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과 밖의 아픔과 즐거움을 거듭하여 드러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곧 사람이 사물을 보고 좋아함에 엷고 두터움이 있다. 그 마음이 같이 관하지 않는다. 많고 적음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시 분별하여 도를 관함에 마땅히 내관(內觀)하여 어리석음이 있으면 마땅히 외관하여 스스로 밝혀야 한다. 몸과 마음의 아픔과 즐거움은 각각 스스로 다르다. 추위나 더움, 칼이나 매(枚)를 맞아 아픔이 지극하면, 이것은 몸의 아픔이 되고, 맛있는 음식, 수레에 실은 좋은 옷, 몸의 여러 가지 편한 것을 얻으면 몸의 즐거움이 된다. 마음의 아픔이란 몸이 스스로 근심하고 다시 남이나 만사를 근심하면 이것이 마음의 아픔이다. 마음이 좋은 것이나 여러 기쁨을 얻으면 이것이 마음의 즐거움이 된다.
해설 마음의 괴로움이나 즐거움에 대해서 강조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몸과 마음의 괴로움이나 즐거움이나 즐거움은 사람들이 사물을 대하는 마음가짐에 따라서 차이가 있다. 곧 괴로움도 그 깊이나 크기에 차이가 있고 즐거움도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괴로움이나 즐거움에도 차이가 있어서, 너무 큰 괴로움이나 즐거움에도 차이가 있어서, 너무 큰 괴로움이나 즐거움을 마음으로 바꾸는 일이 쉽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앞에서 괴로움도 마음을 돌리면 없앨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추위나 더위, 도는 칼로 베는 아픔이나 매를 맞는 아픔은 마음을 바꿔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사실 크고 깊은 아픔이나 즐거움으로부터 마음을 돌리기란 어렵다. 그러나 그 아픔과 즐거움을 잘 분별하여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사실보다 더 괴로워하거나 즐거워하면 그 마음이 괴로움이나 즐거움을 더해주기 때문에 마음을 돌리기가 어렵다. 무엇이 나를 아프게 하는지를 보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서 처리해야 한다. 마음으로 보기만 하고 사물의 살상을 보지 못하면 어리석은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괴로움이나 즐거움이 사실보다 크게 된다. 예를 들면 방망이가 나무나 쇠가 아니라 고무로 만들어 물렁물렁 하다는 것을 알면 맞아도 별로 아프지 않게 느껴진다. 아픔이나 즐거움 등은 아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에 따라서 결정되므로, 사물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알면 선입관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마음의 움직임에 집착해 사실 이상으로 괴로워하거나 즐거워하지 않게 된다.
몸이나 마음의 괴로움과 즐거움을 다시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마음과 몸의 현상은 그 현상을 있게끔 한 주체와 객체에 관련되어 있으므로 주체와 객체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범인은 괴로움이 아닌 것을 괴로움으로 알아서 괴로워하고, 즐거움이 아닌 것을 즐거움으로 알아서 즐거워한다. 그래서 붓다는 괴로움과 즐거움은 마음에서 유래되며 실체가 없는 허망한 것이라고 가르쳤다.
괴로움은 실체가 없는 이것과 저것에 의해 있게 되었다. 괴로울 때 그 느낌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관찰하여 원인을 없애는 지혜를 가져야 하고 괴로움과 즐거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 실상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지혜와 눈은 마음을 호흡에 집중하여 드디어는 집중하고 있다는 마음까지도 없어진 삼매의 청정한 경지에 이르러야 얻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