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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는 숨과 들어오는 숨이라는 생각이 멸할 때, 언제가 생각이 멸하는 때입니까? 곧 나가고 들어오는 기운이 다할 때가 마음과 숨이 없어지고 나가는 숨과 들어오는 숨의 생각이 없어지는 때이다. 비유하면 공중에 그린 그림은 그린 곳이 없는 것처럼 삶과 죽음에 대한 의식이나 도에 대한 의식도 모두 이와 같다. 나가는 숨과 들어오는 숨이라는 생각이 멸할 때도 숨과 마음을 말하지 않고 숨을 말한다. 나가는 숨과 들어오는 숨이 없어질 때가 생각이 없어지는 때이다. 사물은 인연으로부터 생하나니, 근본을 끊는 것이 없어지는 때이다.
해설 숨이 있으면 생각도 있다. 들어오는 숨에 따라 '들어온다'는 생각이 있고, 나가는 숨에 따라 '나간다'는 생각이 있다. 들어오고 나가는 숨이 없으면 마음도 없다. 숨이 나간다는 생각이나 들어온다는 생각은 숨과 생각이 인연에 의해 생멸한다는 점과 관계가 있다. 숨이 있으면 생각이 있고, 숨이 없으면 생각도 없다. 마치 공중에 그린 그림과 같다. 공중에 그린 그림은 그린 곳이 없기 때문에 그림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중에 그림을 그린다고 말한다. 이는 말뿐이지 어떤 사실이 아니다. 허망한 것을 있다고 착각한 것뿐이다.
삶과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산다'는 생각은 삶에 따라서 있고, '죽는다'는 생각도 죽음에 따라서 있으니, 삶이 없으면 삶이라는 생각도 없고 죽음이 없으면 죽음이라는 생각도 없다. 그러므로 본래 삶이나 죽음은 실체가 없는 허망한 것인데 어찌 삶이나 죽음이라는 생각이 있을 수 있겠는가?
나가는 숨과 들어오는 숨이 없어졌을 때가 그 생각이 없어지는 때이다. 숨과 생각은 둘인 것 같지만 둘이 아니며, 하나인 것 같지만 하나가 아니다. 오로지 인연에 의해 서로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 인연을 없애면 그로 인해 생겨난 것 또한 없어진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숨에 대한 생각을 없애는 것이 지(止)이고, 숨과 생각이 하나가 되어 생각에 다라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이 환(還)이며, 생각가지 없어지는 것이 정(淨)의 세계라고 연결해 생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청정한 세계에서는 '생각이 없어졌다'. 는 자체도 존재하지 않는다. 숨이 들어오지만 숨이 들어온다는 생각이 없고, 나가지만 숨이 나간다는 생각도 없는 경지이다. 그렇게 되면 호흡이 순조롭게 되어 현법(現法)에 낙주(樂住)할 수 있게 된다.
요컨대 숨의 들어오고 나감에 생각을 집중시키는 것이 수식이요, 상수였다. 그리고 지와 관도 의식적으로 생각을 한 곳에 집중시킨다. 지와 관을 의식과 숨이 하나가 되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환은 하나로 된 의식만이 있는 경지이다. 정은 생각이 없는 경지이다. 그런데 다시 생각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점이 이해하기 어렵다. 이런 경지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보통 호흡은 무의식적으로 행해진다. 그러나 이 호흡을 의식적으로 통제하고 조절했다가 다시 무의식화한다. 생리학적으로 말하면 무의식적인 호흡이란 연수(延髓)에서 반사적으로 행해지는 호흡을 말한다. 이 호흡은 폐의 내부에 있는 구심성(求心性) 신경의 반사에 의해 연수로 전달되어 호흡운동을 일으킨다. 운동신경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호흡의 리듬을 의식적으로 변경할 수 있다. 우리가 늘상 행하는 무의식적인 호흡은 선천적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반사능력을 이용하고 있으므로, 대뇌는 호흡을 하느라 애쓰지 않아도 자유자재로 정신활동을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의 호흡을 선천적으로 주어진 그대로 내버려두되 정신활동을 방해하는 요소만 제거해 주면 그만이다. 이것이 안반수의법의 요체이다. 방해 요소는 바로 마음이다. 마음의 불안, 탐욕 등 갖가지 잘못된 생각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지는 무의식적인 호흡을 방해한다.
의식적으로 정신을 집중한 끝에 정신적인 장애를 없앤 경지가 바로 정이라고 불리는 청정(淸淨)의 단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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