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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 '어찌하여 사람에게 수식과 수의를 가르치십니까?' 하고 물으니 이렇게 답하셨다. 네 가지 인연이 있다. 첫째는 아픔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요, 둘째는 마음의 산란을 피하고자 하기 때문이요, 셋째는 인연을 닫고 생과 사와 더불어 만나기를 바리지 않기 때문이요, 넷째는 열반의 길을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태양빛이 없는 데에 네 가지 인연이 있음과 같다. 첫째는 구름이 있기 때문이요, 둘째는 티끌이 있기 때문이요, 셋째는 큰 바람이 있기 때문이요, 넷째는 연기가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수식을 얻을 수 없음에도 또한 네 가지 인연이 있다. 첫째는 생사를 헤아리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요, 둘째는 음식이 많기 때문이요, 셋째는 피로가 지극하기 때문이요, 넷째는 앉아서 죄의 바탕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 네 가지는 모두 모습을 지니고 나타난다. 수식에서는 홀연히 앉아 다른 일을 생각하면 숨과 뜻을 잃는다. 이는 헤아림을 생각하는 모습이다. 뼈마디가 아파서 능히 오래 앉아 있을 수 없으면 많이 먹은 모습이고, 몸이 무겁고 마음이 어두워 단지 잠자는 것만을 바라면 피로가 지극한 모습이다. 사면을 (대하고) 앉아서 하나의 숨도 얻지 못하면 자리가 잘못된 모습이다. 잘못을 알면 마땅히 경행해야 한다. 만일 경문을 읽으면서도 앉아 마음이 잘못됨을 익히지 않으면 또한 허물이 소멸된다.
해설 수식에서 의식을 잘 간직하라고 가르치는 이유를 설명한 부분이다. 붓다는 호흡수련 중에는 여러 가지 병폐가 생기기 때문에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하고 있다. 첫째, 오래 앉아 있을 경우에 수행자는 다리나 허리 등에 통증을 느끼게 된다. 이런 경우에 수를 헤아리면 그 아픔을 극복할 수 있다. 둘째는 마음의 산란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셋째, 외부에서 오는 자극을 막기 위해서이다. 외부로부터의 자극으로 인해 생사의 갈등을 느끼게 되므로 수식은 이러한 자극으로부터 고요한 정신상태를 지키기 위한 것이다. 자극을 통해 주관이 객관을 만나 그에 끌려 집착하는 것이 바로 생과 사이다. 생이란 '있음'이며 사는 '없음'이다. 있는 생과 없는 사의 관념은 주관이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객관 세계의 자극을 받아서 그것에 집착하여 일어난다.
삶이나 죽음은 서로 대립하는 갈등이며, 이런 의미에서 갈등은 외부의 자극에서 오는 것이다. 넷째는 열반, 곧 깨달음을 얻는 고요한 길로 들어가기 위해서이다 깨달음이란 우리의 마음이 절대적인 고요에 이르러야 나타나는 세계이므로 이러한 열반의 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수식을 하면서 마음을 한결같이 지켜야 한다. 열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지혜의 빛이 밝게 나타난다. 붓다는 이를 태양빛에 비유했다. 태양의 광명이 나타나려면 그 빛을 가리고 있는 구름, 티끌, 바람, 연기 등이 걷혀야 한다.
수를 헤아리는 일이 잘 되지 않는 데에도 네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마음에 갈등이 일어나서 이것과 저것을 분별하며 집착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음식을 너무 많이 먹어서 노곤하거나 속이 답답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피로가 극에 달했기 때문으로 피곤하면 도무지 숨을 헤아릴 수가 없다. 넷째, 앉아 있는 자리가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바꾸지 않기 때문이다.
잘못된 이 네 가지 조건들은 각각 그에 상응하는 현상을 동반한다. 즉 쓸데없는 생각이 일어나면 마음속에 쓸데없는 일이 그려지기 마련이다. 이 일이 우리의 마음을 점령해 버린다. 음식을 많이 먹으면 뼈마디가 아파서 오래 앉아 있을 수 없다. 피로가 극심하면 몸이 무겁고 마음이 혼미해져 잠만 자고 싶어진다. 또한 앉아 있는 자리가 쾌적하지 못하면 이쪽저쪽 자리를 바꾸어 앉아도 숨을 헤아릴 수 없고 마음이 초조해지기만 한다. 그러면 자리가 잘못되었음을 알아차리고 일어나 걷는 편이 낫다. 일어나서 걷지만 말고 경문을 읽어 마음을 가라앉힌다. 그리고 다시 앉으면 마음이 올바른 상태로 돌아간다. 안정된 마음과 올바른 몸가짐, 알맞은 장소의 선택 여부가 수식의 성패를 좌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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