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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유는 마음에 집착이 없는 것이다. 마음에 집착하는 원인이 있으면 육입(六入)을 끊게 되어, 곧 현명함을 얻게 된다. 현(賢)은 몸이고 명(明)은 곧 도(道)이다.
해설 공(空)의 실천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가까운 호흡 속에서도 얻을 수 있는데 호흡의 들어오고 나감이 바로 생(生)하고 멸(滅)하는 공을 보여준다. 들어오는 숨이 그치면 나가고, 나가는 숨이 그치면 들어오게 하는 것이 공의 실천이다.
들어오고 나가는 숨이 생과 멸의 생명현상이라고는 하지만 집착하면 안 된다. 집착하지 않고 생과 멸에 따르는 것이 공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이를 무소유(無所有)라고 한다.
무소유란 마음에 집착이 없는 상태이다. 정신을 호흡에 집중시키되 마음이 이에 집착하여 떠날 줄 모른다면 잘못된 것이다. 마음의 해방을 잃으면 자유로운 정신활동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공을 실천하려면 호흡으로부터 마음을 떼어버려야 한다. 여기에 아나파나사티의 묘함이 있다. 수(數)를 세어 호흡과 수가 서로 따르는 경지에 이르게 되면 그 수식(數息)을 버리라고 한다. 수에만 매달려 있으면 더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수는 집착의 원인이 되므로 마음의 활동에 장애가 된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공의 실천이다. 공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집착하지 않는 소유이다. 무소유도 아무것도 갖지 않음이 아니라 가지면서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봄이 되면 얼어붙은 땅을 뚫고 어린 새싹이 조심스럽게 솟아나 잎과 꽃을 아름답게 피운다. 그리고 가을이 되어 소담스럽게 열매를 맺으면 오랫동안 아끼고 가꾼 잎을 아무런 집착 없이 흩날려 버린다. 그리고는 그 열매마저 떨어뜨리고 만다. 이처럼 자연계의 현상이나 인간의 삶도 집착 없는 공의 실천이다. 이를 도(道)라고 한다.
만일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는 어떤 집착이 있으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마음으로 판단하는 모든 감각 기능이나 정신활동은 차단되고 만다. 볼 것은 보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은 보지 않아야 할 터인데, 감각기관을 통해서 받아들여지는 것을 취사 선택할 수 없게 되면 안 된다. 호흡이 올바르게 이루어져서 정신이 호흡에 집중되면서도 집착하지 않게 되면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감수작용이 원만하게 이루어져서 취사 선택하게 되고 냉정하게 판단하여 현명한 행동을 하게 된다. 그래서 '육입(六入)을 끊으면 현명(賢明)을 얻는다.'고 했다. 육입을 끊음은 여섯 가지 감각기능을 닫는 것이 아니라 집착하지 않고 취사 선택하여 지혜롭게 활동한다는 의미이다. '현명하다'는 '어질고 밝다'는 뜻이다. 어질다는 것은 모든 존재의 가치를 살피는 것이므로 '몸'이라고 했다. 풀이나 나무가 싹을 틔우고 잎과 꽃을 피워서 열매를 맺는 것은 몸을 가지는 일이다. 잎이나 꽃이나 열매는 존재들이다. 이러한 존재들의 가치를 최대한으로 발휘하려면 몸을 소중히 간직하여 살려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존재들은 모두 떠날 때는 떠나야 할 것들이다. 취하는 것이 어질다면 버리는 것은 밝다. 취하는 것이 몸이라면 버리는 것은 도리를 따라서 가게 한다. 그러므로 '명(明)은 도(道)이다.'라고 했다.
공의 세계는 모든 사물의 가치를 최대한으로 살리는 동시에 유감 없이 버리는 대아(大我)의 세계이다. 취하고 버리는 것이 자유자재한 속에 도가 있다. 공의 세계는 중도(中道)라고도 말해진다. 중도는 이것과 저것의 중간이 아니라 이것과 저것을 인연에 따라서 취사 선택하여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공은 정도(正道)라고도 말해진다. 팔정도(八正道)는 여덟 가지 길이니 곧 공의 실천이다. 이를 물에 비유해서 설하기도 하는데 ≪성실론(成實論)≫14권에서는 이렇게 설한다.
"집착하지 않는다 함은 이 기슭에도, 저 기슭에도 붙지 않고 중류(中流)에도 잠기지 않고 육지에도 나가지 않으며, 인(人)의 취(取)함과 비인(非人)의 취함도 없음을 말한다. 회복(回復)에 들어가지 않고 스스로 부란(腐爛)하지도 않는다.
차안(此岸)이란 안의 육입(六入)이요, 피안(彼岸)이란 밖의 육입이며 중류란 탐과 기쁨이요, 육지란 아만(我慢)이다. 인취(人取)란 재가와 출가의 승가요, 비인(非人)의 취(取)란 곧 계를 가지고 천상에 태어나려는 것이요, 회복(물이 맴도는 곳)이란 계를 어기는 것이고 부란은 무거운 금계를 피하는 것이다.
만일 사람이 내입(內入)에서 주관을 세우면 곧 외입(外入)에서 객관에 집착하고, 내외입으로부터 탐심과 희열을 만들기 때문에 중(中)에 잠겨 아만이 생긴다. 사람이 몸에 집착하면 감수작용은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이 경멸하거나 헐뜯으면 교만이 생긴다. 이와 같이 아(我)와 아소(我所)와 탐과 희와 아만으로 마음이 흩어진다."
호흡에 있어서도 출입식에서 기쁨을 얻으나 집착하면 교만이 생겨서 마음이 흩어진다. 그러므로 '항아(恒河)의 물이 반드시 큰 바다로 가는 것과 같이 팔성도(八聖道)는 반드시 열반에 이르게 된다.'고 했다. 팔성도는 팔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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