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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앉음이 도에 따른다. 첫째는 수식을 하면서 앉고, 둘째는 경을 읽으면서 앉고, 셋째는 경을 들으면서 기뻐하며 앉는 다. 이렇게 세 가지이다. 앉는 데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잘 어울려진 앉음이요, 둘째는 청정한 앉음이요, 셋째는 맺음이 없는 앉음이다. 어떤 것이 잘 어울려진 앉음인가. 마음과 움직임이 떠나지 않는 것이 잘 어울려진 앉음이다. 어떤 것이 청정한 앉음인가. 생각하지 않음이 청정한 앉음이다. 어떤 것이 맺음이 없는 앉음인가. 번뇌가 이미 다한 것이 맺음이 없는 앉음이다.
해설 수식에서 앉는다는 말은 마음이 안정되었다는 의미이다. 마음이 안정되면 호흡도 정상적으로 행해진다. 마음이 안정된 상태에서는 앉아 있거나 걸어다니거나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앉아 있으면 안정되고 걸어다니면 안정을 잃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안정하는 데에는 수를 세면서 호흡하는 방법〔數息坐〕이 있고, 또 경전을 독송하는 방법〔誦經坐〕이 있다. 경전을 독송하면 마음이 그 소리에 집중되므로 안정을 얻을 수 있다. 마음의 안정은 보이지 않는 나의 마음과 보이는 대상이 하나가 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보이는 사물에 정신을 집중하거나 들리는 소리에 집중하면 주관과 객관이 하나가 된다.
다음 독경하는 소리를 듣고, 마음에 거룩한 마음이 와 닿게 되면 성스러움과 만나서 즐거움이 생긴다〔聞經喜坐〕.이 즐거움은 상대적인 가치에 그치지 않고 절대적인 가치를 얻게 된다. 절대적인 즐거움은 영원하고 한량이 없다. 이런 즐거움이야말로 마음의 안정에 의한 앉음이다.
인도인은 몸과 마음의 안정을 얻는 유일한 방법으로 앉는 자세와 명상법을 개척하였다. 인도에서는 앉아 있는 자세가 절대적인 안정을 얻는 자세이다. 특히 두 다리를 앞으로 꼬고 앉는 결가부좌(結跏趺坐)를 몸과 마음이 안정되는 가장 이상적인 자세로 여기고 있다. 좌법과 정신 집중으로 몸과 마음의 안정을 얻는 방법을 창안한 것이다.
세 가지 좌법 중에서 수를 세면서 앉아 있는 수식좌에서는 마음으로 수를 세게 되므로 의도적으로 수를 센다고도 말할 수 있다. 주관이 객관으로 다가가서 드디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송경좌에서는 주관이 객관의 거룩한 세계로 다가가고, 객관의 거룩한 세계가 주관으로 다가옴으로써 주와 객이 합일된다. 문경희좌에서는 객관의 거룩한 세계가 주관의 거룩함이 합쳐져 환희를 느끼게 된다. 이 환희는 절대적이므로 열반의 깨달음과 다름없다. 여기에는 사실상 주관도, 객관도 없으며 오직 즐거움만이 존재한다. 이 즐거움이 우리를 도로 인도한다.
수식좌나 송경좌, 문경희좌는 모두 이것과 저것이 잘 어울려서 도가 이루어지는 좌법이다. 올바른 호흡을 닦기 위해 마음과 몸을 안정시키는 방법 중 어떤 것을 선택하든지 도달하는 곳은 같다. 곧 숨을 세거나 경을 독송하거나 듣는 일이 모두 인연을 따라 인연을 살리는 일이다. 또한 도에 따르고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하는 일이다.
이들 세 가지 좌법 중에서 굳이 얕거나 깊고 빠르고 느림을 따진다면 세 번째 문경희좌가 으뜸일 것이다. 주와 객이 거룩함에서 서로 만나 속히 기쁨의 깨달음을 얻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경희좌도 이것과 저것의 인연이 만날 수 있도록 성숙되어 있어야만 가능하다. 종교적인 믿음이 있는 사람은 송경좌나 문경희좌를 통해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신심이 깊지 못한 평범한 생활인이나 수행에 뜻을 둔 사람은 수식좌와 같은 손쉬운 방법이 좋다. 수식좌는 공교한 방편으로 깨달음으로 가는 가장 쉽고도 가까운 길이 되기 때문이다. 좌법은 또한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대별해 볼 수 있다.
잘 어울려진 앉음인 미합좌(味合坐)에서는 마음과 호흡이 합일되어 떠나지 않고 즐거운 호흡이 이루어진다. 숨과 마음이 하나가 되고 다시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면 마음은 기쁘고 몸은 편안하여 들어오고 나가는 숨에서 삶의 참맛을 보게 된다. 이것이 미합좌이다.
다음으로 청정한 앉음인 정좌(淨坐)가 있다. 정좌에서의 청정함은 마음에 아무런 집착이 없고, 몸에는 장애가 없는 상태이다. 즉 정신적·육체적인 완전함을 말한다. 어떤 자극에도 구애되지 않고 응할 수 있으며 정신을 집중해도 피로를 느끼지 않는다. 청정함은 더러움을 없애는 것만이 아니라 더러움에 구애되지 않고 그 더러움을 깨끗함으로 바꾸는 적극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소승불교에서는 번외를 없애는 것을 청정이라고 했으나 대승에서는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것이라 하여, 번뇌가 깨달음의 경지와 같다고 했다.
맺음이 없는 앉음인 세 번째의 무유결좌(無有結坐)는 마음속에 번뇌와 망상과 같은 집착이 없는 상태이다. 여기서는 '맺음이 이미 다한 것'이 라고 했다. 처음 수행할 때는 많은 노력을 기울려야 하나 계속 진행되어 높은 경지에 도달하면 더 이상 노력할 필요가 없어진다. 번뇌를 끊으려는 수행이 쌓이고 쌓이면 번뇌와 더불어 살면서도 번뇌를 끊을 필요가 없는 경지에 도달한다. 번뇌가 깨달음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무학위(無學位)를 말한다. 여기서 무학이란 배움이 다하여 더 이상의 배울 것이 없는 경지이다. 호흡에 있어서도 올바른 호흡을 위해서 복식호흡을 익히고 정신을 집중하여 호흡에서 떠나지 않게 수식을 쌓으면 드디어는 의식적으로 복식호흡을 하거나 정신집중을 할 필요가 없어진다. 모든 삶에서 자재로운 호흡이 행해지고 마음과 호흡이 떠나지 않아서 자연 그대로가 삶의 진실로 구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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