기 때문에 떼기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번뇌를 방치한다면 인생고의 굴레에 항시 얽매여 욕계의 생로병사를 떠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은 실제로는 없는 허상의 세계일 뿐...
절에 가면 후불(後佛) 탱화나 여러 가지 만다라 그림이 있습니다. 특히 후불탱화라는 것은 그냥 아무렇게나 보기좋게 그린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부처님 세계의 실상, '참으로 있는' 세계를 상징적으로 그린 것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실상세계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상세계만 느끼고 분별시비를 한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볼 수가 없고 깨달은 성자만이 볼 수 있는 그런 세계가 이른바 실상세계, 실존의 세계입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세계는 이른바 형이상학적인, 물질이 아닌 세계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보는 것은 물질에 구속된 세계인데, 우리는 이 세계가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이 보고 직감하는 세계는 사실은 실제로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중생의 업장으로 우리가 보는 이대로의 세계가 그대로 존재한다, 산은 그대로 산으로 존재하고 물은 그대로 물로 존재한다, 이렇게 느끼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산은 우리 중생의 감각을 통한 하나의 지각의 속임수인 것이지 실제로 있는 실상의 세계가 되지는 못합니다.
가령 서양철학의 위대한 선지식인 플라톤도 이데아의 세계야말로 존재하는 세계이고 우리 현상계는 사실 허망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데아의 세계는 깨달은 경계의 세계이기 때문에 진실로 존재하고, 우리 감각의 세계는 허망한 세계이기 때문에, 마치 어두운 동굴 속에서 이래저래 헤매듯 분별시비하는 그런 세계라고 비유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선을 하든 또는 무슨 경을 외우든 간에 우리 목적은 모두가 다 허망의 세계를 떠나는 데 있습니다.

실상의 지혜, 참다운 지혜 없이는 부처가 될 수 없다
우리가 『반야심경』을 보더라도 그 반야(般若)의 공(空)사상, 이른바 반야바라밀은 부처님의 어버이나 같습니다[般若佛母]. 왜 그런가 하면 반야바라밀이라 하는 그런 실상의 지혜, 참다운 지혜가 없이는 부처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느 부처든 어느 도인이든 모두가 참다운 지혜의 힘으로 반야를 깨달을 때, 이른바 선지식이 되고 성불(成佛)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참다운 지혜란 『반야심경』에 있는 바와 같이 제법공(諸法空)의 지혜입니다.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존재성이 없는 텅 빈 지혜란 말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아, 불교는 너무나 관념적이고 실제적인 지혜가 아니지 않은가'라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우리 중생이 실제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 있지가 않습니다. 왜 있지 않는 것인가,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이라 하는 것은 인연 따라서 잠시간 있는 것같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만법(萬法)이, 제법(諸法)이 공(空)이라는 소식을 옛날에는 이해하기가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현대에는 다행히 물리학의 도움으로 모두가 다 비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참말로 있다고 생각하는 이것이나 저것이나 모두가 다 각 원소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이제 우리가 다 알지 않습니까?
공기나 물이 산소나 수소 등의 원소로 구성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압니다. 그러면 그 원소는 무엇인가, 원소는 원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원자라는 것은 대체로 어떤 존재인가, 원자는 원자핵을 중심으로 전자가 뱅뱅 돌고 있는 것입니다.
원자핵을 중심으로 전자 하나가 돌면 그때는 수소 아닙니까? 여덟 개가 돌면 그때는 산소입니다. 그런데 원자핵을 도는 그것이 기묘하게도 우리 태양계에서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나 달 또는 다른 별들이 도는 이치와 똑같다고 그래요.
우리 지구도 태양을 중심으로 자전(自轉)하는 동시에 공전(公轉)을 합니다. 하루에 한 바퀴 돌면서 동시에 365일 동안 그렇게 태양 주위를 한 바퀴 돌지 않습니까? 원자핵을 중심으로 전자가 돌고 있는 것도 이치가 그와 똑같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미세한 것도 천지우주의 모든 질서에 따라서 그렇게 되는 것이지 무질서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원자의 중심이 되는 원자핵은 또 무엇인가? 핵은 양성자나 중성자나 중간자나 그런 것이 또 소립자라 하는, 우리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알갱이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소립자는 또 어떠한 것인가? 소립자는 모든 물질이 더는 쪼갤 수 없는 그런 조그마한 알갱이기 때문에 알래야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째서 알 수가 없는가? 소립자란 알갱이는 그냥 금방 생겨나고 금방 없어지고 또 서로 바꾸어지기 때문입니다.

불성으로 가득 찬 성품자리를 보지 못하는 것은 번뇌 때문...
현대는 이른바 물질만능 시대, 또는 정보홍수 시대 아닙니까? 이러한 시대를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 마음은 사실 컴퓨터나 텔레비전 같은 게 있으면 있을수록 더욱더 불안스럽고 혼란스럽습니다.
우리가 불교인이니까 아전인수(我田引水)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 가르침 같은, 물질이고 뭣이고 모든 존재의 실상을 꿰뚫어서 말씀하신 그런 가르침이 아니고서는 인간의 불안을 도저히 해소시킬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그 물질이란 것이 대체로 어떠한 것인가를 아주 극명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질이란 것은, 불교에서 볼 때는 간단하게 색즉공(色卽空)이라, 물질이 바로 공(空)입니다. 여기서 물질이 공이라고 그러면 우리의 금쪽 같은 소중한 몸뚱이가 굉장히 허망하지요? 그러므로 다만 공이 아니라 공의 실상은 그야말로 만공덕을 갖춘 자성(自性)이고 불성(佛性)입니다.
천지우주는 불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바로 그 자리가 모든 존재의 성품자리입니다. 섭섭하게도 우리 중생들은 성품자리를 볼 수가 없어요. 어째서 볼 수가 없는 것인가? 번뇌에 가려서 보지를 못합니다. 번뇌란 것이 무엇입니까? 내내야 탐심(貪心)이나 진심(嗔心), 치심(痴心) 그런 것이 번뇌 아닙니까?
자기를 한번 반조해 봅시다. 나한테는 과연 탐심이 없는가, 기분 좋지 않을 때 불뚝거리는 진심을 안 낼 수가 있는가, 또는 내가 과연 모든 존재의 성상, 존재의 성품, 존재의 현상을 다 알 수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중생이고 번뇌에 칭칭 얽매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상의 길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번뇌를 벗어나는 길입니다. 인연 따라서 우리가 업을 지어 사람으로 태어나고, 업을 더 많이 지어서 다른 동물로 태어나고, 또 더 많이 지으면 지옥에 갈 수도 있겠지요. 반면에 십선업(十善業)을 닦아서 참선도 좀 하고 기도도 모시고 하면 그때는 분명히 천상에 갑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모두가 다 불교에서 말하는 이른바 삼계(三界) 가운데 들어갑니다. 욕계(欲界)나 색계(色界)나 무색계(無色界)나 다 삼계에 속합니다. 삼계는 자기가 지은 업 따라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그런 데가 아닙니까?
나는 지금 인간으로 태어나서 재주도 꽤 있고 재산도 꽤 있고 명예도 높은데 이런 인간으로 다시 왔으면 좋겠구나, 내 아내나 내 남편이나 참 무던한 사람인데 그 사람하고 같이 사는 행복스런 생활을 영원히 누렸으면 좋겠구나, 이런 마음을 가질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렇게만은 될 수 없는 문제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