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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되, 어떤 것이 무위도(無爲道)를 사유(思惟)하는 것입니까. 답하되, 사(思)는 헤아리는 것, 유(惟)는 받아들이는 것, 무(無)는 만물이 생각하지 않는 것, 위(爲)는 설함과 같이 도를 행해 얻음(得)이 된다. 그러므로 무위의 도를 사유한다고 말한다. 또한 사(思)는 생각하는 것, 유(惟)는 희고 검은 것을 분별하는 것이다. 검은 것은 생사가 되고 흰 것은 도가 된다. 도는 무소유(無所有)이므로 이미 무소유를 분별하면 곧 하는 바가 없다. 그러므로 무위도를 사유한다고 말한다. 만일 하는 바가 있어 집착을 헤아리게 되면 사유가 아니다.
해설 숨의 들어오고 나감을 생각하면 무위(無爲)의 도(道)를 사유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글자 하나하나에 대한 설명부터 시작한다.
먼저 무(無)는 만물을 생각하지 않고, 위(爲)는 가르치는 대로 행하며, 도(道)는 실천해서 자신의 것으로 얻어진 삶이다. 사유(思惟)는 받아들이고 생각하는 것이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밖에서 들어온 것을 분별하는 능력이다. 분별이란 좋고 나쁜 것을 가려 선택하는 것이니, 흑백을 분별하여 나쁜 것인 생사의 번뇌를 없애고 좋은 것을 택하여 얻음이 바로 도이다. 붓다의 호흡과 명상은 만물을 생각하지 않으면서 가르치는 대로 행하여 자신의 소유로 만드는 좋은 방법이다.
좋고 나쁜 것을 취사 선택하기는 쉽지 않다. 생각만으로 헤아려서는 더욱 알 수 없다. 실천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을 보고 좋고 나쁜 것을 가릴 필요가 있으며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야 한다. 좋은 스승은 만나면 스스로 생각할 필요도 없이 바로 진리의 길로 들어갈 수 있다.
붓다의 호흡법은 2,500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실천을 통해서 가장 뛰어나다는 사실이 증명되었고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전수되었다.
우리는 다른 생각없이 가르치는 대로 생각하면서 실천할 따름이다. '생각하는 바 없이 생각하는 것' 또한 공의 실천이기도 하다.
호흡은 생각하는 바 없이 생각하는 것이다. 무의식 속에서 행해지는 숨은 생각하는 바가 없다. 그러나 수를 헤아리는 것이 곧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다시 생각하지 않는 지(止)와 관(觀)으로 이어져서 드디어는 청정한 세계에 도달한다. 즉 생각없이 생각하고, 생사의 고통이나 번뇌가 없어진 즐겁고 쾌적한 흰 길이다. 생각 없는 흰 길은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든 중생이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기에 백도라고 말해진다.
이 길로 가는 방법은 오로지 일념으로 가르침에 따라서 매진하는 일 뿐이다. 세속의 길은 괴로움이 따르기 때문에 검다. 반면에 백도는 가진 것이 없는 길이기도 하다. 마음에 가진 바가 없다는 것은 집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수를 헤아릴 땐 수에 집착하지 않고 헤아리게 되므로 가진 바가 없는 고요함을 얻게 된다. ≪수행도지경(修行道地經)≫ 5권은 이렇게 설한다.
"나가고 들어오는 숨을 헤아려서 고요함을 얻는다. 수행자는 아무도 없는 고요한 곳에서 마음을 가라앉혀 흩어지지 않게 하고 입을 다물고 정신을 집중하여 출입식을 관한다. 숨이 코로 들어와서 목구멍으로 가고 배꼽에 이르러 다시 코로 돌아온다. 마땅히 이와 같이 성찰할지니라. 나가는 숨과 들어오는 숨은 다르다. 마음을 숨에 따라서 들어오고 나가게 하여 흩어지지 않게 한다. 이 수식(數息)으로 마음이 고요히 안정되니 중간에 아무 생각이 없다. 오직 불법승의 거룩한 덕과 고(苦)와 그 원인과 고가 없어진 것과 여덟 가지 길의 뜻을 생각하여 마음의 기쁨을 얻는다. 이를 온화(溫和)라고 한다. 마치 불어서 불을 끄면 열기가 다가와 온화함을 느끼는 것처럼 불은 얼굴에 닿지 않으나 그 열기는 느껴진다. 마땅히 이와 같이 할지니라."
붓다의 아나파나사티는 기쁨을 얻는 호흡법이요, 고요 속에서 깨달음을 얻는 호흡법이다. 무위도의 실천으로 부처의 길인 흰 길을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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