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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과 밖의 아프고 가려움을 본다고 함은 아프고 가려움이 일어나는 곳을 보는 것이다. 곧 관은 보는 것이다. 안과 밖의 아프고 가려움이란, 곧 밖의 좋은 물건이 밖의 가려움이 되고, 밖의 나쁜 물건은 밖의 아픔이 된다. 안의 마음에 드는 것이 안의 가려움이 되고, 안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안의 아픔이 된다. 안에 있음이 안의 법이 되고, 밖에 있는 인연의 밖의 법이 된다. 또한 곧 눈은 안이 되고 물질은 밖이 된다. 귀는 안이 되고 소리는 밖이 된다. 코는 안이 되고 향기는 밖이 된다. 입은 안이 되고 맛은 밖이 된다. 마음은 안이 되고, 생각은 밖이 된다. 좋고 고운 매끄러움을 보는 마음이 얻고자 하는 것은 가려움이 되고, 거칠고 나쁨을 보는 마음이 쓰이지 않으면 아픔이 된다. 모두 죄에 떨어진다.
해설 안과 밖의 사물에 의해서 간지럽거나 좋게 느껴지는 것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 사물을 보고 관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보는 것은 어떤 사물을 아는 것이요, 관한다는 것은 그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아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분별하여 생각한다. 그래서 견관(見觀)이라고 했다. 따라서 어떤 사물을 보고 그것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의 인연의 도리를 알면 견관이 된다. 인연을 알게 되면 아픔과 가려움에 끌려서 아픔이나 가려움에 빠져 괴로워하지 않는다. 아픔은 그 원인을 제거하면 없어지기 때문이다.
아프거나 가렵다는 감정은 인연에 의해서 생겼으므로 어느 것에도 걸려서는 안 된다. 우리의 모든 정념은 안에 있는 감각 기능이 바깥의 대상을 만나서 작용하기 때문이다. 좋은 것을 보거나 들으면 갖고 싶어진다. 즉 양(痒)이다. 가려우면 갖고 싶어지는 병이다. 갖고 싶다는 정념은 무엇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무엇을 바란다는 것은 마음에 드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바깥의 좋은 물건은 바깥의 가려움이 되고, 안의 마음에 드는 것은 안의 가려움이 된다.'고 했다.
우리는 좋은 것을 보면 그것을 마음에 받아들이고, 나쁜 것은 피하려고 한다. 이런 현상은 내부의 마음과 외부 사물과의 관련 속에서 생긴다. 이 역시 인연법에 지나지 않는다. 인연법이기 때문에 실체가 없어 집착할 바가 못된다. 우리의 감각 기능이 안에서 작용하고 좋거나 나쁜 사물이 밖에서 작용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그것이 참된 나의 마음인줄 알고 집착하면 곧 죄가 된다. 외부의 좋은 것을 대하여 기뻐하고, 외부의 나쁜 것을 대하여 싫어하면 그것은 안과 밖의 것에 이미 끌렸기 때문이다.
마음이 불쾌하면 그렇게 만드는 연유를 알아보아야 한다. 그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서 참고 노력하면 불쾌감이 사라지고 쾌감이 찾아온다. 마음이 즐거울 때도 연유를 살펴보면, 즐거움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안팎의 두 인연에 의해서 나타났음을 알게 되어, 거기에 빠져들지 않게 된다. 좋다거나 나쁘다는 것은 평범한 세속의 가치이다. 그러나 절대적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선과 악이 아닌 세게, 즉 선에도 바지지 않고 악에도 끌리지 않는 중도를 가르친다.
본능이나 관능에 떨어지지 않고, 사물이 생하고 멸하는 인연의 도리에 비추어 사물의 실상을 보는 것이 견관이다. 보는 견(見)은 사물의 외형을 볼 뿐이지만, 다시 보고 생각하는 관(觀)은 보이지 않는 존재의 실상을 본다. 안이나 밖으로 나타나는 아픔이나 가려움이라는 선과 악의 정념을 대할 때, 마음을 고요히 하여 그것을 바라보면 가려움이 가려움이 아니며, 아픔도 아픔이 아님을 알게 된다. 일어나는 정념을 억제하고 그것의 실상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상태가 관의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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