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

4-2. 상수는 제2의 선이다

通達無我法者 2007. 12. 5. 16:02

4-2. 상수는 제2의 선이다

수와 숨이 따르면 제2의 선이다. 생각을 기다리지 않고 쓰기 때문에 따르는 것이 제2의 선이다. 수와 숨이 뜻을 지키지 않으면 곧 생각과 숨이 뜻을 지키게 된다. 밖으로부터 들어온 숨이 아직 다하지 않고 숨이 마음으로 들어가 있으면 식을 다하고 수가 있게 된다. 열의 숨에 열의 마음이 있으면 열이 함께한 것이 된다.

서로 따르는 것은 두 가지 뜻이 함께한 것이 된다. (이와는 달리) 그침은 하나의 뜻이 되고 하나를 동반한다. 숨이 수를 얻지 못하여 뜻이 잘못되면 함께할 수 없게 된다. 잘못된 뜻을 그쳐서 수를 얻는다. 이것이 서로 조화되어 뜻을 같이하는 것이다. 이미 숨을 얻어서 숨을 버리고, 이미 서로 다름을 얻어서 서로 따름을 버리고, 이미 그침을 얻어서 그침을 버리고, 이미 관을 얻어서 관을 버린다. 다시 돌아오지 않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 자는 다시 숨을 헤아리지 않고 역시 뜻을 부리며, 뜻은 또한 숨을 부린다. 생각하는 바가 있으면 숨이 뜻을 부리고, 생각하는 바가 없으면 뜻이 숨을 부리게 된다.

해설
붓다가 활동하기 훨씬 이전부터 인도에서는 선정(禪定)에 드는 수행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 수행 과정에서 얻어지는 최고의 정신적인 세계가 체계적으로 설해지면서 사선(四禪)이나 팔정(八定)이 정립되었다. 붓다도 이런 전통에 의해 명상을 하였고 깨달음의 세계에 도달한 것이다. 명상에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라는 삼계의 관념을 적용하여, 먼저 탐욕이 지배하는 욕계의 인간들은 명상에 의해 고통을 없애고 최고의 쾌락을 얻게 되며, 더 나아가 물질만이 있는 색계에 이르면 네 가지 단계에 이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다시 더 나아가면 물질도 없는 보다 높은 단계인 무색계에 이르러서 더 없는 세계에 머물게 된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호흡법도 호흡 조절을 통해서 색계의 네 가지 선의 세계로 가는 방편이다.

숨을 세는 것이 초선에 속하고 숨과 마음이 서로 같이하는 상수의 단계가 제2의 선이라고 말하고 있다. 초선은 마음의 산란함을 없애고, 주관과 객관이 서로 떠나지 않는 단계이다. 이 단계는 타성이 남아 있어서 언젠가는 다시 되돌아갈 수 있으므로 다음 단계로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객관에 끌리지 않기 위해서 부정관 등을 이용하거나 의식적으로 마음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수행을 하게 된다. 수를 세는 것도 그러한 방편의 일환이다.

마음이 객관에 끌리지 않게 되면 몸이나 마음이 텅 빈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다음 단계에 이르면 보다 깊은 정신적인 자각에 의해서 기쁨을 얻을 수 있다. 주관과 객관이 하나가 되어 주관이 모든 것을 포용하기 때문이다. 이런 뜻에서 상수를 제2의 선이라고 했다. '서로 따르는 것은 두 뜻이 같이한 것이 된다.' 는 숨의 들어오고 나감이 길거나 짧음에 마음을 두어 그 마음이 떠나지 않고 생각하는 것과 동반 관계에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숨이라는 객관과 생각이라는 주관이 대립관계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의 단계에서는 어떤 한 곳에 숨과 생각이 그쳐서 머물기 때문에 하나의 마음만 있다. 그러므로 '지는 한 뜻이 되고, 하나를 동반한다.'고 했다.

나아가서는 수까지 버릴 수 있어야 한다. 숨을 따르면서도 숨을 버리는 단계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숨과 마음이 한 곳에 머물렀다고 해도 머물렀다는 생각조차 없어야 한다. 또한 관에 있어서나 환에 있어서도 관하고 환한다는 것을 떠남으로써 숨이나 마음이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다. 이는 화두선(話頭禪)에서 화두를 잡게 되면 화두도 버려야 한다는 말과 같다.

'생각하는 바가 없으면 뜻이 숨을 부리게 된다.'는 숨을 세는 뜻과 숨을 인식하는 마음이 하나가 되었을 때에는 숨과 생각과 마음을 나눌 수 없는 상태가 되는데, 이때에는 뜻에 다라 숨을 길거나 짧게 쉴 수 있으며, 항상 숨과 같이하는 뜻에 따라서 자재로울 수 있으므로 잘못이 없어지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이러한 경지에 이른 것이 상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