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

12-26. 八正道의 실천

通達無我法者 2007. 12. 5. 21:02

12-26. 八正道의 실천

 

진리가 도가 되어 상이 아니라 고요 공이요 몸이 아니고 깨끗하지 않음을 아는 것이 직견(直見)이다. 상이 아님을 사람이 계량하여 상이라 하고, 고를 생각하여 낙이라 하고, 공을 계량하여 있다 하고, 몸이 아님을 써서 몸으로 하고, 부정함을 계량하여 청정하다고 한다. 이는 직견이 아니다. 어떤 것이 직견인가. 근본 인연을 믿고 숙명에 따라서 있음을 아는 것을 직견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직치인가. 분별사유하여 능히 선의에 이른 것을 직치라고 한다. 어떤 것이 직어인가. 선한 말을 지켜서 법을 범하지 않고 마땅히 말을 받는 것을 직어라고 한다. 어떤 것이 직업인가. 몸이 행에 응해서 범하지 않는 것을 직업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직업치인가. 도를 얻은 자를 따라서 계행을 가르치는 것을 직업치라고 한다. 어떤 것을 직정진이라 한다. 행하고 행함이 함이 없어서 주야로 중지하지 않고 방편을 버리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직정진 방편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직념인가. 항상 경에서 설한 계행으로 가는 것을 직념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직정인가. 마음이 미혹하지 않고 행을 버리지 않는 것을 직정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행은 현명한 사람으로 하여금 팔업행을 갖추게 하여 이미 행이 구족하여 곧 도를 행한다. 팔직(八直)에 다스림이 있고 행이 있으니 팔직을 행하여 출요(出要)를 얻어서 몸이 계를 범하지 않으면 직업치가 된다. 지혜와 믿음과 인욕은 몸의 행이 되고, 마음을 가진 것을 직업치라고 한다. 곧 생각하는 바가 없음을 곧음이라고 하고, 생각하는 바가 있음을 곧지 않음이라고 한다.

해설
팔정도에 대한 설명이다. 흔히 팔정도라고 하나 팔직도(八直道)라고도 한다. 팔직도는 직견(直見(정견(定見)), 직치(直治(정사유(正思惟)), 직어(直語(정어(正語)), 직업(直業), 직업치(直業治(정명(正命)), 직정진(直精進(정정진(正精進)), 직념(直念(정념(正念)), 직정(直定(정정(正定))의 여덟이다.

직견은 진리에 따라서 사물을 올바르게 보는 것이다. 모든 것은 상이 아니고 (非常, 無常), 뜻대로 안 되고 고(苦)요, 나의 몸은 있을 수 없으며(無我), 깨끗하지 않다(不淨)는 것이 실상임을 알고 그대로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은 스스로 무상을 분별하여 영원하다고 하고(常), 고를 분별하여 낙이라 하고, 공을 실체가 있다고 하고, 내 몸이 아님을 내 몸이라고 하고, 부정함을 깨끗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세상 사람들은 몸이나 감수작용, 마음이나 존재에 대해 그릇된 견해를 갖는다. 세상 사람들이 스스로 분별하여 잘못된 견해를 갖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사물을 올바르게 보면 그 사물의 인연을 따라서 살펴 어떻게 되어 있고 어떻게 되는가를 알게 되니, 이와 같이 인연법을 믿고 그 사물의 생과 멸을 보고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면 직견이다.

직치는 올바르게 이치를 가림으로써 정사유(正思惟)에 해당한다. 경에서는 '분별사유하여 능히 선의에 도달한 것'이라고 했다. 이치를 살펴서 올바른 일만 생각하게 된다. 선의(善意)란 올바른 생각이다. 마음의 올바름이란 선함이며 악함은 그릇됨이다.

직어란 무엇인가. 경에서 좋은 말을 하고, 법에 따라서 올바른 말을 하며, 그 말이 상대방에게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말이 직어, 곧 올바른 말이라고 했다. 말은 상대방에게 나의 올바른 마음을 받아들이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선한 말, 바른 말이라도 오해를 받으면 직어가 아니다. 그렇게 하려면 제스처도 필요하고, 억양도 유화해야 하며,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가려 써야 한다. 올바른 말을 하기는 쉽지 않다.

또한 직업, 곧 정업이란 무엇인가. 몸의 움직임이 그릇되지 않는 것이다. 움직임은 반드시 결과를 낳는다. 남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나타나 보일 수도 있고, 보이지 않을 수도 있으며, 나 자신에게 업력으로 남는 경우도 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말이 있다. 바늘 하나를 훔치면 남에게 해를 끼치는 정도는 미약하나, 그 행위는 자기 자신에게 소도둑질을 할 수 있는 훈습력을 짓게 한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몸의 움직임만이 아니라 마음가짐도 마찬가지다. 보이지 않는 작은 행위, 보이지 않는 마음이 움직임이 나와 남에게 얼마나 큰 힘이 미치는지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붓다는 항상 자기 자신의 마음을 보라고 하셨다.

직업치, 곧 정명(正命)은 올바른 생활이다. 직업치란 몸과 마음의 올바른 움직임을 통해서 스스로 다스린다는 뜻이다. 우리의 삶은 마음과 몸의 움직임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삶은 스스로 지은 마음과 몸의 업에 의해서 습관 지어진다. 스스로의 업에 의해서 다스려진 하루하루가 곧 우리의 삶이다. 하루의 삶이 올바르게 되려면 도를 얻어야 한다. 진리를 행하는 하루가 되어야 한다. 도를 얻는 자는 스스로 계를 지킬 뿐만 아니라 남에게도 계를 행하도록 가르친다. 곧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삶을 살아간다. 이것이 도를 얻은 자의 하루이다. 계는 좋은 습관이다. 범어로 계를 'sila'라고 하는데, 이는 좋은 훈습이라는 뜻이다. 계를 지키는 삶은 올바른 업을 익혀서 잘 다스려진 삶이다. 잘 다스려진 업행이 계이다. 경에서 말한 직치(直治)는 직업치를 가르킨다. 

그러면 직정진은 무엇인가. 경에서 '행하고 행함에 함이 없이 주야로 그치지 않고, 방편을 버리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함이 없는 행위(無行爲)'란 진실하고 열반을 떠나지 않는 행위이다. 진실하고 선한 일을 하기 위한 노력을 쉬지 않고 방편으로써 행한다는 뜻이다. 방편이란 접근한다는 뜻을 가진 범어 'upaya'의 번역이다. 상대방에게 접근하여 가까이 다가가서 행한다. 보살은 중생에게로 다가가서 제도한다. 그래서 자비행을 방편행이라고 한다. 보살이나 부처의 정진은 방편정진이다. 그러므로 깨달은 자의 올바른 정진은 선교한 방편으로써 중생제도에 꾸준히 노력한다. 석존은 일생 동안 이러한 직정진방편을 행하셨다.

다음에 직념, 곧 정념은 항상 올바른 움직임을 가지는 마음으로, '경에서 설한 계로 향한다.'고 했다. 마음이 계에 의해서 움직이면 선한 것, 바른 것만을 생각하게 되니, 경에서 설해진 것이 이런 의미이다.

직정, 곧 정정은 무엇인가. 마음이 그릇된 곳으로 달려가지 않고 한결같이 올바른 움직임을 갖는 것이다. 직정(直定)은 고요히 움직이지 않지만, 죽은 것처럼 망아에 떨어져서 일체의 상념을 끊은 상태는 아니다. 고요한 속에 움직임, 즉 고요함을 떠나지 않고 움직임이 있으나 미혹이 없는 상태이다. 진리대로 움직인다. 정정은 그릇되지 않고 한결같이 움직인다. 여기에 불교의 정(定)의 특징이 있다. 요가수행자들과 같이 수정주의자(修正主義者)들은 고요함에 그쳐서 움직임이 없으나, 불교의 정은 고요 속에 진리를 행하는 움직임이 있다. 경에서 '마음이 혹함이 없고, 행을 버리지 않은 것이 직정이다.'고 했다. 행을 버리지 않고 미혹하지 않음이 올바른 것이다. 행을 버리지 않는 전일한 행, 미혹하지 않은 진실 그대로의 전일한 고요함이다.

이처럼 여덟 가지 행이 있고 다스림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팔직도를 행하여 그 정수가 얻어지면 몸은 계를 범하지 않고 마음은 청정하여 마음과 몸이 올바르게 다스려진다. 이렇게 되면 지혜와 믿음이 생기고 인욕 등이 행해져서 마음은 본래의 청정함을 가진다. 팔정도는 팔직도요, 팔직치(八直治)라고도 하여 생각하는 바가 없이 행하여 그릇됨이 없다. 실로 칠각의의 수도(修道)에서 이것이 증진하면 드디어 깨달음에 가까이 이르니, 이들 칠각의는 깨달음의 보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드디어 도를 얻어서 깨달음에 이르면 팔정도가 스스로 충족되니 견도위(見道位)의 무루도(無漏道)라고 말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