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

11. 안반수의와 삼십칠도행 - 1. 수행의 장애를 없애는 길

通達無我法者 2007. 12. 5. 18:01

11-1. 수행의 장애를 없애는 길

 

묻되, 만약 숙명이 상대하여 닥쳐온다면 무엇으로 물리칠 것입니까. 답하되, 수식, 상수, 지, 관, 환, 정을 행하고 《삼십칠품경》을 염하여 능히 어려움을 물리친다.
숙명의 상대함은 물리칠 수 없습니다. 수식을 행하고 《삼십칠품경》을 염하여 어찌 능히 물리칩니까? 답하되, 도를 생각하여 악을 없애기 때문이다. 만일 수식, 상수, 지, 관, 환, 정이 악을 멸할 수 없다면 세간 사람들 모두 도를 얻지 못한다. 악을 없앰으로써 도를 얻는다.

해설
앞에서 붓다의 안반수의법을 행하여 청정한 세계에 이르면 열반을 얻게 된다고 말했다. 열반은 곧 무위의 도이다. 그러나 노자의 무위와 불교의 무위는 다르다. 노자의 무위는 무위자연이므로 자연에 맡기는 것이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무위는 인연에 따르되 나쁜 인연은 제거하고 좋은 인연을 맞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고요한 세계에서 지혜를 얻으면 나쁜 인연이 왔을 때 그 원인을 알아서 제거하여 올바른 길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무위의 도이다. 이러한 지혜는 청정한 열반의 경지에서 얻어지므로 말은 같으나 뜻은 다르다.

무위라는 말이 자주 사용되었으나 노자가 말하는 무위의 도와 혼동하면 안 된다. 그래서 숙명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당연하다.

가령 나쁜 일이 숙명적으로 닥쳐왔을 때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의 문제다. 노자는 마치 어린아이와 같이 아무 생각 없이 자신을 잊으라고 했다. '나에게 큰 재앙이 오는 이유는 몸이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몸이 없으면 어찌 재앙이 있으랴.'라고 하여, 지혜를 쓰면 큰 재앙이 있고, 그것은 큰 위선이라고까지 했다. 그의 사상을 더욱 발전시킨 열자(列子)는 인간사의 모든 것은 숙명이니 그 맡겨 기뻐하거나 슬퍼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세상 만사는 명(命)이다. 그러니 어찌 억제할 것인가. 곧으면 곧은 대로 쓰고, 굽으면 굽은 대로 맡긴다. 스스로 오래 살고, 스스로 요절하며, 스스로 궁하고, 스스로 창달하며, 스스로 귀해지고, 스스로 천해지며, 스스로 부하고, 스스로 가난하니, 내가 어찌 알 것인가.'하였다. 수요(壽夭), 궁달(窮達), 귀천, 빈부는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고 오직 자연의 결정에 맡긴다는 사상이다.

그러나 불교는 그렇지 않다. 천재지변도 인간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다 부구나 궁달, 장수나 요절도 인간의 지혜로 좌우할 수 있다고 본다. 오래 살고 창달하고 귀해지고 부를 누리는 것도 그럴 수 있는 인연을 만나서 되며, 요절하고 궁하고 천하고 가난한 것도 인연에 의해서 되는 것이다. 원인 없는 결과는 있을 수 없다. 좋은 원인은 좋은 결과를 낳으므로 좋은 인연을 만들면 좋은 결과가 따른다. 여기에 불교의 멋이 있으며 적극적인 창조가 있다. 불교의 업(業) 사상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자유자재한 적극적인 자유사상이다.

숙명적인 나쁜 일이 닥쳤을 때 어떻게 대처하느냐는 인생을 어떻게 사느냐의 태도를 말한다. 불교는 어떤 역경에도 마음의 동요 없이 대처한다. 어디서 나타나는가. 바로 수식, 상수, 지 관, 환 정의 안반수의를 닦아서 마음이 고요하여 닥쳐온 숙명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여 대처하게 된다. 그러면 그 숙명을 물리칠 수 있다. 《삼십칠품경》에서는 이러한 길을 '마음에 도를 생각하기 때문에 악함을 없앤다.'고 했다. 마음이 열반적정 그대로 밝고 고요히 사물을 보고 있기 때문에 악을 없앨 수 있다고 한 것이다. 묻는 자는 열자의 숙명론과 같이 인간만사를 숙명으로 생각하여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이런 질문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안반수의와 《삼십칠품경》을 염하여 지혜로써 물리칠 수 있다고 대답하고 있다. 그러면 어찌하여 가능한가. 수식, 상수, 지, 관, 환, 정의 안반수의와 《삼십칠품경》의 세계가 얻어지면 이미 도가 이루어지면 자연히 악은 없어진다. 《삼십칠품경》은 사성제, 사의지, 사의단, 오근, 오력, 칠각의, 팔정도의 수행을 설한 경전이다. 그러므로 어떤 숙명적인 재앙이 닥쳐오더라도 능히 지혜로서 물리칠 수 있다. 물리칠 수 있는 힘이 얻어지고 물리칠 수 있는 길을 볼 수 있고, 실천할 수 있는 모든 길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숙명적인 재앙도 마음에 의해서 있고 없다. 수식, 상수, 지, 관, 환, 정은 삶이 없는 세계로 가는 수행이요, 《삼십칠품경》도 이와 같다. 마음에 삶과 죽음이 없는데 어찌 숙명의 상대함이 있으랴.

수식은 마음을 수에 집중하여 나가고 들어오는 숨을 헤아려 그 숨을 통해서 숨을 떠나는 선교한 방편이다. 숨의 출입은 생사이다. 수식은 생과 사를 통해서 생사가 없는 세계로 간다. 그러므로 수식은 수를 통해서 수를 떠나며 생사를 떠나는 첫 단계이다. 생사를 떠나는데 어찌 숙명의 핍박이 있을 수 있겠는가.

상수는 들어오고 나가는 숨에 마음이 같이 따른다. 숨이 길면 길다고 생각하고, 짧으면 짧다고 생각하고, 나가면 나간다고 생각하고, 들어오면 들어온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이미 나가고 들어오는 숨과 마음이 하나가 되었으니 생과 사는 마음속에 있다. 그러나 나가는 숨과 들어오는 숨에 있어서 행하는 바가 없이 들어오고 나가니 생과 사가 어디 있으며 숙명의 대적함이 또 어디 있으랴.

지는 몸이나 어떤 대상에 뜻대로 마음을 머물게 한다. 이미 들어오고 나가는 생사를 떠났으니 숙명의 대적함이 제거된 것이다. 그러므로 뜻대로 좋은 인연을 맞이할 수 있다.

관은 숨 속에서 숨과 같이 하는 일체의 사물을 원하는 대로 관찰하여 안다. 좋고 나쁜 인연을 가려서 좋은 인연을 지어 올바른 길을 택한다. 여기에서 살아 있는 내 몸 그대로 도의 문으로 들어간다. 이를 '세간 사람들이 도를 얻는다.'고 했다. 

환은 사물을 관해 반성하여 제법이 오직 인연법으로 생멸하고 있다고 보게 되므로 인연법에 따르는 도가 이미 얻어진 것이다.

정은 이미 번뇌가 없으니 숙명의 핍박도 없다. 청정한 도의 실천만 있다. 일체의 법에 집착이 없고 인연을 따라 행함에 선 아님이 없다.

이를 '악이 소멸되었으므로 도를 얻는다.'고 했다. 여기에 이르면 모든 장애가 정화되고 번뇌가 깨달음으로 바뀌니 일체법이 청정하여 부처 아님이 없다. 현법낙주(現法樂住)의 무학(無學)의 도가 행해진다. 법이 있는 그대로 나타나서 스스로 즐겁게 머무니 이 어찌 도인이 아니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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