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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숨과 들숨은 두 가지이고, 수식은 안과 밖의 인연을 끊고자 한다. 어떤 것이 안과 밖이 되는가. 눈, 귀, 코, 입, 몸, 마음은 안이고, 물체, 소리, 향기, 맛, 가늘고 매끄러운 느낌은 밖이다.(그리하여) 숨을 쉬면서 마음이 공을 향하게 하여 남은 의식가지도 그치고자 한다. 어찌하여 공으로 향하는가. 숨 속에 행하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수식은 달리는 마음이 아니다. 곧(호흡할) 대에 깨닫는 것은 무거운 잘못이요, 의식은 가벼운 잘못이다. 마음을 이끌어서 잘못을 없애려고 하기 때문에 깨닫지 못한다.
도를 행하여 이미 숨을 얻으면 스스로 숨을 싫어하여 마음이 변해 다시 헤아리고자 하지 않으니, 이것이 숨을 얻는 것이다. 서로 따르는 것과 그침과 관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다. 나가고 들어오는 숨이 멸함을 알면 멸이 숨의 모습을 얻은 것이며, 삶과 죽음을 알게 된다. 다시 부리지 않고 삶과 죽음의 모습을 얻었으니 이미 네 가지 선을 얻은 것이다, 다만 생각이 공해서 도의 종자를 심은 셈이 된다.
해설 누차 설명했듯이 수를 헤아리는 수식관은 숨을 통해서 숨을 떠난다. 공기가 들어오고 나가는 두 과정을 통해 숨을 쉬게 된다. 불교적으로 표현하면 두 인연에 의해서 숨이 있는 것이다. 그 두 인연중 들어오는 인연은 밖의 인연이 들어와서 만나는 것이요, 나가는 인연은 안의 인연이 밖으로 나가서 만나는 것이다.
안의 인연은 눈, 귀, 코, 입, 몸, 마음의 감각 기능이다, 이를 근(根)이라고 한다. 이 기능이 안에 있거나 밖으로 나가기 때문에 호흡이 행해진다. 다만 밖에 있는 인연은 눈의 대상인 물체, 귀의 대상인 소리, 코의 대상인 향기, 입의 대상인 맛, 피부의 대상인 매끄럽거나 거칠다는 감촉들, 마음의 대상인 생각 등이다. 이들이 서로 만나서 모든 법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수를 헤아리는 수식은 이러한 안과 밖의 인연을 끊고자 하는 방편인 셈이다. 그러면 어째서 안과 밖의 인연을 끊고자 하는가? 인연을 끊고 공의 세계로 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인연에 의해서 호흡이 이루어지므로 코와 코로 들어가는 숨은 서로 필수적인 조건이지만, 인연에 매이면 도가 아니다. 따라서 인연을 통해서 인연을 떠나야 한다, 호흡을 통해서 호흡을 떠나야 공으로 들어갈 수 있다. 들어오고 나가는 숨에 의식을 집중하여 의식이 없어지는 단계가 숨을 통해서 숨을 떠나는 단계이다. 이렇게 됨으로써 비로소 호흡이 올바르게 이루어진다. 이런 뜻에서 '숨 속에 행하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러면 행하는 바가 없는 숨이란 어떤 것인가? 숨을 쉬면서 숨을 쉬고 있다는 감각이 떠나지 않으면 행하는 바가 있는 것이요, 그것이 사라지면 행하는 바가 없는 것이다. 숨을 의식한다는 것은 의식에 의해서 숨이 행해진다는 뜻이므로 의식이라는 안의 인연에 매이게 된다. 어떤 인연에 매이면 자재를 잃게 되므로 잘못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의식을 숨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여, 숨 자체에 대한 느낌이나 감각을 떠나는 경지에까지 이르도록 해야 한다. 수식에서만이 아니라 숨과 마음이 서로 따르는 상수에서도 끝내는 서로 따른다는 것 자체로부터 떠나야 한다.
이처럼 어떤 인연을 통해 그 인연까지 떠난다는 입장은 상수의 다음 단계인 지에서도, 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하여 행하는 바가 없는 숨에서는 들어온 숨이 다하면 나가고, 나가는 숨이 다하면 들어오는 자재의 상태가 실현되고, 시작과 끝, 생과 멸이 자재로운 상태에 있게 된다 결국 어디까지나 들어오는 숨이고 어디까지나 나가는 숨인지 구별할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숨의 들어오고 나감은 인연에 따르는 것이니 제1의 선(禪)과 같고, 들어오고 나가는 인연까지도 떠나면 제2의 선과 같다. 들어오는 인연을 떠나고 나가는 인연을 떠났다는 것에서도 다시 떠나 들어오고 나가는 숨이 둘이 아닌 상태에 도달하면 제3의 선과 같고, 이들을 모두 떠났다는 생각마저도 없이 인연에 따라서 들어오고 나가는 데 맡기는 숨은 제4의 선과 같다.
여기서 호흡과 관련하여 네 단계의 선을 다시 생각해 보자. 제1의 선은 욕계(欲界)를 떠나 어떤 정신적·물질적 장애도 받지 않는 단계이다. 호흡에 있어서 주관이나 객관, 곧 안과 밖의 인연을 끊고 숨을 헤아리는 데에 집중하면 평온한 정신상태로 들어간 것이므로 초선의 단계와 같다. 제2의 선은 보다 깊은 단0계로서 주관과 객관의 대립이 없는 상태이므로, 안과 밖의 대립 없이 들어오고 나가는 숨에서 평온함과 일종의 희열을 느끼게 된다. 곧 이 단계에서는 정(定)이 생기고 희락(喜樂)이 솟는다. 제2선의 희열이나 평온이 지속되면 우리의 정신활동이 방해를 받게 되므로 이것까지도 끊는 단계가 제3선이다. 일종의 신비적인 인식에 의해서 오묘한 심신의 쾌락을 간직하게 되는 단계이다. 그러므로《중아함경》에서는 이러한 제3선을 '낙(樂)을 염(念)하여 공(空)에 머문다.'라고 표현했다. 호흡할 때 나가고 들어오는 숨이 둘이 아닌 상태는 신비적인 인식이요 오묘한 합리성이다. 따라서 제3선의 세계에 있는 것이다. 다음의 제4선은 제3선은 오묘한 인식이나 합리성도 떠나서 모든 것이 순수하고 깨끗한 세계에서 행해지는 단계이다. 아무 생각 없이 호흡의 들어오고 나감에 맡기는 단계이다.
이러한 색계(色界)의 네 가지 선은 육체를 가지고 있는 중생의 정신생활을 이상화한 것인데, 한편 무색계(無色界)의 네 가지 정(定)도 있다. 앞에서 말한 무의식 상태에서 더 나아가 자아를 무한대로 확대한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 그 확대된 공의 세계까지도 없어져 어떠한 인식도 존재하지 않는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 다시 더 나아가 어떠한 관념도 갖지 않는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 있고 없음을 초월하여 유나 무에 관해 완전히 자재로운 경지에 이른 유상무상정(有想無想定)등이 있다. 붓다는 호흡에 있어서도 수식관을 통해 사선이나 팔정에 이를 수 있다고 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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