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

[마음] 하나라는 도리를 떠나지 않아야 1

通達無我法者 2007. 12. 26. 16:25

    하나라는 도리를 떠나지 않아야


이 세상에서 나하고 가장 가까운 것이 내 마음입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우선 눈에 보이는 자기 몸이 더 가깝고 마음은 몸보다 멀리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마음이 가장 가까운 자기 생명의 주체입니다. 자기 생명의 주체가 마음입니다. 금생에 그렁저렁 살다가 죽어진다 하더라도 몸뚱이는 못 가져가고 마음만 가지고 갑니다. 마음만 남습니다.
마음은 무시이래(無始以來)로, 처음도 없는 과거에서부터 무시무종(無始無終)으로 미래까지 영원히 존재하는 생명의 주인공(主人公)입니다. 그래서 우리 부처님 법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종교도 모두 다 마음을 가장 큰 종지(宗旨)로 합니다. 우리 부처님 가르침은 이른바 심종(心宗)이라, 불교는 마음의 가르침이란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기독교의「마태복음」5장, 7장 같은 데를 보면 부처님 가르침과 비슷합니다. 예를 들면 '마음이 맑은 자는 행복할지니 그들은 하느님을 볼 수 있느니라'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마음이 청정(淸淨)하면 하느님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이라든가 부처님이라든가 하는 '표현되는 말'에 걸릴 필요가 없습니다. 마음이란 것은 모양도 없고 이름도 없는 것입니다. 중생이 지어서 마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본래자리는 원래 이름이 없습니다. 모양이 없거니 이름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오온개공,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다 비어 있다
우리 중생들은 업장이 너무 무거워서 없는 것을 있다고 생각하고, 참말로 있는 것을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내 몸을 위시해서 지위라든가 황금이라든가 어떠한 것도 실존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 중생의 시각이 철저하지 못하고 투철하지 못하기 때문에 보이는 대상적인 것이 실제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 뿐입니다.
제법(諸法)이 공(空)이라든가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는 말들은 사실로 없으니까 없다고 한 것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물질에 너무 집착하니까 부처님께서 집착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일부러 없다고 한 것이 아니라, 법이자연적(法爾自然的)으로 사실 그대로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대상이 만약 있다면『반야심경(般若心經)』의 오온개공(五蘊皆空)이란 말씀이 거짓이 되겠지요. 오온개공이란 것은 눈에 보이는 모든 존재를 다 포함한 것이 바로 공이란 뜻입니다. 모든 존재라는 말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을 말합니다. 색(色)은 물질을 말하고 관념적(觀念的)인 마음은 수(受)와 상(想)과 행(行)과 식(識)입니다. 감수하고 상상하고 분별시비하고 이런 것들이 모두 관념체계인데, 물질뿐만 아니라 이런 관념체계도 실제로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온개공입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아무리 재주 있고 불법(佛法)을 많이 공부했다 하더라도 오온이 다 비어 있다는 소식을 모르면 역시 인생고(人生苦)를 떠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말씀은 간단명료합니다. 조금도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씀했습니다.

홍로일점설, 뜨거운 화로의 한 송이 눈처럼...
지금은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정보화 시대라고 하지 않습니까? 산업사회가 극성스럽게 발전되어서 자본주의 사회가 되었지만, 자본주의도 얼마나 모순이 많습니까? 그걸 또 비판해서 사회주의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회주의 사회의 총본산(總本山)이라 할 수 있는 소비에트가 70년 만에 무너져버렸습니다. 자본주의가 무너지고 사회주의가 무너지니까 서구인(西歐人)들은 굉장히 허탈감에 잠겨 있습니다.
부르주아 혁명으로 중세의 이른바 독재정권, 봉건시대의 정권이 무너지고 자유주의 사회가 되었지요. 자유주의 사회에서 정치하다 보니까 자본주의가 되었습니다. 이것도 해악이 많으니까 이걸 비판해서 바른 사회를 만들고자 한 것이 사회주의요, 공산주의 아닙니까?
사회의 여러 가지 해악이나 모순을 척결하고 없애고자 하는 것이 사회주의이고 공산주의인데 그런 사회주의가 왜 쓰러진 것인가? 참다운 진리대로 따르지 않으니까 무너집니다. 역사라는 것은 그때그때 무수히 변화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좋은 쪽으로, 진리 쪽으로 차근차근 이행(移行)해 가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주 전체는 사실은 진리 외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밖에 없는데 유감스럽게도 우리 인간이 잘못 보고 잘못 느끼고 잘못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 마음의 실체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실체를 알면 자기 개인으로 보나 가족으로 보나 사회적으로 보나 모두가 다 해결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불경 말씀의 표현대로 하면 홍로일점설(紅爐一點雪)입니다. 뜨거운 화로에 넣은 한 점의 눈과 같이 녹아버린다는 것입니다.
모든 불행과 모순이 순식간에 녹아버립니다. 우리가 우리 마음을 알고 부처님 진리를 참으로 안다면 모든 모순과 불행이 순식간에 녹아버립니다. 부처님 당시에 아사세 왕의 위제희 부인도 아들 때문에 속을 썩이고 비탄에 잠기다가도 부처님 법문을 통해, 인생의 행복이 정말로 무엇인가, 영원한 세계가 무엇인가, 우리 마음의 당체(當體)가 무엇인가를 들은 다음부터 일시에 마음이 녹아지고 광명천지가 환희심으로 충만해졌습니다.
그 위제희 부인의 마음이나 내 마음이나 석가모니 마음이나 예수 마음이나 공자 마음이나 똑같은 마음입니다. 마음은 모양이 없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본래의 성품, 불성을 깨달아야...
모양은 없지만, 우리 마음은 만능의 자리입니다. 석가모니께서 깨닫고 공자가 깨닫고 예수가 깨닫고 한 그 성인의 마음이 또한 우리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과 성인의 마음이 똑같습니다.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마음은 우리 본래 마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몸뚱이가 나라고 생각하고, 대상적으로 보이는 이 물질이 사실로 있는 물질이라고 생각합니다.
제법이 공으로,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인연소생법은 다 즉시공(卽是空)인데, 인연 따라 생긴 것은 실제로 있지 않은데, 우리는 있다고 집착합니다. 모든 것이 그때그때 변화무상해서 없는 것인데, 우리 중생들은 그러한 과정이나 실상을 투철하게 믿지 못합니다. 중생은 겉만 보고 결과만 봅니다. 범부와 성자의 차이가 어디에 있는가 하면, 우리 중생은 상만 보지만 성자는 근본성품을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불교의 대전제(大前提)라든가 불교의 근본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성품을 깨닫는 것입니다. 성품을 다른 말로 하면 불성(佛性)입니다. 그 불성을 우리가 느끼고 분명히 해명해야 비로소 대승인 것입니다.
소승법문에는 불성이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불자님들이 불성을 분명히 아신다면 벌써 대승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또는 더 나아가서 '세상에는 사실은 그 마음밖에 없다, 불성밖에 없다' 이렇게까지 아시면 지극히 큰 보배를 가지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큰 보배입니다. 이른바 바른 견해, 바른 인생관, 바른 가치관을 획득하는 것입니다.
나머지 문제는 오직 우리 불자님들이 생각 생각에 마음이 불성을 여의지 않게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참말로 우리가 증명을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부처인 것을 분명히 알면 불교용어로 해오(解悟)가 이미 된 것입니다. 해오라는 것은 풀 해(解)자 깨달을 오(悟)자인데, 다른 말로 하면 철학적으로 이미 아는 것이고 해결된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우리가 종교적으로 우리 마음을 정화시켜서 참말로 불성자리와 내가 둘이 아닌 자리, 그 자리를 증명한단 말입니다.

평탄하고 쉽고 간단명료한 부처님의 길
부처님 법은 간단명료합니다. 육조 혜능스님께서 문자를 모른다고 되어 있습니다마는 참말로 그 어른이 문자를 모르셨는가, 아니면 누구나 쉽게 불법을 닦도록 하기 위해서, 유식자나 무식자나 구분 없이 불법을 닦게 하기 위해서 방편으로 말씀하셨던가 하는 것은 우리가 알 필요가 없습니다.
이 불법이라는 것은 학문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누구나 갖고 있는 존재의 근본자리인 마음을 닦는 것이므로 일자무식자라도 닦을 수가 있습니다.
농부든 누구든 세상에 마음 없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따라서 어느 누구나 다 불법을 닦을 수 있습니다. 사실은 무슨 이치나 체계를 많이 안다 해도 잘못 알면 그 사람은 도리어 공부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평이간명(平易簡明)이라는 불교용어가 있습니다.
대도(大道)는 큰 도 아닙니까? 다른 길이나 다른 가르침은 이른바 협소한 길인데 부처님 가르침은 대도입니다. 평탄한 궤도입니다. 어디에 내놔도 또는 어느 때든지 조금도 이욺이 없는, 수그러짐이 없는 탄탄대로입니다. 정말로 평탄하고 쉽고 간단명료한 것이 부처님의 길입니다. 모두가 다 마음이라 하는 그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알면 참다운 불자이고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모른다면 우리가 모두 범부중생이 되는 것입니다.
경(經)에 보면 똑같은 물이라 하더라도 인견수(人見水)라, 사람이 보면 물로 보이고 하늘사람들이 본다면 보배같이 보입니다. 같은 물인데도 천상사람들이 보는 것과 사람들이 보는 것은 자기들 업장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 중생이 생사윤회하는 세계가 삼계(三界)입니다. 욕계(欲界)ㆍ색계(色界)ㆍ무색계(無色界)입니다. 더 세분화하여 십계(十界)라고도 합니다. 십계에는 지옥(地獄)ㆍ아귀(餓鬼)ㆍ축생(畜生)의 삼악도(三惡道)와 인간(人間,人趣)ㆍ아수라(阿修羅,阿修羅趣)ㆍ천상(天上,天趣)으로서 삼악도보다 조금 나은 삼선도(三善道)를 합한 육도(六道)가 있습니다. 또 인간을 초월한 성문계(聲聞界)ㆍ연각계(緣覺界)ㆍ보살계(菩薩界)와 부처님계[佛界]를 합한 세계입니다.
이런 경계에서 부처님 경계라는 것은 영원히 불생불멸한 경계이기 때문에 별도로 한다 하더라도, 우리 중생이 자기가 지은 바 소행(所行)에 따라서 아홉 가지 세계를 왔다갔다하는 것입니다.
이 삼계가 바로 우리 마음의 장난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을 어떻게 쓸 것인가? 탐욕심이 많으면 그때는 분명히 아귀계로 떨어집니다. 살생을 많이 하면 분명히 지옥으로 갑니다. 우리 사람은 다행히 선반악반(善半惡半)이라, 어느 정도 사람될 만치 계율을 지키고 선행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람같이 못 살면 밑으로 뚝 떨어집니다. 우리가 사람이라고 장담하고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만물의 영장이 못 되는 것입니다. 잘 모르는 탓입니다.
'천상이 눈에 안 보이고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도 없는데 무슨 천상이 있을 것인가' 합니다. 또 현대물리학이 원자를 발견하고 별별 첨단과학이 발달했으니 천성이 있다면 벌써 증명을 했을 것인데, 없으니까 발견하지 못하는 것 아닌가 할 것입니다.
그러나 천상은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 중생들이 업의 눈으로 보기 때문에 공간성이 없는 것은 보지를 못합니다. 우리 중생의 흐리멍덩한 눈으로는 물질의 형태를 취해야 무엇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자의 눈으로 보면 분명히 천상도 있고 극락도 있는 것을 단지 우리가 못 보는 것입니다. 중생들은 참말로 지옥이나 천상이 없으니까 안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자기 지위가 아무리 높고 학문적 지식이 많다 하더라도 우리의 정도는 아직은 인간계에 있습니다. 인간계에 있다는 것은 욕계의 범주를 못 넘어서고 있다는 것입니다.
욕계란 무엇인가? 식욕(食慾)과 음욕(淫慾)과 수면욕(睡眠慾) 등 욕심을 주로 한 세계를 말합니다. 우리가 지금 식욕을 초월해 있습니까? 또는 남녀 이성간의 음욕을 초월해 있습니까? 우리 중생들이 성불하려고 생각한다면 정말로 매서운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식욕을 절제하고, 남녀 이성간의 음욕을 절제하지 않으면 절대로 해탈을 못하는 것입니다.
욕계번뇌 가운데서 제일 지겹고 무서운 것이 이른바 식욕과 남녀 이성간의 음욕입니다. 그렇기에 기독교나 불교나 다 출가사문(出家沙門)이 있습니다. 출가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욕계를 형식으로라도 우선 떠나 보자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또 온전히 떠나야 합니다. 바로 이 진리에 대한 인식을 잘못 했기 때문에 어떤 신부들은 결혼을 장려하는 운동을 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예수의 뜻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석가모니가 말씀하신 진리, 예수가 말씀하신 진리, 공자가 말씀하신 진리가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 부처님 진리는 철두철미해서 완벽한 진리이고, 다른 도인들 가르침은 그 법의 당체는 알았지만 완벽한 진리는 되지 못합니다.
따라서 여러 불자님들은 금생에 부처님 법 만난 것에 대해서 얼마나 감사하고 축복된 일인가를 더 철처히 느끼셔야 합니다. 비교 또 비교해 보고, 또 동서철학을 찾아가지고 이것도 보고 저것도 본다면, 보면 볼수록 부처님 가르침 만난 것에 대해서 우리 모두는 행복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