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중생이 다 부처가 될 수 있다 성자의 법은 따지고 보면 간단명료합니다. 조금도 찌꺼기가 없습니다. 우주가 생긴 대로 우리 믿음이 생긴 대로 그대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인간 존재는 본래가 개개원성이라, 본래로 원만히 성취되어 있단 말입니다. 이것을 다시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우리 존재란 것은 우리가 애쓰고 닦은 뒤에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만 볼 수 있다면 이대로 본래로 모두 다 부처입니다. 잘나나 못나나 지체부자유자나 또 사람뿐 아니라 개나 소나 돼지나 식물이나 모두 개개원성이라, 그 존재 자체 하나하나가 모두 다 원만히 성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종교를 공부할 때는 실천적인 것도 필요하지만 철학적인 것이 따릅니다.『화엄경』이나『능엄경』이나『법화경』이나 모두가 최고의 철학이란 말입니다. 지금 실존철학, 과학철학, 별별 철학이 다 있지만 부처님 가르침같이 확실하게 밝힌 철학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불자님들! 우리는 그러한 부처님 가르침을 꼭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 생명의 본의는, 사는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몇만 생 다시 태어나고 태어나서 윤회한다 하더라도 우리 생명의 본래 모습으로 다 돌아가는 것입니다. 내 본래 모습이 바로 부처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나 한결같이 부처가 됩니다. 그렇기에『열반경』에서도 일체중생(一切衆生) 개유불성(皆有佛性)이라,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체중생 개당작불(皆當作佛)이라, 모든 중생이 필연적으로 부처가 된다고 했습니다. 다만 우리 노력 여하에 따라서 빠르고 느리고 그런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게으름을 부리면 금생에 그렁저렁 하는 일 없이 생명을 낭비할 것이고, 게으름 안 피우고 부처님 법대로만 살면 금생에도 본래 부처라서 성취할 수가 있습니다. '본래 부처'란 말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부처 아닌 것이 어디서 억지로 가져와서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개개원성이란 말은 본래 우리가 원만히 갖추고 있는 부처란 뜻입니다. 소승은 그냥 애쓰고 한단계 한단계 올라가서 되는 것이고, 대승은 본래시불(本來是佛)이고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본래 부처입니다. 이 마음 이대로 부처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이 느끼고 못 느끼고 그런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가령, 원효스님이나 달마대사나 육조 혜능이나 그런 분들이 우리를 본다면 어떻게 볼 것인가? 그런 분들은 우리를 모두 부처님으로 봅니다. 석가모니부처님만 부처님이 아니라, 또 삼세제불(三世諸佛)만 부처님이 아니라 모두 다 이것이나 저것이나 다 부처로 본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 안목이 흐리멍덩한가 번뇌에 가려 있는가의 차이가 있는 것이지 본래 모습은 우주가 한결같이 부처님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명상하는 때에도 우리의 마음자리 그곳이 부처님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른바 진여불성(眞如佛性)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같이 업장 많은 사람이 어떻게 진여불성이, 우주불성이 가득 충만해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가' 하고 겁내지 마십시오. 우리 생각 가운데에서 무슨 생각이 가장 고귀한가 하면, 부처님께서 우리한테 방편이 없는 진실한 말씀을 하신 그 자리를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것이 생각 가운데에서 가장 소중한 생각입니다.
계계승승 영원히 이어져 온 대승명상법 무슨 명상법, 무슨무슨 명상법 해서 별별 명상법이 다 나와 있습니다. 우리 스님네들도 거기 빠져가지고 승복 입고 거기에 다닌다고 하는 분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참 비참한 일입니다. 부처님 공부를 어떻게 했길래, 그렇게도 소중한 보배를 가지고 있으면서 하찮은 자갈쪽 같은 것과 바꿀 것인가 말입니다. 대승명상법은 내 존재뿐만 아니라 우주의 일체 존재가 인연 따라 잠시간 이루어졌기 때문에 무상(無常)임을 압니다. 무상이란 말은 그 의미가 굉장히 소중합니다. 무상이란 말 속에는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는 시간성과 공간성이 없다는 뜻이 포함돼 있습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현대적으로 공부를 많이 해서 현명하게 잘 느낄 것입니다. 인연 따라 잠시간 이루어진 것은 한순간도 머무름 없이 순간순간 변화해 마지않습니다. 그런 것은 존재성이 없습니다. 존재성이 없는 것은 일정한 시간 내에 머물러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일정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어느 순간도 머무르지 않고 어느 위치도 점유하지 않으니 그것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것은 다 그렇습니다. 내 몸이고 내 관념이고 다 그렇습니다. 인연생이기 때문에, 인연 따라 잠시간 이루어졌기 때문에 어느 순간도 어디에도 그대로 머물지 않습니다. 어느 위치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있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인식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시간성ㆍ공간성이 없다는 것은 결국은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혜안(慧眼), 곧 부처님의 투철한 안목은 2천 5백여 년의 사이에도 만유의 진상(眞相)을, 참다운 모습을 그대로 보신 것입니다. 불성이라고 말하나 부처님이라고 말하나 똑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명상을 생각할 때도 부처님 명상법같이 수승하고 위대한 명상법은 없습니다. 우리가 다른 유의법적이고 상대적인 명상법에다가 우리 마음을 놓을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은 자기 생명의 낭비에 불과합니다. 무슨 필요로 부처님 법 같은 법을 놓고서 그런 다른 명상법들을 찾겠습니까? 무슨무슨 명상법이라 하지만 오래가지는 못합니다. 부처님 법은 2천 5백 년 동안에 무수한 성자가 나와서 다 증명하고, 달마를 거쳐 육조 혜능스님까지 그대로 고스란히 전수한 법 아닙니까? 계계승승(繼繼承承) 가감 없이 이어온 대승명상법입니다. 이런 법은 기간이 없습니다. 영원히 갑니다.
가장 통쾌하고 건강한 명상법 이제는 다 포괄해서 최상승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최상승 명상법은 모든 우주가 다 하나의 생명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주가 하나의 생명이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하나의 생명이 사실인데 우리 중생이 중생심으로 보니까 나는 나 다르고 너는 너 다르다 그럽니다. 우리가 하나의 가정을 구성할 때도 가정의 화목을 위해서 어떠한 마음자세가 가장 소중한가, 그것은 가정을 구성하는 구성원 하나하나를 다 부처님으로 보는 것입니다. 부처님으로 대접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소중한 가정화합의 묘결(妙訣)은 없습니다. 친구지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친구를 부처님같이 대접하는 것, 그보다 더 깊은 우정은 없습니다. 부처를 증명하기 위해서 서로 상대방을 부처님으로 생각하는 단계는 아직 이론적인 깨달음이지요. 참말로 어느 때 어느 순간에서나 부처님같이 여실하게 볼 수 있는 자리가 되기 위해서는 깨달아야 합니다. 이른바 명상이 필요합니다. 명상을 체험할 때 우리 마음이 맑게 닦아지고 생리가 바뀝니다. 명상이라는 것은 분명히 우리 생리가 바뀌는 것입니다. 욕심이나 진심(瞋心)으로 찌든 우리 지수화풍 사대가 청정한 사대광명(四大光明)으로 이루어진 진정한 사대로 바뀌니 말입니다. 그렇게 바뀌니 우리 마음이 얼마나 통쾌하겠습니까? 하루 하면 하루 한 만큼, 한 시간 하면 한 시간 한 만큼 우리 마음도 통쾌합니다. 몸은 마음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기 때문에 몸뚱이도 거기에 따르게 됩니다. 따라서 가장 건강한 법입니다. 그래서 최고의 명상법, 불교적으로 말하면 최상승선이지요. 각 원자(原子)가 무엇으로 되었는가 하는 것은 현대과학적으로도 증명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런 것의 본바탕은 무엇인가, 이것을 현대과학은 모릅니다. 미세한 데까지는 이르렀지만 결국에는 마이너스, 플러스가 되어서 무엇인지 모르게 텅 비어버린단 말입니다. 텅 비어버린 저쪽은 무엇인가, 과학은 모릅니다. 무엇인가 끝이 있어야 과학이 알 것인데 텅 비어버리면 과학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텅 비어버린 자리, 텅 비어버린 그 자체, 그 자리가 바로 불성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을 불성에다 두어야 본체를 안 여읜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뜻을 굳세게 해서『육조단경』이나 달마대사 어록을 보십시오. 우리 마음을 그런 근원적인 데다 두란 말씀입니다. 화두를 왜 듭니까? 가령 '이뭐꼬' 화두를 든다고 합시다. 끝끝내 '이뭐꼬' 화두를 의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화두를 빨리 타파하라는 것입니다. 타파해서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화두를 타파해서 진여불성 자리, 생명의 근원자리를 증명하라는 것입니다. 역시 가장 저급한 명상법은 자기 존재가 그대로 있다고 생각하고 대상이 있다고 생각하는 명상법입니다. 이런 명상법은 앉아 있으면 답답하고 몸이 굉장히 무겁습니다. 숨도 가쁘고 그러겠지요. 그러다가 적당히 숨도 조절하고 그러면 조금씩 나아지겠지요. 그러나 그런 것으로는 구경적(究竟的)인 참다운 깨달음에 이를 수 없습니다. 한계에 부딪치고 맙니다. 근기가 수승한 사람들은 조금씩 맑아질는지 모르겠지만 근기가 하열(下劣)한 사람은 잘못 들어가면 도리어 병이 생깁니다.
우리 스님네 중에도 호흡법이 좋다고 하니까 호흡법을 하다가 위(胃)가 확장되어서 끙끙 앓는 사람을 봤어요. 왜 그런가 하면 우리 마음이 본래 자성자리, 본래 불성자리에 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몸도 돌고 마음도 돈단 말입니다. 몸과 마음이 둘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렇습니다. 몸과 마음은 절대로 둘이 아닌데 말입니다. 우주란 것은 오직 순수생명의 마음뿐입니다. 부처라는 하나의 우주생명과 내 마음이라는 나, 생명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우리가 생각할 때는 부처라는 것은 충만한 우주에너지이고 생명이다, 또 내 마음은 내 몸에 있는 하나의 생명이다, 이렇게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우주생명ㆍ우주마음인 그 자리와 우리 개인 존재의 마음인 그 자리는 둘이 아닙니다.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내 마음이 지금 모양이 있습니까? 분명히 살아 있으니까 마음이 있게 되어 있는데 모양은 없습니다. 다시 말해 시간성도 공간성도 내 마음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럼 우주에 충만해 있는 부처님 마음은 모양이 있는 것인가, 그도 없습니다. 우주에너지로 분명히 있긴 있는데 모양은 없습니다. 모양이 없는 것은 비교할 수 없습니다. 모양이 없는 것은 결국 같은 것이란 말입니다. 크다 작다 하는 비교대상이 아닙니다. 결국 똑같은 것입니다. 내 마음도 있으면서 모양이 없는 생명 자체고, 우주의 마음도 있으면서 모양이 없는 우주의 생명 자체입니다. 불성도 역시 모양이 없으면서 분명히 존재합니다. 따라서 우주의 불성과 내 마음은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달마대사 어록을 보면 우주의 순수에너지와 내 마음이 본래로 둘이 아닙니다. 이렇게 느끼는 것을 안심법문(安心法門)이라 그럽니다. 안심법문은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법문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마음이 편안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마음이 어떻게 하면 가장 편안할 것인가. 그것도 내 마음이 무엇인가를 확실히 알고 동시에 내 마음의 근원 되는 우주의 생명이 무엇인가를 확실히 알아서 그것이 둘이 아니고 우주 자체가 원래 모두 다 하나의 생명뿐이다, 하나의 부처님뿐이다, 이렇게 알아버려야 이른바 안심법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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