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

염화미소

通達無我法者 2007. 12. 10. 11:15

같은 견해 상징적으로 나타내

부처님과 가섭은 같은 마음

상통하는 설법의 참뜻 알아

 

어느 날 범천왕이 부처님께서 설법하고 계시는 영산회상에 이르렀다. 거기에서 금색바라꽃을 가지고 부처님께 바치고 나서 자신의 몸을 법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는 부처님께 중생을 위하여 설법해주실 것을 청하였다. 세존께서는 범천왕의 몸으로 만들어진 법상에 올라 범천에게서 받아든 꽃을 대중을 향해서 치켜들었다. 그러자 인간세계와 천상세계의 백만 억 대중은 모두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몰라 멀뚱멀뚱하였다. 그러나 오직 마하가섭만은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에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지니고 있는 정법안장과 열반묘심을 이제 저 마하가섭에게 나누어 부촉하는 바이다.”

 

〈대범천왕문불결의경〉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이 경전은 위경으로 알려져 있는데 왜 굳이 이와 같은 일화를 수록하고 있는 것일까. 이것이 곧 본 내용만큼이나 중요하다. 이 내용은 흔히 ‘염화미소(拈花微笑)’라는 고사로 널리 알려진 내용이다. 범천왕은 불교의 우주관으로 말하면 색계의 초선천에 주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굳이 색계천에 한정시킬 필요는 없다. 다만 부처님과 마하가섭을 이어주는 매개체로서 역할을 담당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범천왕이 바친 금색바라꽃도 부처님께서 선정삼매로부터 만들어낸 일종의 제스처이다. 이에 가섭은 그 선정삼매를 경험하고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획득하였기에 부처님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미소지을 수 있었다.

 

부처님과 가섭의 마음은 동일한 마음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금색바라꽃을 드는 순간 이미 마하가섭의 미소까지 함께 치켜든 것이다. 그러나 대중은 그와 같은 도리를 모른다. 부처님께서 꽃을 드니 가섭이 미소를 짓는다는 시간적인 의미로 해석을 가한다. 나아가서 가섭은 알고 대중은 모른다는 분별심으로 접근한다. 정작 알고 모르는 것은 결코 부처님께서 치켜든 꽃에 대한 의미가 아니다. 꽃을 들거나 돌멩이를 들거나 굳게 쥔 주먹을 보이거나 손바닥을 보이거나 특별할 것은 없다. 단지 설법하는 자리에서 부처님께서 대중에게 제시한 것이 금색바라꽃으로 드러난 것일 뿐이다. 설법의 내용이 곧 범천왕의 등장과 세존의 염화와 가섭의 미소로 멋들어지게 연출된 것이다.

 

그러나 꽃을 바친 행위와 치켜든 행위와 미소를 보인 행위 등 그것 자체가 설법이고 진리의 표현인 줄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부처님께서 설법을 하시다가 범천왕이 바친 꽃을 치켜들었다고 생각을 한다. 설법과 꽃을 바치는 것과 그 꽃을 받아든 것과 가섭이 미소를 지은 것을 별개의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설법이 꽃이고 범천왕이 몸으로 만들어 바친 법상이며 범천왕의 헌화와 부처님의 염화와 가섭의 미소가 그대로 설법의 연출이었다. 그와는 달리 설법을 굳이 입과 언설을 통한 제스처로만 이해하려 하면 절대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다. 나아가서 심하게 왜곡해버리고 만다.

 

바로 이와 같은 입장을 설법의 장으로 끌어들여 생생한 모습으로 드러낸 것이 곧 이 염화미소의 설법이다. 때문에 이 염화미소의 고사는 일찍부터 세존과 마하가섭 사이에 벌어진 삼처전심 가운데 일처전심의 일화로 회자되어 왔다. 염화미소가 이심전심의 본질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염화와 미소가 둘이 아닌 도리를 파악하지 않으면 안된다. 설령 가섭이 염화하고 세존이 미소를 지었다 해도 전혀 다를 것은 없다. 그리고 범천왕이 설법하고 가섭이 꽃을 들었다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중요한 것은 염화와 미소가 아니다. 세존과 가섭 사이에 상통하고 있는 설법의 진의를 터득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섭이 되고 누구나 범천왕이 된다. 부처님은 수수께끼를 제시한 것이 아니다. 진리의 도리를 그대로 행위로 드러내 보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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