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곳에서 나와서 어느 곳으로 멸하는가를 아는 것은, 비유하면 돌을 생각하다가 돌에서 나와 나무로 들어가면 곧 돌이 없어지는 것과 같다. 오음(五陰)도 이와 같다. 색(色)에서 나와서 통양(痛痒(아프고 가려움)으로 들어가고, 통양에서 나와서 사상(思想)으로 들어가고, 사상에서 나와서 생사(生死)로 들어가고, 생사에서 나와서 식(識)으로 들어가니, 이미 이것을 분별하여 곧 ≪삼십칠품경(三十七品經)≫에 따른다.
해설 가령 아름다운 꽃 한 송이가 피어 있다고 하자. 그 꽃은 없던 것이었으므로 머지 않아 떨어질 것이다. 그렇기에 과거나 미래에는 볼 수 없는 소중한 꽃이다. 인연에 의해서 없던 것이 생겨나고, 있던 것이 없어진다. 그러나 아름다운 꽃에 끌려 마음이 떠날 줄 모르면 그 꽃이 마음을 차지하고 있어서 지면 괴로워질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떠나면 그런 괴로움도 없어진다.
사물에 대한 올바른 견해는 마음이 그 사물에 머물고 다시 떠나는 것, 다시 말하면 집착 없는 공의 실행에 있다. 마음이 어느 한 곳에 머물면 생이요, 떠나면 멸이다. 마음의 움직임에 의해서 생과 멸이 있다. 생과 멸의 근본은 불생불멸의 공의 세계다.
경에서 예로 든 것처럼 우리의 생각이 돌에서 나무로 옮겨가면 이미 돌에서 생각이 떠났기 때문에 돌은 우리의 마음속에 없다. 마음속에 돌이 없으면 돌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고 집착이 없는 상태는 곧 공으로 돌아간 것이다.
마음이 어떤 사물인 객관(色)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서 주관에 의해서 아프다거나 가렵다는 감수작용을 가진다(受). 주관의 감수작용 속으로 마음이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다시 여기에서 나와야 한다. 감수에 매여 있으면 사물에 제대로 볼 수 없다. 또한 삼물을 표상하는 지각(想)이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그로부터 나와서 의지(行)가 움직여야 한다. 의지가 움직이지 않으면 올바른 인식(識)이 있을 수 없다.
이처럼 정신이나 물질의 생하고 멸함으로부터 오온(五蘊)이나 사념처(四念處)가 있게 된다. 다시 말하면 이들 다섯 가지 요소들은 인연에 의해 모여서 생하고 인연이 다하면 흩어져서 없어지니 집착할 대상이 아니다. 공(空)이기 때문이다. 색(名, 물질)의 있고 없음에 의해서 색에 대한 아픔과 감수작용인 수(受)에 대한 가려움과 마음에 상대되는 법과 법에 상대되는 뜻이 있게 된다. 사념처(四念處)의 근본이 공임을 알면 이들이 있게 된 인연과 과거와 미래를 성찰할 수 있다. 이러한 성찰에 의해서 집착하지 않고 해탈하여 생과 사의 고(苦)를 벗어난다.
사념처에 대한 관찰로서 무원삼매(無願三昧)에 머물고, 다시 악을 일으키지 않고 선법들을 구족하여 한결같이 스스로 마음의 뜻하는 바에 따라서 선법을 행한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악을 일으키지 않고 이미 생한 악은 없애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은 생하게 하고 이미 생한 선은 더욱 증장하게 하는 자재로운 정의(自在定意)로써 사정근(四正勤)을 닦는다. 다시 이로부터 네 가지 신족(神足) 등 뜻대로 행하는 힘을 얻고, 오근(五根), 오력(五力), 칠각지(七覺支), 팔정도(八正道) 등 삼십칠의 법으로 들어간다.
이와 같이 하여 37의 법을 구족하면 무루심(無漏心)을 얻어서 일체의 번뇌를 떠나 고를 벗어나게 된다.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 등의 다섯 가지 요소들은 욕계(欲界)에 속하여 고의 원인이 된다. 욕계에 속하는 고제(苦諦)의 도리를 깨닫게 되면 다시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고제를 깨달아 아는 지혜를 얻어서 그 원인인 집제(集諦)를 깨닫고, 다시 무루심(無漏心)으로 고의 멸인 멸제(滅諦)를 확인하고 도제(道諦)를 깨닫게 된다.
≪삼십칠도품경≫은 고집멸도의 사제를 관행하고 사념처의 마음을 끊고 사정근을 익히며 오근, 오력, 칠각지, 팔정도를 닦는 수행법을 성한 경전이다. ≪불설선행삼십칠품경(佛說禪行三十七品經)≫이라고도 한다.
실제로 호흡을 올바르게 행하면 산소가 들어와 혈액을 정화하고 나가는 숨을 통해서 나쁜 독소가 배출된다. 집착 없이 고요하고 편안하게 호흡함으로써 신체기능이 원만히 이루어지고 마음이 자유롭게 활동해 몸의 건강과 마음의 즐거움이 얻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