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

8. 안반수의로 얻는 신통력의 세계 - 1. 들숨과 날숨의 그침을 깨닫는다.

通達無我法者 2007. 12. 5. 17:16

8-1. 들숨과 날숨의 그침을 깨닫는다.

 

날숨과 들숨을 스스로 깨닫고, 날숨과 들숨을 스스로 안다. 그때를 깨달음이라고 하고 이후에는 앎이라고 한다. 깨달음이란 숨의 길고 짧음을 깨닫는 것이고, 앎이란 곧 숨이 생하고 없어지며, 거칠고 가늘며, 느리고 빠름을 아는 것이다. 날숨과 들숨의 깨달음이 다하여 그침은, 나가고 들어오는 숨이 바라는 대로 깨달음이 그친 것이다. 또한 만물의 몸이 생하고 다시 없어짐을 생각한다. 마음이란 곧 뜻이 그친 것이다. 공을 보아 관하고, 관한다는 것은 도를 행하는 관을 얻어 다시는 몸을 보지 않음이니, 곧 공에 떨어졌다는 의미이다.

해설
이미 붓다의 아나파나시티법은 수식 數息. 상수 相隨. 지 止. 관 觀. 환 還. 정 淨의 여섯 단계로 진행됨을 보았다.

수식이나 상수의 단계에서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감지한다. 여기서 더 진행되어 감지작용이 그치고 한 곳에 정지되면(止) 다시 사물의 관조로 이어지고(觀), 자기 본심으로 돌아와서(還)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 청정한 세계에서 노닐게 된다(淨).

숨이 들어오고 나감을 아는 지각은 아나파나사티의 첫 단계에서 반드시 따라야 하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평소에 습관적으로 무질서하고 잘못된 호흡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호흡에 정신을 집중하여 들어오고 나가는 숨을 감지하는 것은 들어오고 나가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깨달아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렇게 호흡의 들어오고 나감을 감지하면 다시 그 호흡이 생하고 멸함을 알게 되고, 또한 거칠거나 가늘거나 느리거나 빠름도 알게 된다.

이를 알면 호흡의 진실한 모습을 알게 된다. 호흡이 생멸을 거듭하면서 이어진다는 사실과, 거칠거나 가늘게 들어오고 나가는 호흡의 옳고 그름도 알게 된다. 또한 거칠고 가는 호흡을 조절하게 되며 왜 느린 호흡과 빠른 호흡이 있는지도 알게 된다. 또한 호흡의 모습을 있는 그래도 알아 감지함으로써 호흡과 내가 떠날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호흡과 같이 있으면서 동시에 떠나고 있다. 
호흡은 생리현상이므로 몸에 속한다. 마음은 호흡을 일으키는 근본 바탕이지만 양자가 같지는 않다. 다시 말하면 숨의 들어오고 나감을 아는 것도 마음이지만, 그 인식작용이 그친 곳에 자리잡고 있는 것도 마음이다. 인식작용이나 느낌은 마음의 겉에 나타난다. 그 밑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마음은 텅 빈 허공과도 같다.

숨의 들어오고 나감을 잘 살펴서 들어올 때 들어오게 하고, 나갈 때 나가게 하거나, 거친 숨을 가늘게 가라앉히거나, 빠른 숨을 느리고 깊게 하는 것은 호흡의 효과를 노린 생각이 움직인 결과다. 이러한 생각이 마음의 움직임이며, 그 생각이 그친 곳에 근본 마음이 있다. 따라서 숨의 들어오고 나감을 느끼거나 그 호흡을 살펴서 그친 상태로 가면 마음의 근본상태로 돌아간다. 결국 호흡수련은 허공과 같은 마음의 근본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숨의 들어오고 나감을 감지하여 그 모습을 알아차리면 곧 만물의 실상을 알게 된다. 만물이 생하고 멸하는 실상은 호흡의 생멸과 다르지 않다. 또한 마음의 생멸도 만물의 생멸하는 이치와 같다. 그러므로 마음이 생하여 뜻이 일어나고 마음이 멸하여 뜻이 그친다. 뜻이 일어나면 그쳐야 한다. 생하고 멸하는 것이 만물의 실상이다. 생멸의 이치를 알아서 숨이 들어오고 나가게 하고, 그 숨에 마음이 같이 하여 마음이 그치면 숨도 들어오고 나가면서도 들어오고 나감이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상태가 곧 공 空이다. 공의 진리란 바로 숨 속에 있고 마음이 일어나고 없어지는 속에 있다.

불교는 공의 증득을 통해 공을 실천하고 공을 사는 종교이다.
공을 공 그대로 보고 행하는 것이 바로 도(道)이다. 공을 관행(觀行)하면 모든 사물의 겉에 나타난 모습에 끌려서 집착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도를 행하여 관을 얻어서 다시 몸을 보지 않는다'고 했다. 몸이란 겉에 나타난 모습이다.

우리는 겉에 나타난 모습을 진실한 모습으로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그에 끌려서 고민한다. 마음의 겉에 나타난 모든 감지작용이나 의식작용은 참된 모습이 아니다. 모든 작용이 그친 고요한 마음이 인연법에 따라서 나타난 것이다. 바람이 물결을 일으키나 물의 본질은 격랑이 일지 않고 맑고 깨끗하며 고요한 거울과 같다.

그러나 사물의 공성을 본다는 뜻은 몸을 보지 않고 몸 이외의 다른 것을 본다는 의미는 아니다. 몸을 보지 않으면서 몸을 보는 것이다. 겉에 나타난 몸을 보지 않고 보이지 않는 다른 것을 찾는 행위가 바로 공에 떨어진 것이다.

물결을 떠나서라면 끝내 물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물결만이 물이라고 집착해도 끝내 알지 못하리니, 물은 물결이 아니면서 물결이기도 하다. 겉에 나타난 모습이 사물의 실상이 아니면서 또한 실상이기도 한 것이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마음은 의식작용을 떠나서 달리 있으면서 의식작용 그 자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올바른 호흡을 닦으려면 의식을 집중하여 들어오고 나가는 숨을 알아차려서 호흡을 올바르게 조절하는 동시에 무의식 속에서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무심 속에서 올바르게 행해지는 호흡훈련이 '아나파나사티'이다. 이러한 올바른 호흡에는 정신집중이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도 있다. 이것이 바로 공의 호흡이다. 호흡의 들고 남이 어찌 공의 도리를 벗어날 수 있으랴. 호흡만이 아니라 우리의 생체를 이루고 있는 세포조직도 공 그대로 생멸의 연속이다. 우리의 마음 역시 공의 도리에 따르고 있으니 호흡에 정신을 집중하여 들어오고 나감을 감지하는 단계에서 그치는 단계로 가는 것, 그것이 바로 공의 실천이다.
아함경의 ≪아리비타경 阿梨琵咤經 Arittba≫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부처님이 사위국의 기수급고독원에 머물고 계셨을 때 여러 비구에게 고하셨다고,
  '내가 설한 바와 같은 안나반나(安那般那)anapana의 염(念)을 너희들이 닦고 있느냐, 어떠하냐?'
이때 무리 속에 앉아 있던 아리비타라는 한 비구가 자리에서 일어서 의복을 차리고 부처님께 예배한 후,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합장하며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설하신 아난반나의 염은 제가 이미 닦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아리비타 비구에게 고하셨다.
  '너는 어떻게 내가 설한 안나반나님을 수습하였는가?'
비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과거의 모든 것을 돌아보지 않고 미래의 모든 것에도 즐거움을 갖지 않으며, 현재의 모든 것에도 물들어 집착하지 않고 안과 밖의 생각도 이미 끊었나이다. 저는 이와 같이 이미 세존께서 설하신 안나반나념을 닦았나이다.'
부처님이 아리비타 비구에게 고하셨다.
  '너는 실로 내가 설한 안나반나념을 닦았다. 닦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네가 닦은 그 안나반나념보다 더욱 오묘하여.... 그보다 뛰어난 것이 있다. 그것은 앞에서 설한 바와 같이 성읍이나 마을에 의지하여 입식과 출식의 멸함을 잘 관찰하여 익히면 아리비타 비구보다 승묘하니 네가 닦은 안나반나념보다 나은 것이다'라고 하시니, 여러 비구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환희하여 봉행했다."

여기서 붓다는 참된 안나반나념은 걷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 간에 한 숨 한 숨 들어오고 나감을 생각하여 그것을 각지하고, 숨이 그치는 것을 잘 관찰하여 그친 상태에 이르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들어온 숨이 그쳤을 때는 상쾌함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이 희(喜)와 낙(樂)의 각지이다. 내쉰 후 숨이 그쳤을 때에는 기쁨을 느끼고 마음이 편안하게 안정된다. 그러므로 경에서는 입식에 희락을 각지하고 출식에 심열(心熱)과 심정(心定)을 각지한다고 했다. 그리고 '아나반나념을 닦아서 몸에 숨이 그치고, 마음에 숨이 그치고, 깨달음과 관함이 있으면 고요히 적멸하여 순일하게 분명한 생각이 닦아진다(≪안나반나념경≫).'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