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명상법이 개개원성에 이르는 바른 명상법인가 어떠한 것이 가장 효과적이고 수승한 명상법(瞑想法)이라고 할 것인가? 어떤 방식을 취해야 가장 능률적이고 부처님 제자로서 바른 명상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명상법 간택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듣는 바에 의하면 유교식(儒敎式) 명상법이 있습니다. 그것도 훌륭한 명상법입니다. 유교식은 존심(存心)이라 하여 우리 마음을 그 중심에다 놓으려 하는 것입니다. 우주는 이(理)와 기(氣)의 합심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이 기(氣)의 근원자리가 태극(太極)이라서 그 진리의 중심에다가 마음을 머물게 하는 것이 유교식 명상법입니다. 그 외에 기독교 명상법이 있고 불교 명상법으로서 위빠사나 명상법이 있습니다. 위빠사나 명상법은 근본불교의 명상법입니다. 이른바 고(孤)ㆍ공(空)ㆍ무상(無常)ㆍ무아(無我)라는 우리 존재의 본바탕을 여실하게 밝히는 명상법입니다. 이것도 굉장히 좋은 명상법이고, 특히 미얀마라든가 태국ㆍ스리랑카 같은 남방불교 쪽에서 주로 합니다. 이것은 제법(諸法)이 허망무상(虛妄無常)하다, 제법이 모두 공하다는 도리까지는 이를 수 있는 명상법입니다. 하지만 일체 존재가 개개원성(箇箇圓成)이라는, 즉 낱낱의 모든 존재가 본래로 성취되어 있다는, 모든 존재가 본래로 원만히 갖추고 있다는 도리에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재 유포되어 있는 것으로 단학(丹學)명상법, 즉 단전주(丹田住)나 단전호흡(丹田呼吸) 명상법도 있고 아바타(avatar) 명상법도 있습니다. 아바타 명상법은 위대한 미국인 해리 팔머(Harry Palmer)가 만든 것입니다. 지금도 조직 확대를 위해 세계 각국을 돌면서 분주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불교인 입장에서 본다면 사실 별로 좋은 명상법이 못 됩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그들은 우리 마음이 개발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연구해서 만든 것인데, 그 사람들은 마음 자체가 무엇인지 모른단 말입니다. 해리 팔머는 얼굴이 아주 호의적으로 생겼는데 그 사람이 쓴 것을 보니까, 부처님 가르침같이 대체 우리 마음이 어떤 것인가, 마음을 계발해서 어느 방향으로 우리 마음을 인도할 것인가, 또 나아가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이런 핵심적인 것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성인의 경계로 이끄는 높은 이상적인 가르침이 없어요. 그래서 '아, 이것도 저분이 돌아가시면 그것으로 끝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명상법이 나왔지마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명상법들은 상대적인 하나의 마음을 계발하는 법이지, 부처님 가르침과 같이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가르침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부처님 가르침 주위에 있다는 사실을 지극한 행복으로 생각하셔야 합니다. 동시에 부처님께서 마음 계발하는 방법에 대해 어떻게 말씀했는가를 아셔야 합니다. 우리 불교의 명상법은 한마디로 참선법(參禪法) 아니겠습니까? 참선법도 따지고 보면 명상법에 들어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차원의 문제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마는 참선법은 이른바 삼매법(三昧法)입니다. 명상이나 삼매나 참선이나 그 내용은 다 비슷비슷합니다.
참선법의 여러 가지 종류 참선법을 이야기할 때는 먼저 외도선(外道禪)이라는, 정도(正道)가 아니라 외도로 하는 선을 말하게 됩니다. 이른바 외도명상법입니다. 그러면 외도명상법이란 어떤 것인가? 명상하고 있으면 마음이 맑아지고 몸도 건강해지고 운수도 좋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세간의 유위법(有爲法), 세간의 때를 벗어나지 못한단 말입니다. 이른바 인간의 욕망 충족을 위해서 하는 법이 외도명상법입니다. 그 다음, 차원이 좀 높은 것이 범부명상법(凡夫瞑想法)입니다. 이것은 외도보다는 한 차원 높습니다. 어떤 것이 범부명상법인가? 그것은 적어도 인과(因果)는 믿는단 말입니다. 인과법을 믿는다는 것은, 선을 행하면 당연히 행복이 그 과보로 올 것이고 악은 악의 업보로 해서 틀림없이 불행이 온단 말입니다. 이런 정도의 인과응보 범주 내에서 믿는 명상법이 곧 범부명상법입니다. 그리고 그보다 한 차원 더 높은 명상법이 이른바 소승명상법(小乘瞑想法)입니다. 소승명상법은 어떠한 것인가? 부처님 가르침은 어느 때나 사실을 사실대로 말씀하신 가르침입니다.『금강경』에 부처님 말씀은 여어(如語)라 했습니다. 부처님 말씀은 여실(如實)한 말씀이란 뜻입니다. 절대로 허튼 말씀이 없습니다. 소승명상법은 부처님 가르침에 의지해서 이 몸이, 자기 존재가 본래로 허망한 존재임을 알고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과학적으로도 완벽한 가르침입니다. 과거 고전물리학이나 현대물리학이나 어떤 면으로 보나 부처님 가르침은 다 상통(相通)하는 완벽한 가르침입니다. 현대물리학이 여태까지 애써 발견한 결과가 '모든 존재는 본래로 비어 있다'는 소식이지 않습니까? 『반야심경』은 눈에 보이는 존재든 관념적인 존재든 모든 존재가 다 비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법문입니다. 그것이 이른바 오온개공(五蘊皆空)입니다. 오온개공이라는 말에 그렇게 심심미묘한 뜻이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대상적인 존재뿐 아니라 자기의 육신 또는 관념, 그 모두가 본래 존재성이 없단 말입니다. 애써 명상을 한다고 하더라도 '금쪽 같은 몸이 소중하고 보이는 환경도 지금 내가 보는 대로 실존적인 대상이다'라고 생각한다면 참다운 명상이 되지 못합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부처님 법에 따르는 명상이 됩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못하는 것은 상대적인 유위법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한계적인 것이지 영원한 해탈의 법이 절대로 못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해탈법이란 영생의 행복을 보장하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소승적인 명상법은 우선 자기 존재가 본래로 존재성이 없다는 것을 알고 해탈을 위해 닦는 선입니다.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 사대가 임시간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 우리 몸입니다. 현대물리학도 이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각 원소가 그때그때 인연 따라서 잠시 모였습니다. 우리 마음도 불교에서 말하는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 감수하고 상상하고 미워하고 분별시비하고 이런 우리 마음의 부스러기가 잠시 인연 따라 모여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철학적으로 심오한 것입니다. 인연생(因緣生)이라, 인연 떠나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연 따라 생긴 것은 인연을 다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인연 따라 생긴 것은 한순간도 머무름이 없습니다. 몇억 분의 일 초간도 찰나도 머무름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무상입니다. 하이젠베르크(Werner K. Heisenberg)의 불확정성원리(不確定性原理)라, 미세한 부분에 가서는 결국 측정을 못한단 말입니다. 전자나 양성자나 이러한 것은 측정을 할 수 없습니다. 왜 측정을 못하는가? 정확한 위치를 측정할 수 없고 정확한 운동을 측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이것이다, 저것이다, 의학적으로 어떻게 된다, 인과적으로 어떻게 된다, 그렇게 알고 있지만 그것은 거시적으로 우리 눈에 보이는 한계 내에서 그런 것이지, 눈에 안 보이는 소립자 단계에서는 측정을 못합니다. 따라서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 불확실한 것이 이른바 우주의 일체 존재의 근원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면 확실한 것은 무엇인가. 성자(聖者)의 법, 부처님의 법은 확실합니다. 부처 불(佛) 성품 성(性), 이것이 불성(佛性)이란 말입니다. 우주의 도리이기 때문에 진여(眞如)입니다. 그 자리는 다만 하나의 도리에 그치지 않고 바로 우주의 생명, 우주의 에너지이기 때문에 불성이란 뜻입니다. 현대물리학이라는 과학적인 학문은 일체의 모양이 있는, 모습이 있는 존재는 모두가 비었다, 이런 소식까지는 확실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깊이 들어가 비어 있는 저쪽은 무엇인가, 이것은 측정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성자의 투철한 깨달음의 안목에서만 불성자리는 체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원효(元曉)스님, 의상(義湘)스님, 보조(普照)스님, 대각국사(大覺國師), 서산대사(西山大師) 등 한국의 도인들은 그런 자리를 모두 다 몸소 체험하신 분들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도인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본래면목 자리, 본래자성 자리를 체험하고 그대로 여실하게 말씀해 왔으므로 도인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일체 만유의 허망함을 증명하는 대승명상법 명상법으로 다시 돌아가서, 소승적인 명상법은 다만 자기 존재의 허무함을 느끼고서 닦는 명상법인 것이고, 그 다음 한 차원 높은 대승명상법(大乘瞑想法)은 무엇인가? 비단 자기 존재의 허무성이나 자기 존재가 한 생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꼈다 하더라도 일체 존재 일체 만유는 무엇인가, 자기 존재는 그렇다 하더라도 달이나 해나 이런 일체 만유는 있지 않은가, 산천초목은 있지 않은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단계는 아직은 소승적인 단계이고, 대승명상법은 비단 자기 존재만이 아니라 대상적으로 느끼는 산하대지, 삼라만상, 해, 달, 그 어떤 것도 존재하는 것은 모두 허망한 것임을 아는 명상법입니다. 존재성이 없습니다. 오온개공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오온개공이 되어야, 내 몸뚱이뿐만 아니라 일체 존재 모두가 본래 비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비로소 대승의 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치만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치만으로 아는 것은 철학적으로 아는 것이지, 실제로 우리가 증명한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증명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증명하는 명상이 필요한 것입니다. 명상이 있어야 실제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 명상이라는 말이나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삼매라는 말이나 참선이라는 말이나, 개념적인 내용을 천착(穿鑿)하면 조금씩 다르게 말할 수는 있지마는 대부분 같은 뜻입니다. 우리 마음을 맑혀서 본래 마음자리로 돌아가는 공부방법입니다. 기왕이면 차원 높은 명상을 하셔야 합니다. 보통 명상법도 어려운데 그렇게 최상승(最上乘)한 명상법을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겠지요. 그러나 사실은 최상승 명상법이 제일 쉽습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느끼시기 바랍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최상의 명상법이 사실은 제일 쉽고 우리에게 행복을 보장하고 정신적 건강과 육체적인 건강에도 이익이 있는 법입니다. 그렇게 이익이 있고 재미도 한량없으며 또한 하기 쉬운 법을 우리가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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