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

8-5. 호흡으로 12인연법을 안다.

通達無我法者 2007. 12. 5. 17:20

8-5. 호흡으로 12인연법을 안다.

사(思)는 또한 사물이 되고 유(惟)는 해의(解意)가 된다. 해의는 곧 십이인연(열두 가지 인연)의 일을 아는 것이다. 또한 사(思)를 염(念)이라고 하고 유(惟)를 헤아림이라고도 한다.

해설
십이인연을 헤아려서 그 도리를 아는 것이 사유(思惟)이다. 다시 십이인연만이 아니라 모든 사물의 실상을 헤아려서 올바르게 아는 것이 사유라고 거듭 설명하고 있다. 

모든 사물은 십이인연으로 대표될 수 있다. 붓다께서는 보리수 밑에서 열두 가지의 인연을 순(順)과 역(逆)으로 관찰하여 연기의 도리를 깨달으셨다. 열두 가지의 인연은 일체만물이 생하고 멸하는 도리이며 그 속에 생로병사라는 삶의 실상이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호흡에서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은 바로 십이인연과 다름이 없다. 숨이 들어오고 나감이 삶 자체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죽음이기도 하다. 생로병사가 무명으로부터 생긴다는 순관은 연생(緣生)의 도리요, 죽음이 없으면 생이 없고, 무명도 없다는 역관은 연멸(緣滅)의도리이다. 이러한 생이나 멸의 도리는 호흡의 들어오고 나가는 도리이기도 하다.

생로병사로 대표되는 삶의 현실은 정시작용인 식(識)과 물질인 명색(名色)이 만남으로써 생긴다. 십이인연법은 숨의 출입과 마음이 상응하는 도리이므로 붓다의 호흡은 '아나파나(anapana)'와 '사티(sati)'가 합쳐진 것이다. 명색(名色)인 출입식과 식(識)인 염(念)이 만나서 올바른 호흡이 이루어지는데 들어오는 생과 나가는 멸이 이어지면서 우리의 삶이 존재한다.

십이인연의 12라는 숫자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존재는 생과 사의 되풀이되며 생사 속에는 열두 단계가 있다. 십이인연법은 원인과 결과이며, 또한 연기의 도리이기도 하다.

호흡을 보고 12의 연기법을 보면 무위의 도를 사유하게 된다고 했다. 열두 가지 인연은 무명으로부터 시작하고 무명으로 끝난다. 무위의 도를 사유하는 것은 생과 사요, 생각함이 없이 도를 행함은 생사를 끊음이다. 생사 속에서 생사를 끊음이 또한 무위의 도이다.

호흡에 있어서 지(止)와 관(觀)으로 나아가면 생사가 없는 속에 생사가 있다. 사유하지 않고 헤아려서 알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환(還)과 정(淨)으로 가면 헤아림이 완전히 없어지니 생사를 끊었다고 한다. 

생사를 끊었기 때문에 인연에 따라서 생과 사를 자유로이 할 수 있다. 이러한 환과 정은 마음을 억제하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어디에도 마음이 끌리지 않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성찰해서 아는 것이다. 경에서 비유하기를 문지기가 높은 누대에 앉아서 움직이지 않고 많은 사람들의 오고 가는 모습을 성찰하여 아는 것 같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숨의 들어오고 나감을 관한다고 했다.
≪수행도지경(修行道地經)≫ 5권의 <수식품>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수식이란 무엇인가. 한가한 곳에 앉아서 마음을 잡아 흩어지지 않게 한 후 나가는 숨과 들어오는 숨을 헤아려서 10에 이르고, 다시 하나에서부터 센다. 만일 마음이 흩어지면 다시 헤아려서 하나에서부터 아홉에 이른다.

수행자는 이와 같이 주야로 수식을 익혀서 한 달, 1년, 십식(十息)을 얻으면 마음이 흩어지지 않나니, 자재하여 움직이지 않음이 산과 같이 출입식을 헤아려서 10에 이르게 하여 낮과 밤, 달과 해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수행하여 수식을 지킨다. 수식이 이미 정해지면 마땅히 상수(相隨)를 행할지니, 비유하면 앞에 가는 사람을 따르듯,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듯 한다. 수행도 마찬가지다. 숨의 출입에 따라서 다른 생각이 없다.

수식으로 뜻이 정해지면 자유이다. 숨의 출입을 헤아리는 수행을 하여 그 마음이 따라서 흩어지지 않으니 수식으로 마음을 항복시키는 것을 상수(相隨)라고 한다. 그런데 수행자가 이미 상수를 얻었으면 이때는 마땅히 관할지니라. 마치 목우자(牧牛者)가 한쪽에 머물러 소가 풀을 뜯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행자도 앞에서와 같이 수식으로부터 뒤의 구경(究竟)에 이르기까지 모두 관찰할지니라. 목우자가 먼 곳에서 성찰하여 소의 무리가 연못가에 있음을 보호하고 감사함과 같도다.

수식을 한곳에 잡아매 정신을 집중함을 관(觀)이라 한다. 이미 관을 이룬 수행자는 환정(還淨)으로 가야 하니 수문자(守門者)가 문 위에 앉아서 출입하는 사람을 보고 인식하여 아는 것처럼 행자도 이와 같다. 코 끝에 마음을 집중하여 마땅히 수식을 관하고 그 출입을 알아야 한다. 

비유하면 수문자가 앉아서 출입하는 사람을 볼 때 한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도 모든 사람을 아는 것처럼 마땅히 일심으로 수식하여 그 출입하는 숨을 관찰할지니라. 수행도 이와 같이 하여 환정을 세운다."

여기에서 문지기는 높은 곳에 앉아서 문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며 무슨 옷을 입고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를 모두 안다. 헤아리지 않고 헤아리는 것이다. 숨이 들어오면 들어오는 대로 맡겨두고 나가면 나가는 대로 맡겨두되, 어디에도 끌리지 않고 수식을 떠나지 않는다. 인연에 따라서 무명으로부터 행(行)이 있고, 행에서 식(識)이 있고, 식에서 명색(明色)이 있고, 명색에서 육처(六處)가 있고, 육처에서 촉(觸)이 있고, 촉에서 수(受)가 있고, 수에서 취(取)가 있고, 취에서 유(有)가 있고, 유에서 생로사(生老死)가 있다는 인연의 도리가 알려진다. 

숨이 들어오니 나가고, 나가니 들어오는 호흡의 모습이 바로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하므로 저것이 생하고,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함으로써 저것도 멸한다.'는 연기의 법을 설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호흡을 통해서 그 실상을 알면 무상과 고와 무아의 진리를 모두 알게 된다. 이것이 붓다의 호흡 목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