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

13-6. 아는 것에서 되는 것으로

通達無我法者 2007. 12. 5. 21:09

13-6. 아는 것에서 되는 것으로

 

재견은 마땅히 만물이 모두 멸하리라고 안다. 이것이 제견이다. 만물은 괴패하고 몸은 마땅히 죽으니, 이로써 근심하지 않는 것이 제관이 된다. 마음이 달리면 곧 책함이 상대하여 제지하니 죄를 없애게 된다. 오는 악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선(禪)이다.

해설
진리를 보는 것과 관하는 것은 서로 다르다. 보는 것은 단순히 안다는 뜻이요, 관한다는 것은 안 것을 토대로 옳게 파악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만물이 생하고 멸하는 도리를 알아야 진리를 알게 되니, 이를 제견(諦見)이라고 한다. 만물의 도리를 알고 마음으로 파악하여 그대로 처리하는 것이 제관(諦觀)이다. 제견보다는 제관이 보다 깊은 것이다. 제견을 통해서 제관이 이루어지므로 선(禪)에서는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깨달아야 한다고 했다. 깨달음은 관을 통해서 자신의 것으로 생명화된 세계이다.

불교의 관법은 관에 의해서 생명화하는 수행이다. 문(聞)에서 사(思)로, 다시 수(修)를 거쳐서 관으로 들어간다. 선에서 지(止)와 관(觀)을 쌍수(雙修)하라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지에서 알게 되고, 관에서 지난날의 것과 바뀐다. 근심하던 일이 근심하지 않게 바뀌고, 괴로움이 즐거움으로 바뀐다. 가치가 전환된다.

사진을 찍을 때는 렌즈에 비친 그림자가 거꾸로 나타난다. 이는 지의 경지다. 그러나 셔터를 누르는 동시에 그 그림자가 올바른 모습으로 찍히는 것이 관의 세계다. 통상적인 마음에 비친 것과 우리의 마음이 전도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마음을 고요히 하여 다시 보면 사실과 반대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다시 더 깊이 파악하면 그 역시 전도된 것이요, 사실은 이와 반대이면서 통상적인 마음에 비춘 것과는 다른 차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겉으로 보기에는 처음 것과 같은 듯하나 그렇지 않다. 같으면서도 같지 않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되, 앞서의 산과 다르고 앞서의 물과 다른 그런 산이며 물이다. 

이처럼 관을 통해서 만물의 실상을 관하고 마음이 고요함에 이르면 몸의 죽음을 근심하지 않고, 마음이 악으로 달려가더라도 바로 그 마음을 제어하여 죄를 짓지 않게 된다. 더 정확히 말하면 마음이 악으로 달려가지 않게 된다. 마음이 비껴서 달리면 악으로 간다. 우리의 마음은 무시 아래로 훈습력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항상 움직여서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에 끌린다. 그러나 이를 억제하여 받아들이지 않게 하는 것을 선이라고 했다. 마음은 움직이지 않을 때가 가장 이상적이다. 그런 마음의 움직임을 억제하는 일도 수행의 힘으로 가능하다. 수행은 아는 것에서 되는 것으로 가는 길이고, 진리 그대로 되는 것이 도이며 수행이다. 진리 그대로 된 사람이 도인이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