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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되, 숨을 생각하여 도를 얻으면 어찌 아는 바가 없습니까? 답하되, 마음은 숨을 알고 숨은 마음을 알지 못하니 아는 바가 없다. 사람은 능히 마음을 헤아릴 수 없다.(그러므로) 곧 수를 헤아리게 하여 마음을 안정시키고자 한다. 비록 숨을 헤아리더라도 잘못이 생기지 않게 해야 하니 지혜가 없으면 마땅히 어떤 지혜를 얻어서 행한다. 하나에서 열에 이를 때까지 안정과 산란을 분별하고 즐거움을 행하는 것에 대해 의식하여, 이미 마음의 안정을 얻었으면 곧 지혜가 따른다. 헤아림을 얻으면 관찰이 따르게 된다.
해설 숨과 마음이 만나서 하나가 되면 숨을 쉬고 있다는 생각조차 없어진다. 마음의 지각 작용으로 숨을 감지할 수 있으나 숨과 마음이 함께하면 숨과 마음이 대립하지 않으므로 숨이 곧 마음이요, 마음이 곧 숨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인식하거나 감지할 수 있는 것은 인식하거나 감지하는 주체와 그 대상인 객체가 대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체와 객체가 대립하지 않고 하나가 되면 주객의 구분이 소멸하므로 인식이 있을 수 없다. 이렇게 되면 마음이 숨과 함께하여 서로 따르게 되어 안정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여기에 수를 헤아리는 목적이 있다. 즉 우리의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한 지혜인 것이다. 마음이 안정된다는 것은 마음이 대상과 하나가 된다는 의미이다. 수를 헤아릴 때에도 지혜로운 방법을 택할 필요가 있다. 《달마다라선경(達摩多羅禪經)》의 상권은 이에 대한 이렇게 설명한다.
"만일 깨닫는 생각이 흩어지면 마땅히 안반념을 수습하라. 능히 수에 응하면 곧 내부의 탐착을 제거한다. 수에 있어서 만일 수순(隨順)하면, 곧 따르지 않는 것이 없다. 뜻이 흩어지지 않는 경지에서 능히 흩어진 모든 생각을 포섭하라. 먼저 수를 하나에서 시작하여 열에 이른다. 수행하여 이 수에 따르면 곧 공덕이 생긴다. 이미 공덕이 생겼으면 곧 능히 더욱 나아가게 되기를 바란다. 부처님께서는 여기에서 더욱 나아가 일체의 산란함을 없애야 한다고 설법하셨다. 수는 능히 일체를 멸한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멸한다고 말씀하셨다. 일체가 흩어지지 않으면 더욱 나아가기 때문이다."
호흡과 생각이 만나서 서로 떠나지 않으면 일종의 즐거움을 맛보게 될 것이다. 들어오는 숨에서 맛보는 안온한 쾌감을 아슈바사asvasa라고 하고, 나가는 숨에서 맛보는 쾌감을 프라슈바사prasvasa라고 한다. 팔리 경전에서는 이들을 각기 앗사사assasa와 팟사사 passasa라고 하여 자주 언급하고 있다.
앞에서 '즐거움을 따라서 의식하여'라고 한 데에는 숨이 들어올 때나 나갈 때에 마음이 이를 생각하면 즐거움을 일으킨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해탈도론》 제7권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지금 숨이 들어오는 것을 생각하고, 지금 숨이 나가는 것을 생각하는 이선(二禪)에서는 기쁨을 일으킨다. 기쁨은 숨이 들어오고 나감에 따라서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좌선하는 사람은 삼매에 들어가서 기쁨을 알게 된다. 어리석지 않고, 관하고, 대치(代置)로써 하며, 사실로써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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