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

[마음] 하나라는 도리를 떠나지 않아야 2

通達無我法者 2007. 12. 26. 16:27
 

    하나라는 도리를 떠나지 않아야



부처님과 우리 마음은 하나
우리가 그런 보배로운 가르침을, 인간 가운데서 최상의 행복을 얻는 가르침을 향해 부처님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면 갈수록 우리 행복도 거기에 비례해서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의 본래 성품인 불성자리는 만능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자리, 즉 부처님 자리는 만공덕의 자리임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지혜도 원만하고 자비도 원만하고 행복도 원만한 자리입니다. 부처님 자리는 행복의 자리이기 때문에 부처님 이름을 감로왕여래(甘露王如來), 감로왕불(甘露王佛)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것이 감로입니다. 그 행복이 어찌나 좋던지 감로왕불이라고 했습니다.
부처님은 바로 우리 마음입니다. 부처님과 우리 마음은 절대로 다르지 않습니다. 둘이 아닙니다. 그토록 방대한『화엄경』의 전체 도리가 무엇인가 하면 '심불급중생(心佛及衆生) 시삼무차별(是三無差別)'이라, 우리 마음과 부처와 모든 중생이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차별이 없을 뿐 아니라 바로 하나의 부처입니다. 세 가지가 하나입니다.
진리와 진리 아닌 것과의 가장 두드러진 구분이 어디 있는가 하면, 진리는 우주를 하나의 생명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가 아닌 것은 우주를 둘로 보고 셋으로 봅니다.
17세기 데카르트 같은 위대한 철학자도 물질과 정신을 둘로 봤습니다. 이른바 이원론(二元論)입니다. 정신은 안 보이고 육체는 보이니까 육체와 정신을 둘로 보려고 합니다. 위대한 철학자도 그런데, 하물며 보통사람들이야 더더욱 둘로 보기 쉽겠지요. 우주를 둘로 보고 셋으로 보는 것은 결국 인간의 무지에서 오는 것입니다.
성자의 가르침은 천지우주를 하나로 봅니다. 이른바 일원론(一元論)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유마거사(維摩居士)는 거사로서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 법을 조금도 흠절 없이, 사리불존자나 목건련존자보다도 훨씬 더 위대하게 펴신 분입니다. 그 유마거사의 법문 가운데서 가장 수승(殊勝)한 법문이 무엇인가 하면, '입불이법문(入不二法門)'입니다. 모든 존재가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께서는 불이법문을 아주 분명히 외워두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모든 문제가 홍로일점설이라, 다 술술 풀린단 말입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아주 혐오스런 사람도 있고 미운 사람도 있고 원수 같은 사람도 있겠습니다마는, 아무리 혐오스럽게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도 똑같이 부처님의 화신입니다.
도둑질을 하는 나쁜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 사람도 조건에 따라서 우리 눈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지 부처님께서 보실 때는 똑같이 부처님의 화신인 것입니다. 남자나 여자나 잘났든 못났든 다 부처님이 허울을 쓰고 우리한테 보인 것입니다.
우리의 참다운 지혜는 무엇인가? 입불이법문이라, 저 사람도 나와 둘이 아니라고 믿는 지혜입니다. 우리가 보통 남에게 무엇을 베풀 때도 '저 사람이 나보다 못하니까 베풀어야 되겠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그냥 동정심에서 베풉니다. 이런 마음으로 하는 보시(布施)는 참다운 보시가 아닙니다.
철학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저 사람도 나와 똑같은 하나의 생명입니다. 우리 중생은 겉만 보니까 둘로 보이고 셋으로 보이고 하지만 그 성품으로 볼 때는 모두 다 하나란 말입니다.
제주도도 변두리 외딴 곳에 가서 보면 여기저기 섬이 있지 않습니까? 섬으로 본다면, 겉만 보면 결국 이 섬과 저 섬이 다 낱낱이고 다르게 보입니다. 그러나 개펄을 바탕으로 본다면 모두가 다 똑같은 육지입니다. 세계가 다 그렇습니다. 태평양이 있고 대서양이 있고 별것이 다 있지만, 우리가 그 바탕으로 본다면 똑같은 하나의 지구덩어리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생각하면 부처님도 우리를 생각하신다
우리 중생이 천차만별로 있다고 하더라도 근원적인 근본 성품에서 본다면, 즉 불성에서 본다면 똑같은 하나입니다. 우리 불자들은 하나의 도리를 떠나지 않고 공부를 해야 불자의 도리를 다하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우리는 왜 부르는가? 만일 '관세음보살이나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 부처님이 저만치 계시다가 우리한테 와서 복을 주신다'고 안다면 이것은 참다운 불법이 아닙니다. 방편(方便)입니다. 어느 것도 바로 보면 관세음보살 아님이 없고 나무아미타불 아님이 없습니다.
아미타불은 무엇인가? 아미타불은 우주에 충만한 광명의 생명입니다. 개별적으로 어디에 존재하는 실존적 존재가 개념에 따라서 우리한테 보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주의 근본 생명자리를 대명사로 이름 붙여서 말할 때 아미타불이라 하는 것입니다.
지장보살(地藏菩薩)은 무엇인가? 우주의 생명 가운데서 우리 지구에 깃들여 있는 부처님이 지장보살입니다. 또 관세음보살은 무엇인가? 우주의 생명 가운데서 우주의 사랑과 자비가 관세음보살입니다. 또 문수보살(文殊菩薩)은 우주의 지혜란 말입니다.
둘로 나누고 셋으로 나눌 수 없는, 한도 끝도 없는 부처님의 지혜를 우리가 다 한 번에 알 수 없으므로, 이렇게 저렇게 지장보살이니 문수보살이니 관세음보살이니 그런 이름으로 그 공덕을 구분해서 부르는 것입니다. 즉 천지우주가 아미타불인데 아미타불의 공덕에 맞게 지어진 것이 여러 부처님, 여러 보살들의 이름입니다. 다만 공덕을 구분한 것이지 실제로 둘이 있고 셋이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오직 하나의 부처님 지혜입니다. 하나의 부처님뿐인데 그 공덕에 붙여진 여러 이름일 뿐입니다.
여러 불자님들은 부처님한테 가는 길이 어렵다고 절대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본성품인 부처님 자리는 만능의 자리이기 때문에 행복이나 지혜나 공덕도 원만히 갖춘 자리입니다. 우리가 한 걸음 부처님한테 다가서면 그만큼 우리 행복감도 충족되고 몸도 가볍고 마음도 개운하고 또한 호법선신이 우리를 지켜줍니다.
부처님이란 것, 즉 우주생명의 부처님이란 그냥 논리나 이치가 아니라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우리가 부처님을 한 번 생각하면 생각한 만큼 부처님은 아시는 것입니다. 중생념불(衆生念佛) 불환억(佛還憶)이라, 중생이 부처를 생각하면 부처님도 또한 우리를 생각하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생활하는 데 있어서 어떠한 부정적인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 또한 내가 지은 것입니다. 그 인연의 인(因)을 잘못 심어서 금생에 우리가 잘못 만난 것입니다. 어느 전생에 우리가 지어서 만난 것이 금생입니다. 따라서 금생에 우리가 잘못 만나고 그때그때 실패하고 성공하는 것도 모두가 다 꼭 전생에 지은 대로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운명을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금생의 부정적인 운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전생에 지은 것을 금생에 그대로 인과필연(因果必然)으로 받는 것이니까 지금 당장에 우리 마음을 부처님 진리에다 놓고서 행동을 바꾸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바뀌어집니다.
남을 미워하면 미움 그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잠재의식에 업으로 남습니다. 그러나 '본래 부처거니, 부처님이 지금 저렇게 밉게 보인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면서 도리어 그 사람을 보살피고 그 사람을 위해 봉사하면 풀립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마지막 한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주여! 그들은 그들이 한 일을 모르오니 그들을 용서하소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를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이 얼마나 증오스럽고 또 보복을 마음에 새길 것입니까? 그러나 그는 그러한 마음 없이 "그들을 용서하소서" 했습니다. 성자의 마음은 그래야 되는 것입니다.
공자님의 인덕(仁德)이 어찌나 크던지 공자님이 어디 가서 앉으면 마치 봄바람 같아서 대중들이 행복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3천 명의 제자가 따랐겠지요. 남을 비판 잘하고 남의 흠만 보려고 하는 사람은 사람들이 따르지 않습니다.
부처님 당시 항시 부처님을 모셨던 1천 2백 상수대중들 역시 부처님을 간절히 갈망하고 그리워하고 부처님의 따뜻한 훈기에 따랐겠지요.
가정의 주부가 되든지 아버지가 되든지, 가족이 흠모하고 따라야 가정이 화합하고 온전한 행복이 이루어집니다. 그렇게 하려면 먼저 자기부터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간단명료합니다. 억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사실대로 아들이나 딸이나 '저 애들은 지금 아들 딸의 모습으로 내게 온 부처다'라고 보셔야 합니다. 억지로 그렇게 보라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습니다. 아들 모습, 딸 모습으로 온 부처님입니다. 사실이 그런 것인데, 우리 중생은 업장에 가려서 그렇게 보지를 못할 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만공덕의 가르침입니다. 나무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을 부르든가, 다른 주문 또는 화두라든가 어떤 공부나 다 부처님께 다가서는 공부입니다. 따라서 정념으로 한번 외운다면 무거웠던 몸도 차근차근 가벼워지고 마음도 훨씬 행복해지고 또 다른 사람과도 화해가 됩니다.
또 사업을 한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따르고 사람이 좋아해서 고객이 따르게 됩니다. 어떤 면으로나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최상의 길입니다. 이렇게 하셔서 행복하시기를 빌어 마지않습니다. [- 불기 2545년 제주 자성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