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관용심을 가져야... 지금은 아시는 바와 같이 다원화(多元化)시대 아닙니까? 여러 가지 문제에 있어서, 민족도 다민족사회, 종교도 다종교사회 아닙니까? 이런 때에 우리는 참 주의해야 합니다. 지금 기독교신학에서 불교에 대해 열심히 가르칩니다. 제대로 공부한 신부들은 저 사람이 어떻게 불교를 저렇게 많이 아는가 할 정도로 불교를 많이 알고 있어요. 그에 비해서 우리 불교인들은 어떤가. 기독교인이 우리보다 수가 훨씬 많고 교회 수도 절 수보다 훨씬 많지만, 엄연히 공존해 있으면서도 우리 대부분은 기독교를 잘 모릅니다. 그것은 외도(外道)공부 아닌가, 기껏해야 하늘에 올라가는 법이 아닌가, 지금은 그렇게 소홀히 취급할 때가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분명히 우리 주변에 있는데 어떻게 우리가 그걸 무시할 것입니까? 그리고 성자의 법이라는 것은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예수가 성자가 아니라면 모르거니와 우리가 성자라 전제할 때는 똑같은 진리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같이 하나의 종교체계로는 다 확립되어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훌륭한 진리의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허심탄회하게 공간복음서라든가 신학을 공부한 사람은 다 구분이 됩니다. 한 번도 그쪽을 공부하지 않고서 무슨 염치로 비판하겠습니까? 지금은 그런 때가 아닙니다. 다원화시대는 참 어려운 시대입니다. 이 어려운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기도 알지만 다른 것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우리나라 정부요인들 중 기독교인이 8할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고 해요. 그런 사회를 살고 있으면서 그쪽을 몰라서야 되겠습니까? 모든 종교의 가르침이 다 부처님 법에 몽땅 들어 있음을 보시면 부처님께 거듭 감사와 찬탄을 드리지 않을 수 없게 되실 것입니다. 바이블에서 어떻게 말하든 간에 부처님 가운데 다 포섭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부처님 가르침에 대해서 자부심과 자랑을 느껴야 합니다. 기독교에 세밀한 교리체계가 안 서 있다 하더라도 진리가 아니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도 역시 해탈을 목적으로 하고 있고 영생의 하늘나라를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진리가 아니면 2천 년 동안이나 여러 가지 시련과 비판을 이기며 살아올 수가 없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관용심을 가지고 좋은 점을 보고 같이 대화하고 같이 공존해야 할 시대입니다.
참다운 명상을 위해서는 생명자리에 마음을 의지해야... 명상과 사색의 방법에는 여러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기왕이면 가장 고도한 차원의 명상을 해야 할 것인데, 가장 고도한 차원의 명상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존재의 실상을 보고서 그것을 그대로 느끼고 실상을 여의지 않는 명상을 하는 것입니다. 천지우주가 하나의 불성입니다. 진여불성에다 우리 마음을 두어야 비로소 우리 주체성이 확립되는 것입니다. 자기소외다, 스트레스다, 요즘 별스러운 말로 불안한 우리 마음을 표현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의 원인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 마음의 의지처가 확실하게 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을 어디다 붙일 것인가, 상대적이고 유한적인 데다 우리 마음을 붙인다면 항시 불안합니다. 상대적이고 유한적인 것은 결국 다 변하고 마는 것인데, 그 무상한 허망상대에다 우리 마음을 붙이면 우리 마음이 절대로 안정이 안 되고 참다운 명상이 못 되는 것입니다. 참다운 명상을 하기 위해서는 불멸의 우주에 존재하는, 나지 않고 죽지 않고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고 영원히 존재하는 생명자리에다 우리 마음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래야 참다운 주체성이 확립되는 것이고, 동시에 그런 공부를 해야 최상의 명상법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최상의 명상법을 한다고 할 때, 그것이 최상이니까 굉장히 어렵겠다 이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제일 쉬운 법이란 말입니다. 가장 확실한 것이고 우리 생리로 보더라도, 생리는 우리 마음에 따르는 것이므로 모두가 다 나와 더불어 본래로 부처 아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 몸에 건강한 생활은 없습니다. 명상을 바로 한다고 할 때는 경안(輕安)이라, 불교말로 하면 법희선열(法喜禪悅), 법을 닦아나가면 거기에 따르는 기쁨이 나오고 또 명상을 하다 보면 우리가 본래 갖추고 있는 불성이 무한공덕장이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그 기쁨이 한량없습니다. 맨 처음에는 빡빡할지 모릅니다. 그것은 업장 소관 또는 참선법을 잘 몰라서 그런 것인데, 최고의 진리에다 마음을 둔다면 다른 것은 역시 다 해소되어 갑니다.
계율을 지키고 참선염불하고 지혜로 깨달아 성불하소서 하루 앉으면 하루 앉은 만큼, 한 시간 앉으면 한 시간 앉은 만큼 우리 마음과 몸이 정화됩니다. 다만, 명상을 할 때는 기본적인 자세를 떠나서는 안 됩니다. 우리 욕계 중생은 음식 때문에 굉장히 오염되어 있습니다. 저 색계만 올라가도 음식을 먹지 않습니다. 생사윤회하는 중생만이 음식을 필요로 합니다. 색계나 무색계는 음식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본래는 다 부처인데 음식을 무던히 좋아하니까 색계도 못 가고 무색계도 못 가고 욕계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음식을 절대로 많이 드시지 마십시오. 아무 이득이 없습니다. 몸만 무겁고 찌꺼기만 많이 생깁니다. 저는 빚진 것이 많아서 그걸 다 갚고 죽으려고 건강법을 많이 봤어요. 오래 사는 비결은 책마다 소식(小食)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도 한번 해보십시오. 부처님 법은 어느 면으로 보나, 즉 계율로 보나 선정으로 보나 지혜로 보나 모두 다 성불하는 법입니다. 성불의 3대 강령이 계(戒)ㆍ정(定)ㆍ혜(慧) 삼학이지 않습니까? 계율 지키고 명상을 깊이 하여 참선염불하고 지혜로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혜로써 깨달아 증명한다 하더라도 깨치기 전에 먼저 이치로 알아야 합니다. 이치로 아는 것은 천지우주와 모든 것이 다 하나의 생명이다, 이렇게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명상을 통해 우리가 그 자리를 체험해야 합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육재일(六齋日)이 있지 않았습니까? 지금은 누가 육재일 말도 안 해요. 육재일이란 것이 원래 8, 14, 15, 23, 29, 30일 이렇게 한 달에 여섯 번 하는 것인데, 그날에는 하루에 한 끼만 먹으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제법 일요일이 되면 성경책 가지고 교회에 갑니다. 그런데 불자인 우리는 부처님께서 정해 놓은 육재일이 언제인가도 기억을 못 해요. 그냥 부처님 법을 최고로 믿고 있으니까 좋다, 이런 생각만 있지 법을 지키려고 안 한단 말입니다. 이슬람교도 라마단 같은 때는 한 달 동안 온전히 단식을 합니다. 해 떠서 해질 때까지 말이지요. 한데 우리 부처님 제자들은 부처님 가르침을 믿으려고 하지 않아요. 사실은 그것이 꼭 필요한 것인데, 건강에도 필요하고 공부에도 필요한 것인데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육재일에는 일종식(一種食) 하고 고기도 안 먹고 술도 안 먹어야 됩니다. 부부생활도 그때만큼은 청정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인간생활을 정화시켜야 합니다. 우리 인간생활을 영원으로 차근차근 이끌어 가야지요. 부처님 법은 우리한테 최상의 행복을 보장하는 가르침이고 사회적으로 보나 어떤 면으로 보나 최선의 가르침입니다. 그러한 데서 자부심을 가지십시오. 지금 모든 철학이 부처님 지혜를 차근차근 따라가고 있습니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같은 사람들이 어려운 실존철학(實存哲學)을 말했지만 실존이 무엇입니까? 실존이란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생명 자체란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같이 명백하게 실존을 밝혀 놓은 것이 없습니다. 물질이 아무리 미세하고 현대과학이 비대하게 지배하고 있지만 그 본래의 자리, 미세한 그 자리는 현대과학 역시 지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 '제법이 공'이라는 그 자리까지는 현대과학도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그 공(空)의 알맹이는 무엇인가, 생명 자체는 무엇인가, 이것을 모른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불교 아니면 알 턱이 없습니다. 기독교 역시 예수의 가르침에서 하늘이라는 것이 당시 하늘 어디엔가 계시는 사람 같은 모양이 아니라 하나의 우주의 진리를 말한 것이기 때문에 같다고 봐야지요. 그런 성자의 가르침만이 눈에 안 보이는 세계, 눈에 안 보이는 생명 자체를 그대로 밝혀 놓았습니다. 그런 자리에다 우리 마음을 둬야 합니다. 그런 자리에다 우리 마음을 두는 것이 참다운 명상이고 참다운 종교입니다.
[- 불기 2544년 10월 진주 선우선방, 특별법회 법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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