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입능가경(入楞伽經)

입능가경 제 7 권

通達無我法者 2007. 12. 24.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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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능가경 제 7 권
  
  
  원위 천축삼장 보리류지 한역
  
  
  
8. 무상품(無常品)
  
  그 때 거룩한 대혜보살이 부처님께 또한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무상(無常)을 말씀하시고, 모든 외도 역시 무상을 말합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명자와 장구(章句)에 의하여 말씀을 하시기를, '모든 행이 무상함은 생멸의 법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법은 진실한 것입니까? 허망한 것입니까?
  세존이시여, 다시 몇 가지 무상이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거룩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훌륭한 대혜여, 일체 외도가 허망하게 여덟 가지 무상을 분별하여 말하니, 무엇이 여덟 가지인가? 첫째는 짓는 바를 열어 일으켜[發起] 짓지 않음이니, 이를 무상이라 이름한다.
  어떤 것을 열어 일으킨다고 이름하는가? 생하는 법[生法]과 생하지 않는 법[不生法]과 항상된 법[常法]과 항상됨이 없는 법[無常法]이니, 열어 일으켜 무상이 된다고 이름한다.
  둘째는 형상이 휴식함을 무상이 된다고 이름함이요, 셋째는 색(色) 등이 곧 무상이요, 넷째는 색이 전변(轉變)하므로 달라지는 무상이니, 모든 법이 상속(相續)하다가 자연히 멸하는 것이 우유와 타락[酪]이 전변함과 같다. 일체법에서 그 변함을 보지 아니하며, 또한 멸함을 보지 않음이니 무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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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이름함이다.
  다섯째는 다시 다른 외도들이 있어 물건이 없는 것으로서 무상이 된다고 이름함이요, 여섯째는 유법(有法)과 무법(無法)이 모두 무상함이니, 일체법은 본래 생함이 아니므로 무상이 된다고 이름함이니 무상법이 그 가운데에 화합하였기 때문에 무상함이요, 일곱째는 다시 다른 외도들이 있어서 '본래 없다가 후에 있음을 무상이 된다'고 이름함이니, 말하자면 모든 대(大)의 나는 바 모양이 없어지므로, 그 생함을 볼 수 없고, 상속체(相續體)를 떠났기 때문에 무상이 된다고 이름한다. 여덟째는 불생(不生)의 무상이니, 말하자면 항상됨이 아니니, 그러므로 무상이다. 모든 법의 유무와 생(生)과 불생을 보거나 미진(微塵)까지 관찰하여도 법의 생함을 보지 않으므로 '불생이다'라고 말함이니, 모든 법이 생하지 않음이다.
  대혜여, 이를 무생무상(無生無常)의 모양이라 이름한다. 그러나 모든 외도는 저 법이 생하는 것이 아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므로 모든 법의 불생을 분별하여 무상이라고 말한다.
  대혜여, 외도가 무상의 법을 분별하여 물건이 있다고 말하니, 저 외도는 자심(自心)의 허망으로 무상과 상과 무상 아님을 분별함이니, 물건이 있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인가? 자체가 멸하지 않는 까닭이니, 자체가 멸하지 않는 것은 무상의 자체가 항상 멸하지 않는 까닭이다.
  대혜여, 만약 무상법이 물건이 있는 것이라면 마땅히 모든 법을 낼 것이니, 저 무상이 능히 인(因)을 짓기 때문이다.
  대혜여, 만약 일체법이 무상을 떠나지 아니하였다면 모든 법의 유무(有無)가 마땅히 나타나리니, 무슨 까닭인가? 막대·나무·기와·돌과 같아서 능히 파괴되며, 파괴되어질 물건이어서 모두 다 파괴될 것이니, 여러 가지 다르고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상의 인(因)은 일체법에 없는 법이며, 또한 인(因)도 아니며, 또한 과(果)도 아니다.
  대혜여, 또한 모든 허물이 있으니, 저 인과는 차별이 없기 때문에, 이는 무상이며, 저는 과(果)라 말하지 못할 것이니, 인과가 차별되는 까닭이다.
  일체법이 상(常)이라고 말하지도 못할 것이니, 일체법이 인(因)이 없는 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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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닭이다.
  대혜여, 모든 법에 인(因)이 있지만, 그러나 범부는 다른 일이 능히 다른 과를 내지 못함을 깨닫지 못한다.
  대혜여, 만약 다른 일이 능히 다른 과를 낸다면, 인이 다른 것이 마땅히 일체 모든 법을 낼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또한 다시 허물이 있으니, 마땅히 인과의 차별로 차별을 볼 것이다.
  대혜여, 만약 그 무상이 물건이 있는 것이라면, 마땅히 인체(因體)의 짓는 바 일과 같을 것이다.
  또한 다시 허물이 있으리니, 한 법에 곧 마땅히 일체 모든 법을 구족하여 일체 짓는 바와 같아서, 인과와 업상(業相)의 차별이 없을 것이다.
  또한 다시 허물이 있으리니, 스스로 무상(無常)이 있으면, 무상은 무상의 자체(自體)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다시 허물이 있으리니, 일체 모든 법의 무상이 마땅히 항상됨일 것이다.
  또한 다시 허물이 있으리니, 만약 그 무상이 모든 법과 같다면 3세(世)법에 떨어질 것이다.
  대혜여, 과거 색(色)은 무상과 같으므로 이미 멸했으며, 미래 법은 아직 나지 않아서, 색의 무상함과 같으므로 나지 않음이요, 현재의 있는 법은 색을 떠나지 못했으니 색이 저 모든 대상(大相)으로 더불어 5대(大)에 의지하고 진(塵)에 의지하였기 때문에, 그러므로 멸하지 않음이니, 저것과 저것이 서로 나지 않는 까닭이다.
  대혜여, 일체 외도는 모든 대(大)를 '멸함이 아니다' 라고 하기 때문에, '3계(界)가 대에 의지하고 미진(微塵)에 의지한다'라고 하니, 그러므로 저 법에 의하여 생(生)·주(住)·멸(滅)을 말한다.
  대혜여, 이 법을 떠나고는 다시 4대(大)와 모든 진(塵) 등의 법이 없으니, 저 외도의 허망한 분별로서 '일체법을 떠나고도 다시 무상이 있다'라고 함이다. 그러므로 외도는 '모든 대(大)가 불생불멸이다'라고 말하니, 자체상이 항상 멸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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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그는 말하기를, '열어 일으켜[發起] 일을 하다가 중간에 그만 두는 것을 무상이 된다고 이름한다'라고 한다. 모든 대(大)가 다시 모든 대를 열어 일으킴은 있으나, 저것과 저것의 다른 모양과 같은 모양이 생멸 아닌 법은 없다.
  모든 법의 생멸 아님을 봄으로 저 곳에서 무상이라고 하는 지혜를 낸다.
  대혜여, 어떤 것을 형상이 휴식함을 무상이라 이름함인가? 말하자면 능조(能造)와 소조(所造)인 형상으로, 형상이 다름을 본 것은 길고 짧음과 같다.
  모든 대(大)가 멸함은 아니나, 모든 대의 형상이 전변함을 보지만, 저 사람은 '승구(僧佉)1)'법에 떨어져 있는 것이다.
  대혜여, 또한 '형상이 무상하다'라고 한 것은, 말하자면 어떤 사람은 색(色)에 나아가서[卽] '무상이다'라고 이름함이니, 저 사람은 형상이 무상함을 본 것이요, 모든 대가 무상한 법이라 함은 아니다.
  만약 모든 대(大)가 무상이라면, 곧 세간의 일체로서 세상일을 논설할 수 없으리니, 만약 세상일을 논한다면, '로가야타의 사견(邪見) 붕당에 떨어져서, 일체 모든 법이 이름뿐이다'라고 말할 것이며, 또한 모든 법의 자체상(自體相)이 생함을 볼 것이다.
  대혜여, 전변(轉變)함이 무상이란, 말하자면 모든 색의 여러 가지 다른 모양을 본 것이요, 여러 대(大)가 전변함은 아니니, 비유컨대 금으로 장엄구(莊嚴具)를 만들면 형상은 전변함을 보이지만 금의 자체가 달라진 것이 아닌 것과 같아서 다른 법의 전변함도 또한 다시 이와 같다.
  대혜여, 이와 같이 외도는 허망한 분별로 법의 무상함을 보고 '불[火]이 여러 대(大)를 태우지 않으며 자체도 타지 않으나, 저 여러 대의 자체가 차별하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대혜여, 모든 외도는 말하기를, '만약 불이 능히 여러 대를 태운다면, 곧
  
  
1) 범어(梵語) s khya, 인도 육파철학의 하나인 샹키야 학파를 말하고, 승기(僧企耶)로 음역(音譯)되고 수론(數論)으로 의역(意譯)된다. 혹은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를 가리키기도 한다. 현응(玄應)의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10권에서는 "그 논(論)을 25근(根)으로 종(宗)을 삼는데, 옛날에는 25체(諦)라고 하였다"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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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대가 단멸할 것이니, 그러므로 타지 않는다'라고 한다.
  대혜여, 나는 말하기를, '대(大)와 모든 진(塵)은 상(常)도 아니며, 무상도 아니다'라고 하니, 무슨 까닭인가? 내가 바깥 경계가 있다고 말하지 않는 까닭이다. 나는 '삼계(三界)가 다만 자심(自心)이다' 라고 말하고, '여러 가지 모든 상이 있다'라고 말하지 아니하니, 그러므로 불생불멸이라 말한다.
  오직 4대(大)의 인연이 화합했을 뿐이요, 대와 진(塵)은 실로 있는 법이 아니며, 허망한 마음으로 두 가지 가취(可取)와 능취(能取)의 법을 분별함이니, 여실히 두 가지 분별을 능히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바깥의 유무(有無)인 보는 상을 떠나면, 오직 자심의 분별과 작업(作業)이니, 이름은 생함이나 업은 생하지 않으니 유무의 분별심(分別心)을 떠났기 때문이다.
  대혜여, 무슨 까닭으로 항상됨도 아니며, 항상됨 아님도 아닌가? 세간과 출세간의 상상(上上)인 모든 법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항상됨이라 말하지 아니할 것이다.
  무슨 까닭으로 무상이 아닌가? 오직 이 자심의 분별인 견(見)임을 능히 깨닫지 못한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상이 아니다.
  그러나 모든 외도는 사견(邪見)으로 2변(邊)에 집착하는 것에 떨어져서 자심의 허망한 분별임을 알지 못하니, '성인의 무상을 분별함'이 아니다.
  대혜여, 일체 모든 법이 모두 세 가지 있으니 무엇이 셋이 되는가? 첫째는 세간의 법상[世間法相]이요, 둘째는 출세간의 법상[出世間法相]이요, 셋째는 출세간 상상의 수승한 법상[出世間上上勝法相]이다. 언어(言語)에 의하여 여러 가지로 설법하여도 범부는 깨닫지 못하며 알지 못한다."
  그 때 세존께서 거듭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처음으로 지어짐과
  형상이 다름을 멀리 떠났지만,
  '무상이다', '물건이 있다'라고 이름하여
  외도는 허망하게 분별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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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법은 멸함이 없고
  여러 대(大)도 자성(自性)에 머무름인데
  여러 가지 견해에 떨어져서
  외도들은 무상(無常)이라 말하네.
  
  저 모든 외도는 말하기를,
  '모든 법은 생멸이 아니다'라고 하지만
  여러 대의 자체(自體)는 스스로 떳떳하니
  어떤 법이 무상일 것인가.
  
  일체 세간은 오직 마음 뿐으로,
  마음에서 두 경계를 본 것이니,
  가취(可取)와 능취(能取)의 법과
  아(我)와 아소(我所)법은 없는 것이네.
  
  삼계의 위아래 법을
  나는 모두 마음이라 말하니,
  모든 마음법을 떠나면
  다른 것을 다시 얻을 수 없으리.
  
  
9. 입도품(入道品)
  
  그 때 거룩하신 대혜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또한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원하오니, 세존께서는 저희를 위하여 일체 보살과 성문과 벽지불의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가는 체상(體相)을 말씀해 주십시오.
  저희와 일체 보살들이 만약 멸진정에 들어가는 차제상(次第相)의 교묘한 방편을 잘 앎을 얻는다면, 성문과 벽지불의 삼매(三昧)·삼마발제(三摩跋提)인 멸진정의 낙(樂)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이며, 성문과 벽지불과 외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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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혹한 법에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거룩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훌륭한 대혜여, 자세히 듣고 자세히 들어라. 마땅히 그대를 위하여 말하리라."
  대혜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지신 세존이시여, 가르치심을 잘 받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이 초지(初地)로부터 6지(地)에 이르러 멸진정에 들며, 성문과 벽지불도 또한 멸진정에 든다.
  대혜여, 보살마하살이 7지(地)에서 생각 생각이 멸진정에 드니, 여러 보살이 모두 능히 일체법의 유무(有無)상을 멀리 떠난 까닭이다.
  대혜여, 성문과 벽지불은 능히 생각 생각이 멸진정에 들지 못하니, 성문과 벽지불은 유위(有爲)의 행(行)에 반연하여 멸진정에 들어가기 때문에, 가취(可取)와 능취(能取)의 경계에 떨어져 있다. 그러므로 성문과 벽지불은 7지(地)에서 생각 생각이 멸진정에 능히 들어가지 못한다.
  성문과 벽지불은 놀래고 두려워하는 생각을 내니, 모든 법이 다른 모양이 없는 데에 떨어질까 두려워하는 까닭이다.
  모든 법의 여러 가지 다른 모양인 법과 법 아님, 선(善)과 불선(不善)의 법, 같은 모양과 다른 모양이 있음을 깨닫고 멸진정에 드니, 그러므로 성문과 벽지불은 능히 7지에서 생각 생각이 멸진정에 들어가지 못하며, 선교(善巧) 방편인 지혜가 없는 것이다.
  대혜여, 7지 보살마하살은 성문과 벽지불의 심(心)·의(意)·의식(意識)을 전멸(轉滅)한다.
  대혜여, 초지와 내지 6지(地) 보살마하살은 삼계(三界)가 다만 자심의 심·의·의식이요, 나와 내 것이라는 법을 떠나서 오직 자심의 분별임을 보고, 바깥 법의 여러 가지인 모든 모양에 떨어지지 않는다.
  오직 이 범부의 속마음이 어리석어서 2변(邊)에 떨어져서 가취와 능취의 법을 보지만, 아는 것이 법이기 때문에 끝없는 예로부터 오면서, 몸과 입과 뜻과 망상과 번뇌와 희론의 훈습으로 모든 법을 내는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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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혜여, 8지에서는 일체 보살과 성문과 벽지불이 열반이라는 생각에 든다.
  대혜여, 보살마하살은 자기 자심의 삼매와 부처님의 힘을 입어서 삼매락(三昧樂)의 문에 들어가서 열반에 떨어져 머무르지 아니하니, 여래의 지위를 만족하지 못한 까닭이다.
  만약 저 보살이 삼매문에 머무르는 자는 일체 중생을 휴식하게 하며 도탈(度脫)하기를, '여래종(如來種)을 끊으며, 여래가(如來家)를 멸함은 여래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한 모든 경계를 보이기 위함이니, 그러므로 열반에 들어가지 않는다'라고 한다.
  대혜여, 성문과 벽지불은 삼매락의 문인 법에 떨어지니, 그러므로 성문과 벽지불은 열반이라는 생각은 낸다.
  대혜여, 보살마하살은 초지로부터 7지에 이르러서는 공교로운 방편을 갖추어서, 심·의·의식의 상(相)을 관찰하여, 나와 내 것이라 함으로 상을 취하는 법을 멀리 떠나고,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을 관찰하고, 같은 모양과 다른 모양을 관찰하여 4무애(無礙)인 공교로운 방편의(方便義)를 잘 알고, 자재(自在)롭게 차제로 모든 지위와 보리분법(菩提分法)에 들어간다.
  대혜여, 내가 만약 모든 보살마하살의 같은 모양과 다른 모양인 법을 말하지 않는다면, 일체 보살은 모든 지위의 차례를 여실히 알지 못하고, 외도의 사견(邪見) 등의 법에 떨어질까 두려워하여, 나는 차례로 모든 지위의 모양을 말하였다.
  대혜여, 만약 사람이 차례로 모든 지위에 들어간다면 다른 도(道)에 떨어지지 않는다.
  내가 말한 '모든 지위의 차례인 모양'은 오직 자심에서 모든 지위의 차례 및 삼계에서 여러 가지 행상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모든 범부는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니, 모든 범부는 깨달아 알지 못한 까닭이다.
  그러므로 나와 일체 부처님께서 모든 지위의 차제의 모양과 삼계의 여러 가지 행상(行相)을 건립함을 말한다.
  대혜여, 성문과 벽지불은 제8보살 지위의 적멸(寂滅)삼매의 낙문(樂門)을 좋아하고 취하였으므로 오직 자심의 견(見)임을 잘 알지 못하고, 자기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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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 같은 모양의 훈습으로 장애함에 떨어지므로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의 견해인 허물에 떨어져서 분별하는 마음으로 열반이 된다고 이름하며, 능히 모든 법의 고요함을 알지 못한다.
  대혜여, 보살마하살이 고요한 삼매락의 문을 봄으로서 본원(本願)을 기억하고 생각하여 큰 자비의 마음으로 중생을 건져주며, 10무진(無盡)의 여실행인 지혜를 아니, 그러므로 곧 열반에 들어가지 않는다.
  대혜여, 보살마하살이 허망하게 분별하는 마음을 멀리 떠나며, 능취와 가취의 경계를 멀리 떠나는 것을 열반에 들어간 것이라 이름함이니, 여실한 지혜로서 '일체 모든 법이 오직 이 자심임'을 아니, 그러므로 분별하는 마음을 내지 않는다.
  그러므로 보살은 심·의·의식을 취하지 않으며, 바깥 법이 실로 있다는 상에 집착하지 아니하지만, 그러나 불법의 수행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니, 근본지(根本智)에 의하여 전전(展轉)히 수행하여 자신에게서 부처님·여래의 증득하신 땅의 지혜를 구하려고 함이다.
  대혜여, 사람이 잠을 자면서 꿈에 큰 바닷물을 건너려고 큰 방편을 일으켜 자신을 건너려고 하다가 건너지 못하고서 중간에 문득 꿈에서 깨면, 이러한 생각을 한다. '이것이 사실인가? 허망한 것인가?' 그는 또한 생각하기를, 이와 같은 모양은 사실도 아니며, 허망도 아니요. 오직 나의 본래 진실 아닌 경계를 허망하게 분별하는 훈습의 인(因)으로 여러 가지 형색을 본 것이니, 형색의 뒤바뀜은 유무를 떠난 것이 아니며, 의식의 훈습으로 꿈속에 보인 것이라 함과 같다.
  대혜여, 보살마하살도 또한 다시 이와 같아서, 8지(地)에서 분별하는 마음과 초지와 7지의 모든 법 같은 모양이 꿈과 같고 환상과 같아 평등하여 차별이 없음을 보고, '모든 공용(功用)인 가취(可取)와 능취(能取)의 분별하는 마음을 떠나고, 심(心)과 심수(心數)법을 보아서, 상상분법(上上分法)을 얻지 못한 수행자를 위하여, 그로 하여금 얻게 한다.
  보살마하살이 수승한 법을 수행하는 것을 열반이 된다고 이름함이요, 모든 법을 멸하는 것을 열반이 된다고 이름함이 아니다.
  보살마하살은 심·의·의식의 분별하는 상을 멀리 떠나므로 무생인(無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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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忍)을 얻는다.
  대혜여, 제일의(第一義)에는 또한 차제도 없으며, 차제행(次第行)도 없어서 모든 법의 고요함이 또한 허공과 같다."
  대혜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문과 벽지불이 제8보살지의 적멸락(寂滅樂)의 문에 들어간다'라고 하시며, 여래께서 또한 말씀하시기를, '성문과 벽지불은 다만 이 자심의 분별임을 알지 못한다'라고 하시고, 또한 말씀하시기를, '모든 성문은 인무아(人無我)만을 얻고 법무아공(法無我空)은 얻지 못했다'라고 하시니, 만약 이 말씀과 같다면 성문과 벽지불은 오히려 능히 초지의 법도 증득하지 못하였는데, 어찌 8지의 적멸락의 문이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내 지금 그대를 위하여 분별하여 말할 것이다.
  대혜여, 성문이 세 가지 있으니, 8지(地)의 적멸문에 들어갔다고 말한 것은, 옛적에 보살행을 닦은 자가 성문의 자리에 떨어졌다가 다시 본심에 의하여 보살행을 닦아서 한가지로 8지의 적멸락의 문에 들어간 것이요, 증상만(增上慢)인 적멸의 성문(聲聞)은 아니다. 그는 능히 보살행에 들어가지도 못했으며, 아직 삼계가 유심(唯心)임을 깨닫지 못했으며, 아직 보살의 모든 법을 수행하지 못했으며, 아직 모든 바라밀과 10지의 행을 수행하지 못했으니, 그러므로 결정(決定)의 적멸인 성문은 능히 저 보살의 행하는 바 적멸락의 문을 증득하지 못한다."
  그 때 세존께서 거듭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마음일 뿐, 가진 바가 있지 않으니
  모든 행과 부처님의 지위를
  과거 미래 현재의 부처님께서
  항상 이와 같이 말씀하시네.
  
  7지(地)는 마음의 자리[心地]요,
  가진 바가 없는 것은 8지(地)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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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지는 행(行)이라 이름하며,
  다른 자리를 나의 자리[我地]라 하네.
  
  속 몸으로 증득함과 청정함은
  이는 나의 자리라 이름하니,
  자재하고 가장 훌륭한 곳인
  아가니타천(阿迦尼咤天)에서
  
  불꽃 같이 빛나게
  묘한 광명 내나니.
  여러 가지 아름답고 좋은 것으로
  삼계를 변화로 만들어내네.
  
  3계의 빛을 변화로 나타내며
  혹은 옛적의 교화가 있는
  그 곳엔 모든 승(乘)을 말하니,
  이것이 나의 자재(自在)한 자리라네.
  
  10지(地)가 초지로 되기도 하며,
  초지가 8지로도 되고
  9지가 7지로도 되며
  7지가 8지로도 된다네.
  
  2지가 3지로 되기도 하며
  4지가 5지로도 되고
  3지가 6지도 되지만,
  적멸에는 무슨 차제가 있으랴.
  
  결정인 모든 성문(聲聞)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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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살행을 행하지 않으며,
  한가지로 8지에 들어가는 이는
  본래 보살행을 닦은 이라네.
  
  
10. 문여래상무상품(問如來常無常品)
  
  그 때 거룩하신 대혜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응공·정변지는 항상됨[常]입니까? 무상(無常)함입니까?"
  부처님께서 거룩한 대혜보살마하살에게 말씀하셨다.
  "대혜여, 여래·응공·정변지는 항상됨도 아니며 무상함도 아니니, 무슨 까닭인가? 2변(邊)은 허물이 있기 때문이다.
  대혜여, 유(有)와 무(無)인 2변에는 마땅히 과실이 있을 것이다.
  대혜여, 만약 여래를 항상된 법이라고 말한다면, 곧 항상된 인(因)과 같을 것이다.
  대혜여, 외도가 말한 '미진(微塵)인 모든 인이 항상됨이요, 지어진 법은 아니다'라고 하기 때문이다.
  대혜여, 그러므로 여래를 항상됨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이니, 지어진 법이 아닌데 항상된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대혜여, 또한 여래를 항상됨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니, 무상(無常)이라고 말하는 것은 곧 유위(有爲)의 지어진 법인 5음(陰)에 가견(可見)과 능견(能見)의 법이 없는 것과 같을 것이니, 5음은 없어지기 때문에 5음이 없어진다면, 부처님·여래도 또한 마땅히 마찬가지로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여래는 없어지는 법이 아니다.
  대혜여, 무릇 지어진 법이란 모두 무상한 것으로, 병(甁)과 의복과 수레와 쌓은 자리[疊席] 등은 모두 지어진 법이니, 그러므로 무상하다.
  대혜여, 만약 일체가 모두 무상하다고 말한다면, 일체지(一切智)와 일체 사람과 일체 공덕도 또한 마땅히 무상하여 일체 지어진 법의 모양과 같을 것이다. 또한 다시 허물이 있으니, 만약 일체가 모두 무상하다고 말한다면 부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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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님·여래도 마땅히 지어진 법일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여래는 이 지어진 법이 아니므로, 다시 더 이상 수승한 인(因)이 있다고 말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기를, '여래는 항상됨도 아니며, 또한 무상함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대혜여, 여래는 항상됨이 아니니, 무슨 까닭인가? 허공의 성질이라서 또한 모든 공덕을 수행함도 없기 때문이다.
  대혜여, 비유컨대 허공은 항상됨도 아니며 무상함도 아니니, 무슨 까닭인가? 항상됨과 무상함을 떠났기 때문이며, 같음과 다름, 함께 함과 함께 하지 않음, 있음과 없음, 있는 것 아님과 없는 것 아님, 항상됨과 무상함, 항상됨 아님과 무상함 아닌 것들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체 모든 허물을 떠났기 때문에 가히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대혜여, 또한 여래를 항상됨이라 말하지 않을 것이니, 무슨 까닭인가? 만약 항상된다고 말한다면, 토끼·말·낙타·나귀·거북·뱀·파리·물고기들의 뿔과 같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래를 항상됨이라 말하지 않을 것이다.
  대혜여, 또한 여래를 항상됨이라 말하지 아니할 것이니, 불생(不生)인 항상됨에 떨어질까 두려워함이다. 그러므로 여래·세존을 항상된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대혜여, 다시 다른 법이 있어서, 여래·세존을 항상됨이라 말할 수 있으니, 저 법에 의하므로 여래·세존을 항상됨이라 말할 수 있다. 무슨 까닭인가? 안으로 증득하는 지혜로서 항상된 법을 증득함에 의하기 때문에, 그러므로 여래를 항상됨이라 말할 수 있다.
  대혜여, 부처님·여래의 안으로 증득한 지혜의 법은 항상되고 청량(淸凉)이며 불변(不變)이다.
  대혜여, 불·여래·응공·정변지께서 만약 세상에 출현하시지 않더라도 법성(法性)은 항상 이와 같고, 법체(法體)도 항상 이와 같으며, 법의 궤칙(軌則)도 항상 이와 같으니, 저 법성은 일체 성문과 벽지불들의 또한 일찍 듣지 못한 바이며 또한 일찍 보지 못한 바이고, 이와 같은 법체는 허공도 아니지만, 어리석은 범부는 깨닫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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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혜여, 불·여래의 안으로 증득한 지혜는 저에 의하여 얻어진 이름인 것이다.
  대혜여, 여실한 지혜에 의하여 수행하므로 부처님이 된다고 이름함을 얻은 것이요, 심·의·의식과 무명(無明)과 5음(陰)으로 훈습하여 얻은 이름이 아니다.
  대혜여, 일체 삼계(三界)는 진실 아닌 망상과 분별과 희론으로 얻어진 이름이다.
  대혜여, 진실하지 못한 분별인 두 가지 법은 항상됨과 무상함이라 이름한다.
  그러나 불·여래는 두 법에 떨어지지 아니하여 능취(能取)와 가취(可取)인 2변(邊)에 떨어지지 않으니, 여래는 고요하여 두 법이 나지 않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대혜여, '부처님·여래·응공·정변지께서는 항상됨이다', '무상함이다'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대혜여, 무릇 말하는 바는 '항상됨이다', '무상함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나, 일체 분별을 멀리 떠나서 다한 자는 '항상됨이다', '무상함이다'라고 하는 법을 취한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니, 그러므로 나는 일체 범부에게 '항상된다', '무상하다'라고 분별하지 못하게 막으니, 진실인 고요한 법을 얻은 자는 분별을 없애고 분별을 내지 않는다."
  그 때 세존께서는 거듭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항상됨과 무상함을 떠나서
  항상됨도 무상함도 아니니,
  만약 이와 같이 부처님을 보면
  그는 악도(惡道)에 떨어지지 않으리.
  
  만약 항상됨과 무상함을 말하며
  모든 공덕을 허망하다고 하면,
  지혜 없는 이의 분별함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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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상(常)과 무상(無常) 말함을 막았다.
  
  법을 내세우는 이는
  모두 여러 허물이 있으니,
  만약 능히 유심(唯心)임을 본다면
  그는 모든 허물에 떨어지지 않으리라.
  
  
11. 불성품(佛性品)
  
  그 때 거룩하신 대혜보살마하살은 부처님께 또한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원하오니, 여래·응공·정변지께서는 저희를 위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선서(善逝)께서는 저희를 위하여 음(陰)·계(界)·입(入)의 생(生)·멸(滅)하는 모양을 말씀해 주십시오.
  세존이시여, 만약 무아(無我)라면 무엇이 생(生)하며, 무엇이 멸(滅)합니까?
  세존이시여, 일체 범부는 생(生)·멸(滅)·주(住)에 의하여 고(苦)의 다함을 보지 못하니, 그러므로 열반(涅槃)의 모양을 알지 못합니다."
  부처님께서 거룩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훌륭한 대혜여, 그대는 지금 자세히 듣고 자세히 들어라. 마땅히 그대를 위하여 말하리라."
  대혜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지신 세존이시여, 가르치심을 잘 받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여래의 장(藏)은 선(善)과 불선(不善)의 인(因)이다. 능히 6도(道)와 더불어 생사(生死)의 인연을 지으니 비유컨대, 재주 부리는 아이들이 여러 가지의 재주를 부리는 것과 같아서, 중생이 여래장(如來藏)에 의지하여 5도(道)에서 나고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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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혜여, 여래장은 나와 내 것이라 함을 떠났지만, 모든 외도들은 알지 못하니, 그러므로 삼계에서 나고 죽는 인연이 끊어지지 않는다.
  대혜여, 외도들은 허망하게 아(我)를 계탁(計度)하므로 능히 여래장을 여실히 보지 못하니, 외도는 끝없는 예로부터 허망한 집착과 여러 가지 희론으로 훈습되었기 때문이다.
  대혜여, 아리야식(阿梨耶識)을 여래장(如來藏)이라 이름하니, 무명(無明)인 7식(識)으로 더불어 함께 함이 큰 바다에 물결이 항상 끊이지 않는 것과 같아서, 몸과 함께 생한 까닭이다.
  무상(無常)의 허물을 떠나고, 아(我)의 허물을 떠나면 자성(自性)이 청정할 것이다.
  그 외 7식이란 심·의·의식 등의 생각 생각이 머무르지 않는 생멸(生滅)의 법이니, 7식은 저 허망한 인(因)으로 말미암아 난 것이다.
  능히 모든 법을 여실히 분별하지 못하고, 높고 낮고 길고 짧은 형상을 보고 명상(名相)에 집착하므로 능히 자심(自心)으로 하여금 색상을 보며, 능히 고락(苦樂)을 얻으며, 능히 해탈의 인(因)을 떠나며, 명상으로 인하여 수번뇌(隨煩惱)인 탐(貪)이 나게되며, 저 생각하는 인(因)에 의하여 여러 근(根)이 멸진(滅盡)하므로 차제(次第)로 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자의(自意)의 분별에서도 고락인 감수[受]가 나지 않으니, 그러므로 소상정(少想定)과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가며, 삼마발제(三摩跋提)와 4선(禪)과 참다운 해탈[實諦解脫]에 들어간다.
  그러나 수행하는 이는 '해탈이다'라는 상(相)을 내니, 허망한 상이 전멸(轉滅)함을 알지 못한 까닭이다.
  대혜여, 여래장식(如來藏識)은 아리야식(阿梨耶識) 속에 있지 않으니, 그러므로 일곱 가지 식(識)은 생함도 있으며, 멸함도 있으나, 여래장식은 생하지도 멸하지도 않으니, 무슨 까닭인가? 저 일곱 가지 식은 모든 경계와 생각함과 관(觀)하는 것에 의하여 나기 때문이다.
  이 7식의 경계는 일체 성문과 벽지불과 외도와 수행자도 능히 깨달아 알지 못하니, 여실히 인무아(人無我)를 알지 못한 까닭이며, 음·계·입의 법들을 보는 까닭이다.
  
[220 / 415] 쪽
  대혜여, 여래장은 여실히 5법의 체상(體相)과 법무아(法無我)를 본 것이므로 생함이 아니며, 여실히 여러 지위의 차례와 전전(展轉)히 화합함을 아는 까닭이다.
  다른 외도는 바르게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능히 관찰하지 못한다.
  대혜여, 보살이 부동지(不動地)에 머물면, 그 때엔 열 가지 삼매문(三昧門) 등을 얻어서 상수(上首)가 될 것이며, 한량없고 가없는 삼매를 얻고 삼매와 부처님의 주지(住持)하심에 의하여 헤아릴 수 없는 불법과 자기의 본원력(本願力)을 관찰하므로 삼매문의 실제(實際) 경계를 막아 두호(遮護 : 삼매락을 받지 않음)하고, 막아 두호하고는 자기 속 몸의 거룩한 지혜로 법을 증득하는 진실한 경계에 들어가서 성문과 벽지불과 외도의 수행으로 관찰할 바의 경계와 같지 않은 것이다.
  그 때엔 저 열 가지 성도(聖道)를 지나서 여래의 '뜻대로 나는 몸[義生身]'과 지혜의 몸에 들어가서 모든 공용(功用)인 삼매의 마음을 떠난다. 그러므로 대혜여, 보살마하살이 수승한 법인 여래장·아리야식을 증득하려 한다면 마땅히 수행하여 청정하게 할 것이다.
  대혜여, 만약 여래장·아리야식을 없는 것[無]이라 이름한다면, 아리야식을 떠나 생(生)도 없고 멸(滅)도 없을 것이다.
  일체 범부와 모든 성인도 저 아리야식을 의지하므로 생도 있으며, 멸도 있다. 아리야식을 의지하므로 모든 수행자는 자기 속 몸의 거룩한 행을 증득하는 데에 들어가서, 법락행(法樂行)을 나타내면서 쉬지 않는다.
  대혜여, 이 여래의 마음인 아리야식·여래장식의 경계는 일체 성문과 벽지불과 외도들은 능히 분별하지 못할 것이니, 무슨 까닭인가? 여래장은 이 청정한 모양이지만 객진번뇌(客塵煩惱)가 더럽힌 것으로 깨끗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혜여, 나는 이 뜻에 의하여, 승만부인(勝鬘夫人)과 다른 보살마하살인 깊은 지혜 있는 자를 위하여 여래장·아리야식이 7종(種)의 식(識)과 함께 나는 것을 전멸상(轉滅相)이라 이름한다고 말하였으며, 여러 성문과 벽지불들을 위하여 법무아를 보였으며, 승만(勝鬘)에게는 '여래장은 이 여래의 경계이다'라고 말하였다.
  
[221 / 415] 쪽
  대혜여, 여래장식·아리야식의 경계는 나와 지금 그대와 여러 보살과 깊은 지혜 있는 자만이 능히 이 두 가지 법을 분별할 것이요, 다른 성문과 벽지불과 외도들의 명자(名字)에 집착하는 이는 능히 이 두 법을 요달하여 알지 못할 것이다.
  대혜여, 그러므로 그대 및 여러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 법을 배울 것이다.
  그 때 세존께서 거듭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깊고 깊은 여래장(如來藏)이
  7식과 더불어 함께 나서
  두 법을 취하여 나는 것을
  여실히 나지 않음[不生]으로 알라.
  
  거울의 모양과 같이 마음에 나타남은
  끝없는 습기(習氣)로 훈습한 것이니,
  만약 여실히 관찰한다면
  모든 경계 다 공(空)하여 없으리.
  
  어리석은 이, 달을 가리킴을 볼 때
  손가락만 보고 달을 보지 않듯이,
  명자(名字)에 집착하고 계탁(計度)하는 이는
  나의 진실을 보지 못하리.
  
  심(心)은 공교로운 재주를 부리는 이 같고
  의(意)는 교활한 자 같으며
  의식(意識)과 5식(識)은
  허망하게 경계를 취하네.
  
  재주 부리는 아이들이
  서로 어울림과 같이
  
[222 / 415] 쪽
  범부를 속여 미혹함이었네.
  
  
12. 오법문품(五法門品)
  
  그 때 거룩하신 대혜보살마하살은 부처님께 또한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원하오니, 여래·응공·정변지께서는 저희를 위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선서(善逝)께서는 저희를 위하여 5법의 체상(體相)과 무아(無我)의 차별인 행상(行相)을 말씀해 주십시오.
  저희와 일체 보살들이 만약 5법 체상과 두 가지 무아의 차별상을 잘 알게된다면, 이 법을 수행하여 차례로 일체 여러 지위에 들어갈 것이며, 이 법을 수행하면 능히 일체의 불법(佛法)에 들어갈 것이니, 불법에 들어가는 자는 바로 여래 자신이 안으로 증득한 지혜의 자리에도 들어갈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거룩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훌륭한 대혜여, 그대는 지금 자세히 들어라. 마땅히 그대를 위하여 말하리라."
  대혜보살이 말하였다.
  "어지신 세존이시여, 가르치심을 잘 받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였다.
  "내 그대를 위하여 5법 체상과, 두 가지 무아의 차별인 행상을 말하겠다.
  대혜여, 어떤 것이 5법인가? 첫째는 명(名)이요, 둘째는 상(相)이요, 셋째는 분별이요, 넷째는 정지(正智)요, 다섯째는 진여(眞如)이다.
  안으로 몸소 수행하여 성인의 지혜를 증득하고, 단상(斷常)의 견해를 떠나서 여실히 수행함을 나타내는 자는 삼매의 낙(樂)인 삼마발제(三摩跋提)의 행문(行門)에 들어가는 것이다.
  대혜여, 일체 범부는 5법의 체상과 두 가지 무아를 알지 못하고, 오직 자심으로 바깥 물건을 보기 때문에, 그러므로 분별하는 마음을 내니, 성인(聖人)일 수 없다."
  대혜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223 / 415] 쪽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범부가 분별하는 마음을 내는 것이 성인일 수 없다고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일체 범부는 명상(名相)에 집착하여 생(生)하는 법을 수순(隨順)하고, 생하는 법을 수순하고는 여러 가지 모양을 보고 나와 내 것이라 하는 사견(邪見)의 마음에 떨어져, 일체의 법상(法相)에 집착함을 구족(具足)하고, 집착하고는 무명(無明)의 어둠이 가리운 곳에 들어가며, 가리운 곳에 들어가서는 탐심(貪心)을 일으키며, 탐심을 일으켜서는 능히 탐(貪)·진(瞋)·치(痴)의 업(業)을 조작하며, 업생(業行)을 조작하고는 능히 스스로 그치지 아니하여 누에가 고치를 짓듯이 분별하는 마음으로써 스스로 몸을 얽어서 6도(道)의 큰 바다 험난한 데에 떨어져, 두레박[轆轤]이 회전함과 같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니, 지혜가 없기 때문이다.
  일체 모든 법이 환상과 같음을 알지 못하며, '나와 내 것이라 함이 없는 것'을 알지 못한다.
  모든 법의 진실 아닌 것은 망상과 분별에서 나온 것인데 가견(可見)과 능견(能見)의 떠남을 알지 못하며, 생(生)·주(住)·멸(滅)상을 떠남을 알지 못하며, 자심의 허망으로 생긴 것을 알지 못하고, '자재천(自在天)과 시간[時]과 미진(微塵)과 나를 수순하여 생긴 것이다'라고 말한다.
  대혜여, 어떤 것이 명(名)인가? 말하자면 안식(眼識)과 현전(現前)의 색 등인 법상(法相)이니, 소리의 모양, 귀의 모양, 코의 모양, 혀의 모양, 몸의 모양과 같은 것이다.
  대혜여, 이와 같은 모양을 나는 '명상이 된다'라고 이름한다.
  대혜여, 어떤 것이 분별인가? 어떠한 법에 의하여 이름을 말하며 상(相)을 취하여 요별(了別)하기를, '이 법은 이와 같고 이와 같아서 필경에 다르지 않다'라고 함이니, 이른바 코끼리·말·수레·도보[步]·인민(人民) 등으로 여러 가지 모양을 분별함이니, 이를 분별이라 이름한다.
  대혜여, 어떤 것이 정지(正智)인가? 명상을 관찰하며, 관찰하고는 사실인 법을 보지 않으니, 그는 번갈아 함께 하는 인(因)이 생하므로 보이는 것으로, 번갈아 함께 함이 생한다는 것은 여러 식(識)이 다시 일어나지 않으며, 분별
  
  
 
[224 / 415] 쪽
  식(分別識)의 모양이 단멸도 항상됨도 아닌 것으로, 그러므로 일체 외도와 성문과 벽지불의 자리에 떨어지지 않는다.
  대혜여, 이를 정지(正智)라 이름한다.
  대혜여, 보살마하살이 정지(正智)에 의하여 명상법을 취하여 '있다'라고 하지 아니하며, 보이지 않는 모양을 취하여 '없다'라고 하지 아니할 것이니, 무슨 까닭인가? 유무(有無)인 사견(邪見)을 떠났기 때문이다.
  명상을 보지 아니함은 이 정지의 뜻이니, 그러므로 나는 '진여(眞如)가 된다'고 이름한다.
  대혜여, 보살이 진여법에 머무르는 자는 모양이 없는 고요한 경계에 얻어 들어가리니, 들어가서 보살의 처음 환희지(歡喜地)를 얻어 들어갈 것이다.
  보살이 처음 환희지를 얻을 때엔, 100 금강삼매(金剛三昧)의 명문(明門)을 증득하여 25유(有)의 일체 과업(果業)을 버리고 떠나서 성문과 벽지불의 자리를 지나서 여래의 집인 진여(眞如)의 경계에 머물러 여실히 수행하여 5법의 모양이 환상과 같고 꿈과 같음을 알고 여실히 일체 모든 법을 관찰하여 안으로 몸소 거룩한 지혜를 증득하며 수행하는 것을 일으켜 이와 같이 전전(展轉)히 허망한 세간의 각관(覺觀)으로 좋아하는 자리를 멀리 떠나서 차례로 법운지(法雲地)에 이르며, 법운지에 들어가고는 차례로 삼매의 힘이 자재함과 신통(神通)의 모든 꽃으로 장엄한 여래의 자리에 들 것이다.
  여래의 자리에 들고는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광명과 응화(應化)할 장엄의 몸을 나타내는 것이 물 속의 달과 같으며, 무진구(無盡句)에 의하여 묶인 바를 잘 풀어주기를, 중생의 믿는 것을 따라서 설법하여 심·의·식인 몸을 떠나게 한다.
  대혜여, 보살이 진여에 들어가서, 부처님 자리의 이와 같고 이와 같은 한량없고 가없는 법을 얻을 것이다."
  대혜보살이 부처님께 또한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세존이시여, 5법이 3법(三法 : 敎法·行法·證法)에 들어가는 것입니까? 3법이 5법에 들어가는 것입니까? 자체상(自體相)이 각각 차별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225 / 415] 쪽
  "3법이 5법에 들어가는 것이다.
  대혜여, 비단 3법이 5법에 들어갈 뿐만 아니라 8종식과 두 가지 무아(無我)도 또한 5법에 들어간다.
  대혜여, 어찌하여 3법이 5법에 들어가는 것인가?
  대혜여, 명상(名相)은 분별의 법상이 된다고 이름한다.
  대혜여, 저 2법 분별에 의하여 심(心)과 심수(心數)법이 생하니 일시인 것이요, 전후(前後)가 아닌 것이 해가 광명과 함께 함과 같아 일시에 여러 가지 모양을 분별하는 것이다.
  대혜여, 이를 3상(相)이 인연의 힘에 의하여 생한 것이라 이름한다.
  대혜여, 정지(正智)와 진여는 제일의제(第一義諦)의 모양이라 이름함이니, 불멸법(不滅法)에 의한 까닭이다.
  대혜여, 자심(自心)의 견(見)에 집착하여, 법을 분별하는 차별이 여덟 가지가 있으니, 모든 상을 분별하여 사실로 여기는 까닭이다.
  나라고 함과 내 것이라고 하는 생멸(生滅)법을 떠나면, 그 때엔 두 무아(無我)법을 얻어 증득할 것이다.
  대혜여, 5법의 법문은 부처님의 자리에 들어가며, 여러 지위의 법상도 또한 5법의 문에 들어가며, 일체 성문과 벽지불의 법도 또한 5법의 문에 들어가며, 여래의 안으로 몸소 증득하는 거룩한 지혜의 법도 또한 5법의 문에 들어간다.
  대혜여, 5법은 상(相)·명(名)·분별(分別)·진여(眞如)·정지(正智)이다.
  대혜여, 어떤 것을 상이 된다고 이름하는가? 상이란 보이는 색의 형상과 상모(相貌)가 수승하고 수승하지 못한 것이니, 이를 '상이 된다'고 이름한다.
  대혜여, 저 법상에 의하여 분별하는 상을 일으키기를, '이는 병(甁)이며, 이는 소·말·염소며, 이 법은 이와 같고 이와 같아서 다르지 않다'고 함이니, 대혜여, 이를 '명(名)이 된다'고 이름한다.
  대혜여, 저 법에 의하여 이름을 세우며, 저 모양을 요별(了別)하며, 시현(示現)하고, 그러므로 저 여러 가지 명자인 소·염소·말 등을 세움이니, 이를 '분별심(分別心)과 심수법(心數法)'이라고 이름한다.
  
[226 / 415] 쪽
  대혜여, 명상(名相) 및 미진(微塵)을 관찰하여 항상 한 법상도 보지 않음이니, 모든 법의 진실 아닌 것은 허망한 마음으로 분별을 내기 때문이다.
  대혜여, '진여'라고 말함은 '허망하지 않은 것'이라 이름함이니, 필경에 자성(自性)의 자체를 다하는 것이 진여상을 바로 본 것이다.
  나와 여러 보살 및 여러 부처님·여래·응공·정변지는 말하기를, '이름은 다르나 뜻은 같다'라고 한다.
  대혜여, 이와 같은 것들은 정지(正智)를 수순하여, 단멸(斷滅)도 항상됨도 아니요, 분별이 없으니 분별이 행하지 않는 곳에는 자신이 안으로 증득하는 거룩한 지혜를 수순하여, 일체 외도와 성문과 벽지들의 악견(惡見)과 붕당과 바르지 못한 지혜를 떠난 것이다.
  대혜여, 5법과 2법상과 여덟 가지 식(識)과 두 가지 무아와 일체 불법은 모두 5법에 들어가니, 대혜여, 그대와 보살마하살은 수승한 지혜를 구하기 위하여 마땅히 닦아 배울 것이다.
  대혜여, 그대가 5법을 알면, 다른 이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다."
  그 때 세존께서 거듭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5법의 자체상과
  여덟 가지 식과
  두 가지 무아법은
  대승에 섭취함이네.
  
  명상과 분별과
  3법의 자체상과
  정지(正智)와 진여는
  제일의(第一義)의 모양이네.
  
  
13. 항하사품(恒河沙品)
  
  
[227 / 415] 쪽
  그 때 거룩한 대혜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명자(名字)에 의하여 말씀하심과 같아서, '과거·미래·현재 여러 부처님의 수가 항하(恒河)의 모래와 같다'라고 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신 것은 여래의 입에 의하여 말씀하신 것입니까? 저희들이 수순하여 취하겠습니다. 또한 다시 뜻이 있는 것입니까? 원하오니, 저희를 위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거룩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대혜여, 내가 말한 명자와 장구(章句)대로 이와 같이 취하지 말 것이다.
  대혜여, 3세(世)의 부처님께서 항하의 모래뿐만이 아니니, 무슨 까닭인가? 이른바 세간에서 뛰어난 것을 비유한 것은 비유함과 같은 것만은 아니다.
  무슨 까닭인가? 비슷하면서도 비슷하지 않음이 있기 때문이다.
  대혜여, 부처님·여래·응공·정변지께서는 세간에서 뛰어난 것을 비유로서 '비슷하면서도 비슷하지 않음'을 결정하여 말할 수 없으니, 무슨 까닭인가?
  대혜여, 내가 말한 바는 다만 적은 부분일 뿐이다.
  대혜여, 나와 여러 부처님·여래·응공·정변지의 말한 바 비유는 다만 적은 뜻만을 말한 것이니, 무슨 까닭인가? 어리석은 범부와 외도들은 '모든 법이 떳떳하다'는 것에 집착하여 사견(邪見)을 증장(增長)하고 세간을 수순하여 생사에 윤회하니, 그들은 싫증을 내기 쉽고 듣고는 놀라며 두려워한다.
  또한 여러 부처님께서 항하의 모래와 같다고 함을 들으면, 문득 여래의 위없는 성도(聖道)에서 얻기 쉽다는 생각을 내고, 출세의 법을 구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대혜여, 그러므로 나는 부처님·여래가 항하의 모래 수와 같다고 말하였다. 무슨 까닭인가? 내가 다른 경(經)에서 말하기를, '부처님께서 출세(出世)하시는 것이 우담바라꽃과 같다고 하면 중생이 듣고는 말하기를, '불도(佛道)는 얻기가 어렵다'고 하여 닦아 정진하지 않으니, 그러므로 나는 '불·여래가 항하의 모래 수와 같다'라고 말하였다.
  대혜여, 내가 '부처님의 출세하시는 것이 우담바라꽃과 같다'라고 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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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히 교화할만한 중생에 의하여 한 뜻이니, 그러므로 나는 '부처님께서 우담바라꽃과 같다'라고 말하였다.
  대혜여, 우담바라꽃은 세상에서도 일찍이 본 사람이 없으며, 미래에도 또한 보지 못할 것이다.
  대혜여, 부처님·여래께서는 세상에서 일찍 보았으며, 현재에 보고 미래에도 볼 것이다.
  대혜여, 내가 이와 같이 말한 것은 자신의 얻은 바 법에 의하여 말한 것이니, 그러므로 '우담바라꽃과 같다'라고 말한 것으로, 여러 부처님·여래도 또한 다시 이와 같이 말씀하신다.
  대혜여, 나는 속 몸으로 증득한 법에 의하여 설법한다. 그러므로 세간을 뛰어넘는 비유를 말한다. 모든 범부와 믿음이 없는 중생은 능히 나의 말한 바 비유를 믿지 않으니, 무슨 까닭인가? 자기 속 몸의 거룩한 지혜의 경계를 말함에 비유로도 말할 수 없으니, 심·의·의식을 멀리 떠나고 모든 견해의 자리를 뛰어넘는 것인 부처님·여래의 진여(眞如)법은 가히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 가지 비유를 말하였다.
  대혜여, 내가 말한 '여러 부처님께서 항하의 모래 수와 같다'라고 함은 이 적은 부분[少分]인 비유이다.
  대혜여, 부처님·여래는 평등하여 평등 아닌 것이 아니니, 분별[能分別]과 분별되는 것[所分別]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혜여, 비유컨대 항하에 있는 모래를 고기와 자라와 거북과 용과 소와 염소와 코끼리와 말과 모든 짐승이 밟을지라도, 그러나 저 항하의 모래는 분별을 내지 않으며 성내지 않고 또한 나를 괴롭게 한다는 생각을 내지 않으니, 분별이 없으므로 모든 더러움[垢]을 깨끗이 떠났기 때문이다.
  대혜여, 부처님·여래·응공·정변지도 또한 이와 같아 속 몸으로 거룩한 지혜를 증득하여, 만족한 모든 힘과 신통과 자재한 공덕이 항하의 모래와 같은데, 일체 외도와 사론(邪論)인 모든 스승과 어리석은 이 '고기와 자라'인 것들이 성내는 마음으로 여래를 헐뜯고 꾸짖어도 여래는 동하지 않고 분별을 내지 않으며 본원력(本願力)으로 중생에게 삼매(三昧)·삼마발제(三摩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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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提)를 주어 일체 모든 낙(樂)으로 하여금 만족하게 함으로써 분별하지 않는다.
  대혜여, 그러므로 나는 부처님·여래가 항하의 모래 등과 같다고 말한 것은 평등하여 다른 모양이 없는 것이니, 애착인 몸을 떠났기 때문이다.
  대혜여, 비유컨대 항하의 모래가 땅을 떠나지 못함과 같다.
  대혜여, 불이 대지(大地)를 태울지라도 불이 땅과 다르지 않으므로 불이 땅을 태우지 않으니, 지대(地大)에는 불의 상속(相續)하는 자체(自體)가 있기 때문이다.
  대혜여, 어리석은 범부는 전도된 지혜에 떨어져, 자심에서 분별하여 말하기를, '땅이 불에 태워 지게 된다'라고 하지만, 그러나 땅은 타지 않으니, 땅을 떠나고서 다시 4대(大)인 불의 자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대혜여, 부처님·여래께서도 또한 다시 이와 같아서 부처님·여래·법신의 체(體)는 항하의 모래와 같아서 멸하지도 아니하며 없어지지도 않는다.
  대혜여, 비유컨대 항하의 모래가 한량없고 가없는 것과 같다.
  대혜여, 불·여래도 또한 다시 이와 같아서, 세간에 출현하여 한량없는 광명을 놓고 일체 부처님의 큰 모임[大會]에 두루하며, 중생을 교화하려고 그로 하여금 깨달아 알게 한다.
  대혜여, 항하의 모래는 다시 나는 모양[生相]이 아님이 저 미진(微塵)과 같아서, 미진인 체상(體相)이 이와 같이 머무른다.
  대혜여, 부처님·여래께서도 또한 다시 이와 같아서 세간에서 생하지 않으며 멸하지 않으니, 부처님·여래께서는 유(有)의 인(因)을 끊으셨기 때문이다.
  대혜여, 항하의 모래가 만약 항하에서 나간다 해도 또한 나가는 것을 보지 않으며 항하 가운데에 들어간다 해도 또한 들어가는 것을 보지 않으며, 또한 생각을 일으키기를, '내가 항하에서 나가고 들어간다'라고 하지 않는다.
  대혜여, 부처님·여래의 지혜의 힘도 또한 다시 이와 같아서, 모든 중생을 제도하여도 다 멸도(滅度)함이 아니며, 또한 증장(增長)함도 아니니, 무슨 까닭인가? 모든 법은 몸[身]이 없기 때문이다.
  대혜여, 일체 몸이 있는 것은 모두 무상하고 마멸(磨滅)하는 법이요,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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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없는 법은 아니지만 부처님·여래께서는 오직 법신(法身)인 것이다.
  대혜여,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소유(蘇油 : 우유로 만든 향유)를 얻으려고 하는데, 항하의 모래를 눌러 짠다면 마침내 얻을 수 없으니, 소유가 없기 때문이다.
  대혜여, 부처님·여래께서는 중생에게 고뇌(苦惱)의 압박한 바 되어도 성냄은 얻을 수 없으니, 자기의 법계상(法界相)을 버리지 않으며, 자기의 법미상(法味相)을 버리지 않으며, 본원력(本願力)을 버리지 아니하고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어서 대자대비(大慈大悲)의 구족함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이며, 내가 '만약 중생으로 하여금 열반에 들게 하지 못한다면, 나의 몸도 또한 열반에 들지 않겠다'라고 함이다.
  대혜여, 항하의 모래가 물을 따라서 흐르고 마침내 물을 거슬러 흐르지 아니함과 같다.
  대혜여, 부처님·여래의 중생을 위하여 설법함도 또한 그러하여 열반을 따라 순종하고 거슬러 흐르지 않는다.
  대혜여, 그러므로 '부처님·여래께서 항하의 모래와 같다'라고 말하였다.
  대혜여, 항하의 모래가 물을 따라 흐른다 함은 간다는 뜻이 아니니, 만약 부처님·여래께서 간다는 뜻이 있다면 부처님·여래께서는 마땅히 무상하여 멸함일 것이다.
  대혜여, 세간의 본제(本際 : 근본실제)도 오히려 가히 알지 못하는데, 알지 못한 것을 내 어찌 그에 의하여 간다는 뜻을 말하겠는가. 그러므로 여래께서는 간다는 뜻이 되지 않는다.
  대혜여, 간다는 뜻이란, '단멸의 뜻이 된다'라고 이름할 것이니, 어리석은 범부는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한다."
  대혜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세존이시여. 만약 중생이 세간에서 윤회하면서도 가고 오는 본제(本際)를 가히 알지 못한다면, 어찌하여 여래께서는 해탈을 얻으셨으며, 또한 중생으로 하여금 해탈을 얻게 합니까?"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대혜여, 해탈이라 말함은, 일체 희론과 번뇌와 끝없는 훈습과 분별하는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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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을 떠났으므로, 여실히 오직 제 마음에서 바깥의 분별하는 바를 나타내어 마음이 회전(廻轉)한 것을 능히 앎이니, 그러므로 나는 말하여 '해탈이 된다'라고 이름한다.
  대혜여, 해탈이라 말한 것은 멸하는 법이 아니니, 그러므로 그대가 지금 나에게 묻기를, '만약 본제를 알지 못한다면 어찌하여 해탈을 얻었는가'라고 하는 이 물음은 성립하지 못한다.
  대혜여, 본제라고 말한 것은 이 분별하는 마음이니, 동일한 체(體)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대혜여, 분별하는 마음을 떠나면 다시 중생이 없으니, 바로 '분별은 중생이 된다'라고 이름한다.
  대혜여, 진실한 지혜로서 내외(內外)법을 관찰하면 가지(可知)와 능지(能知)인 법이 없는 것이다.
  대혜여, 일체법은 본래 고요한 것이다.
  대혜여, 여실히 오직 제 마음에서 허망한 분별을 나타낸 것임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므로 분별하는 마음을 낸 것이니, 여실히 아는 자는 분별을 내지 않는다.
  그 때 세존께서 거듭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여러 부처님을 관찰하기를,
  '비유컨대 항하의 모래와 같아서
  멸함도 또한 생함도 아니다'라고 하면
  그 사람은 능히 부처님을 보리라.
  
  모든 진구(塵垢)를 멀리 떠나서
  항하의 모래가
  물 흐름을 따르나 변치 않듯이
  법신도 또한 이와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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