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감하게 상식을 버리고 진리를 따라야... 우리 중생들은 너무 모양에 집착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가령 자기를 생각할 때 자기 몸뚱이를 자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불자님들 깊이 생각하셔야 합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우주의 진리 그대로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우리 상식과는 맞지 않는 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과감하고 단호하게 상식을 버려서 진리에 따라야지 상식을 고집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몸뚱이는 자성이 아닙니다. 불성이 아닙니다. 분명하게 아셔야 합니다. 우리 몸뚱이는 인연 따라서 과거생에 우리가 지은 업대로 금생에 받은 허상이고 허깨비 같은 것입니다. 사실 이 몸뚱이는 자성에 들지 못합니다. 자성이나 불성은 영원히 죽지 않는,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영원히 죽지 않는, 불생불멸하고 무시무종한 생명 자체입니다. 따라서 자성은 비단 나의 자성으로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너의 자성이나 우주의 자성이나 모두가 하나의 생명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일원적(一元的)으로 우주가 하나의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하나의 생명이 아닌 이원적ㆍ삼원적인 말들은 모두 진리가 아닌 것입니다. 일원적 진리를 아시게 되면 우리 인생에 있어서나 모든 문제에 있어서도 마치 홍로일점설(紅爐一點雪)이라, 뜨거운 화로에다 얼음을 넣으면 금세 녹아버리듯이 문제가 모두 녹아버려서 전혀 어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우주가 오직 하나의 생명인 것이고 하나의 생명은 만덕(萬德)을 갖춘 자리입니다. 학문적으로 아무것도 배우지 않았더라도 이 불성자성은 물듦이 없습니다. 오히려 지식을 많이 알고 이것저것 따지면 자성을 성취하는 데 소홀해지고 거리가 멀어집니다.
몸뚱이가 존재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무지무명에서 벗어나야... 석가모니부처님은 인도에 태어나셔서 2천 5백 년 전에 열반(涅槃)에 드셨다 하더라도 부처님 기운, 그 에너지는 우주에 그대로 존재하고 계십니다. 우리 인간의 어떤 생명도 과거ㆍ현재ㆍ미래를 통해서 조금도 이울어짐이 없고 변동이 없는 것인데, 하물며 성자들의 에너지나 생명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 중생들은 내 몸뚱이가 내 존재고 존재의 전부라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 생각 때문에 우리의 참다운 생명이 발동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자기 개인을 위해서나 사회를 위해서나 가정을 위해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실제로 자기가 이 몸이 아닌 것을, 허깨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일입니다. 자기가 아닌 허깨비에 불과한 것을 자기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먼저 아셔야 한단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무명심(無明心)을, 무지한 마음을 떠나야 합니다. 학문을 많이 알지 못한다 해서 무지하다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지식이 많더라도 그 일원적인 우주의 생명, 내 생명의 본체를 모르면 무지한 것입니다. 무명이란 말입니다. 무지무명은 자기 행복을 위해서도 아무런 도움이 못 되고 부부간이나 가정을 위해서도 도움이 못 됩니다. 참다운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되는 것도 어떠한 의미에서나 진리와 더불어 해야지, 진리는 진리대로 겉돌고 자기가 아는 것만 고집 부리면 그 무명 때문에 또다시 윤회(輪廻)의 길로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개나 소나 돼지나 그런 것도 우리 사람과 절대로 다른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잠시간 업의 차이 때문에, 전생에 지은 업의 차이 때문에 개의 명(命)을 받고 소의 명을 받는 것일 뿐입니다.
자성불성은 언제나 이 세상에 가득 차 있는 것 우주가 하나의 생명이라고 생각하면 너와 내가 본래 둘이 아니고, 성품으로 본다면 모두가 다 하나란 말입니다. 우리가 모두 하나의 자리인 것을 안다면 자기 이익을 위해서 남을 소홀히 대하는 그런 이기심을 절대로 가질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주의 도리대로 사는 것입니다. 성인들은 다른 분들이 아닙니다. 성인들은 우주의 도리 그대로 사는 분들이고, 우주의 도리는 자성불성을 떠나지 않고 자성불성의 도리대로 사는 것이란 말입니다. 자성불성은 어디에 있는가? 어느 때나 이 세상에 가득 차 있는 것이 자성입니다. 에너지가 없는 데가 없지 않습니까. 산소나 수소나 탄소가 없는 데가 없지 않습니까. 물질은 다 그런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런 것의 가장 근원적인 생명 자체가 바로 자성이고 불성이란 말입니다.
자성을 깨닫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무엇인가 자성을 깨닫는 것은 절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자성을 깨닫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가장 쉬운 방법인가를 몰라서는 안 됩니다. 자성을 깨닫는 방법은 부처님께서 누누이 여러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가르침 가운데에도 난행문(難行門)ㆍ이행문(易行門)이라, 어려운 문과 쉬운 문이 있습니다. 쉬운 문이라 해서 옆으로 빗나간다든가 해서는 안 되겠지요. 부처님 가르침은 묘(妙)하고 긴요(緊要)하게도 가장 쉬우면서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 우리 불자님들도 명심하셔서 가장 쉽고도 확실한 길을 택해서 공부하시길 바랍니다. 지금 우리 한국 불교에도 여러 가지 공부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어느 문제를 성자나 도인들이 우리한테 제시해서 문제를 느끼면 우리가 그것을 문제로 삼아서 의심을 품는단 말입니다. 가령 내 생명은 무엇인가, 나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고 의심을 품는 방법이 있습니다. 데카르트같이 회의적인 방법으로 의심하는 것입니다. 또 부처님 말씀에 본래가 부처라 했는데, 본래 다 자성이 있고 불성이 있다고 하셨는데, 새삼스레 의심할 필요가 있는가 해서 순수한 믿음으로 들어가는 방법도 있습니다. 지금 저 같은 스님네가 속해 있는 조계종(曹溪宗)은 주로 의심하는 방법을 택해서 공부를 하고 있고, 원불교(圓佛敎) 등은 의심하지 않고 자성불성을 그대로 믿고 들어가 잠자코 명상만 하는 방법을 주로 취합니다. 또 불교국가라고 자부하는 일본 사람들은 불성자성을 찾기 위해서 의심하는 방법을 취하기도 하고 의심 않고 잠자코 명상을 해서 구하기도 하며, 가장 쉬우면서도 효과적인 방법인 염불(念佛)을 취하는 파도 있습니다.
부처님 명호는 본래 자기의 참이름이다 우리는 본래 부처님과 더불어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만유가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사람만 둘이 아닌 것이 아니라 눈앞에서 아장거리는 병아리 한 마리도 부처와 더불어서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부처님 가르침이라는 것은 신비하고 부사의(不思議)하기 때문에 어떤 조그마한 것 가운데에도 만덕이 다 들어 있습니다. 하나의 원자 가운데에도 헤아릴 수 없는 기운이 있는데, 하물며 우리 눈에 보이는 나무 한 그루나 흙 한 덩이나 또는 물 속에 사는 어느 것 가운데에도 무량한 공덕이 다 들어 있습니다. 부처님의 심심미묘한 공덕이 다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좀더 쉽게 말하면 우주라는 것은 모두가 다 부처님뿐입니다. 진여불성(眞如佛性)뿐입니다. 그래서 우주라는 것은 모두가 다 하나도 빠짐없이 진여불성입니다. 우주의 도리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우주의 도리에 다 들어가니까 우주는 바로 진여인 동시에 진리입니다. 진여와 진리가 같은 말이며 그 자리는 바로 불성이고 생명인 것입니다. 과거생에 업을 잘못 지어서 금생에 잘못 태어나고 소아마비가 되고 여러 가지 불행이 많이 있습니다마는, 그렇더라도 이것은 우리 업으로 해서 금생에 잠시간 받는 겉모양인 것이지 우리 생명 자체는 조금도 훼손되지 않았습니다. 부처님한테 있는 불성이나 예수나 다른 성자한테 있는 불성이나 부처님 자리는 모두 똑같단 말입니다. 똑같은 하나의 불성자리입니다. 중생은 겉만 보니까, 하나의 생명자리를 못 보니까, 서로 다투기도 하고 그래서 사회적으로 분쟁과 불행이 있는 것입니다. 사회 전체적으로는 여러 가지 제도가 나오고 규제도 하지마는 그런 걸로는 우리 인간세상의 불행의 뿌리를 뽑을 수가 없습니다. 불행의 뿌리를 뽑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진리에 따르는 길입니다. 몇천 년이 가도 몇만 년이 가도 우리 인간이 진리를 따르지 않으면 전쟁도 끝나지 않고 불행도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따르지 않는다면 그런 비극은 절대로 끊이지 않습니다. 우리 개인이 내 마음이 불안하다, 머리가 아프다 할 때 이런 것들은 마음의 불안 때문에 옵니다. 몸뚱이는 우리 마음의 명령에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순간순간 우리 몸뚱이에게 반응을 하게 합니다. 마음이 생명의 주인이고 몸뚱이는 우리 생명에 입히는 옷이나 같은 것입니다. 제일 쉬운 방법, 그 제일 쉬운 방법은 부처님 명호를 외우는 방법입니다. 부처님 명호 외우는 것이 제일 쉽고 확실한 방법입니다. 어째서 제일 쉽고 확실한 방법인가? 그것은 우리가 본래 부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님 명호는 본래 자기의 참이름입니다. 본래 우리가 부처이고, 부처님 자리가 바로 우리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금생에 나와서 잘못 배우고 잘못된 버릇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버릇은 갑자기 깨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 깰 수 없는 버릇을 우리 중생이 깨는 방법으로 부처님의 명호를 외우는 것이 제일 쉽단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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