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성철스님] 인천보감(人天寶鑑) 18

通達無我法者 2008. 1. 4. 11:37

인천보감(人天寶鑑)

소동파(蘇東坡)가 말하였다.
ꡒ배가 고프거든 비로소 밥을 �되 배부르기 전에 그만 먹어야 한다. 산보하고 거닐며 배를 꺼트려 배가 비게 되면 조용한 방에 들어가 단정히 앉는다. 그리고는 생각을 가라앉혀 내쉬고 들이쉬는 숨을 센다.
하나에서 열까지, 열에서 백까지 세어 수백에 이르게 되면 몸은 우뚝해지고 마음은 고요해져 허공과 같아지니 번거롭게 꺼리고 다스릴 일이 없어진다. 이렇게 오래 하다 보면 한 숨이 스스로 머물러 들어가지도 나가지도 않게 될 때가 있다. 이때 이 숨이 8만 4천의 털구멍을 통해서 구름이 뭉치듯, 안개가 일듯하는 것을 깨닫는다. 무시이래의 모든 병이 저절로 없어지고 모든 업장이 소멸되어 저절로 환히 깨닫게 되는 것이니, 이 때가 되면 남에게 길을 물을 필요가 없다.ꡓ

덕산 연밀(德山緣密:五代 宋나라 운문종)선사의 회하에 한 선승이 있었는데, 공부가 매우 예리하였다. 그는 ꡐ개에게는 불성이 없다ꡑ는 화두를 들고 있었는데 오랫동안 깨달은 바가 없었다. 하루는 홀연히 해 만큼이나 커다란 개머리가 입을 벌리고 자기를 잡아먹겠다고 덤벼드는 것을 보고는 겁이 나서 자리를 피해 달아났다. 옆 사람이 그 까닭을 묻자 자세히 이야기해 주고는 마침내 덕산선사에게 아뢰니 덕산선사가 말하였다.
ꡒ두려워할 것 없다. 단지 더욱 정신을 바짝 차렸다가 개가 입을 벌리거든 그때 그 속으로 뛰어 들어가거라. 그러면 없어질 것이다.ꡓ
그는 가르쳐준대로 앉아 있었다. 밤중이 되어 개가 다시 나타나자 머리로 힘껏 한번 부딪쳤다. 그랬더니 그것은 궤짝 속이었다. 이에 확연히 깨닫고 뒷날 문수사(文殊寺)에 나아가 불도를 크게 떨쳤다. 이분이 바로 응진(應眞)선사다.

신조본여(神照本如)법사가 볍지(法智)존자에게 물었다.
ꡒ무엇이 경(經)중에서 왕입니까?ꡓ
ꡒ그대가 나를 위해 3년동안 고사(庫事)소임을 맡아보면 그대에게 말해주겠다.ꡓ
본여법사는 공경히 그 명을 받들었다. 3년이 지나자 ꡒ이제는 말씀해 주십시오ꡓ라고 다시 청하였다. 법지존자가 큰소리로 ꡒ본여야 ! ꡓ하고 부르자 그 한소리에 홀연히 깨닫고는 송을 지었다.

곳곳에서 돌아갈 길 만나고
곳곳마다 그곳이 고향일세
본래 다 완성되어 드러나는 것을
하필 사랑을 기다리랴

處處逢歸路 頭頭是故鄕
本來成見事 何必待思量

사암엄(樝庵嚴)법사는 경시(經試)를 거쳐서 출가하여 동산 신조(東山神照)선사에게 귀의하였다. 신조선사는 큰그릇이라고 여겨 ꡒ우리 종문에 사람을 얻었으니 앞으로 종문이 실추되지 않겠구나ꡓ하면서 그를 윗자리에 앉혔다.
법사는 단지 경을 강하는 것만을 제일로 치지 않고, 말을 하거나 묵묵히 있거나, 모든 처신을 반드시 법도에 맞게 하였다. 당시 법진(法眞)스님이 지관(止觀)의 부사의경(不思議竟)을 물으니 법
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ꡒ만법은 오직 한 마음일 뿐이어서 마음 밖에 별 다른 법이 없는데 이 마음법[心法]을 얻을 수 없으니 이것을 묘삼천(妙三千)이라 합니다.ꡓ얼마 있다가 법진스님이 동액(東被:궁궐 안에는 절)으로 거처를 옮기며 주지를 사임하게 되자, 법사에게 명하여 뒤를 잇게 하니 법사가 말하였다.
ꡒ옛날 지자(智者)대사는 나이 50이 되기 전에 문도대중을 흩어버렸고, 사명(四明)대사는 40이 되자 장좌불와했었다. 그런데 나는 어떤 사람이기에 이렇게 늙어서 한가하게 주지를 맡겠는가ꡑ그리하여 끝내 받지 않고 영취산 동쪽 봉우리에 은거하였는데, 그곳에 아가위나무가 한그루 있어 그 옆에 암자를 짓고 ꡐ사암(樝庵)ꡑ이라 이름하였다. 암자의 기록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ꡒ내 나이 60에 산에 돌아와 암자터를 잡았다. 암자가 다 되어 그 속에서 요양이나 하고 지내면서, 그렇다고 세상살이를 지나치게 벗어나려고 하지도 않았다. 암자 서쪽에 아가위나무 한그루가 있어 그 이름을 따서 암자 이름을 지었다. 아가위란 맛이 좋다고 이름난 과실도 아니고 배나 밤에 비하면 부끄럽게 생겼다. 그러나 배는 그 시원한 맛 때문에 칼에 베어지고 밤은 그 단맛 때문에 입에 씹히게 되니, 설혹 배와 밤에게 식성(識性)을 부여해서 그들 스스로 쓸모없는 곳에 있게 해달라고 해도 그것은 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저 아가위는 돌배의 종류에 속하는 것이어서 비록 향기는 있어도 맛이 없다. 억지로 씹으려해도 향기로는 배를 채울 수 없고 짧은 맛은 입을 상쾌하게 할 수 없으니, 삼척동자라도 이것을 찾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주렁주렁 가지에 매달려 스스로 만족하는 그 모습은 이름다운 것이다.
아! 사람은 지혜 때문에 자기 뼈를 고단하게 하고 아가위는 짧은 맛 때문에 그 몸이 편안하니, 지혜와 짧은 맛 중에 어느것이 참된가? 나는 지혜가 없기 때문에 아가위와 이웃이 되었다ꡓ

법사에게는 필요한 물건이라고는 오직 작은 발우 하나 뿐이었고, 아침 점심의 밥은 오직 세가지 흰것〔三白 : 밥과 무우와 소금〕뿐이었다. 이렇게 혼자 살기를 20년, 문을 닫고 좌선하니 세상사람이 가까이 할 수 없었다. 계율의 조목들은 경중을 막론하고 똑같이 지켰으며, 생활용구는 문빗장 같은 자질구레한 것에 이르기까지 깨끗하게 하였다. 그리고 적막함에 자족하며 오로지 정토에 왕생할 것을 기약하였다.
하루 저녁은 꿈에 못에서 큰 연꽃이 피어나고 하늘 음악이 사방에서 줄지어 들려왔다. 법사는ꡒ이것이 내가 왕생할 정토의 모습이다ꡓ하였는데, 그후 7일만에 과연 돌아가셨다.

예전에 고승 한 분이 있었는데 도와 학문이 높아 불교집안의 존경을 받았다. 만년에 황제의 명을 받고 주지가 되어 황체에게 좋은 대우를 받았다. 그런데 그가 임종할 때 황제가 몹시 슬퍼하며 조서를 내려 장례를 치르도록 하니, 신하가 말하기를 ꡒ이 스님은 의발이 너무 많아서 관청에 소송 당했습니다.ꡓ라고 하였다. 황제는 불쾌하게 생각하였고 돌보아주려던 장례도 마침내 그만두었다.
이에 소운(少雲)이 말하였다.
ꡒ아깝구나 ! 세상 명리가 그의 이름을 덮어버리고 덕을 잃게 하였다. 지금 많은 재물을 쌓아두고 또 긁어모으는 사람들이여, 어찌 삼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ꡓ

옛분이 목욕실에서 게송으로 법문을 하였다.
ꡒ본래부터 비린내, 누린내 나는 것이 임시 모여서 이루어진 몸이라/가죽과 털, 진액과 기름기가 끊임없이 생겨나니/설사 바다를 기울여 아침내내 씻더라도/나귀해〔驢年 : l2간지에도 없는 해〕가 될 때까지 깨끗해질줄 모르리/몸에서 일어나는 때는 그래도 잘 씻겨 나가지만/마음은 욕심경계를 따라가 더더욱 물이 든다/불쌍하구나, 근원을 잊은 세상사람들이여/한갓 피부만 씻을 뿐 마음은 씻지 않는구나/물통 가득 넘치는 더운 물, 큰 국자로 씻는데도/시주들은 이익이 늘 것만을 바란다/뒷 생에 자기가 온 곳을 모른다면/복이 수미산 같아도 선 자리에서 녹아짐을 보리라.ꡓ

분암주(分庵主)는 어찌나 열심히 도를 닦았던지 밥먹고 쉬고 할 틈도 없었다.
하루는 돌난간에 기대 ꡐ개에게는 불성이 없다ꡑ는 화두를 들고 있었는데, 비가 오는 줄도 모르고서 한참 후에 옷이 젖자 비가 온 줄을 알았다.
그후 강가를 걸어 가다가 ꡒ시랑(侍郞) 행차시오 ! ꡓ 하는 계사(階司)*의 고함 소리를 듣고서 홀연히 깨닫고는 게송을 지었다.

몇해나 그 일이 가슴에 결렸던가
사방에 다 물어도 눈을 못떴네
이때 간이고 담이고 다 찢어지는데
강가에서 시랑 해차시오 하는 한마다를 들었네
幾年箇事挂胸懷 問盡諸方眼不開
肝膽此時俱熱波 一聲江上侍郞來

이때부터 처소에 매이지 않고, 검문산(劍門山)에 암자를 짓고 살았는데, 그 교화가 영(嶺) 밖에까지 미쳤다. 게송을 지을 때는 붓이 달리듯 하였는데, 자신의 초상화에 스스로 글(題)을 달았다.

모습은 비구지만 말씨는 고약해
어리석고 취한듯 하나 성격만은 호탕하다
바람 불 때도 욕하고 비가 올 때도 욕하지만
자비로 치면 성인인지 범부인지 더듬기 어렵도다
매일 다리〔橋〕가엔 똑같은 사람인데
세상에 왕량, 백락* 같은 사람 없어서
일생을 헛 보내고 말았구나
面目兜搜 語言薄惡
癡癡酣酣 磊磊落落
罵風罵雨 當慈悲
是聖是凡 難莫索
每日橋頭橋尾 等箇人
世無王良伯樂 一生空過却

영원 유청(靈源惟淸 : ?~1115)선사는 남주(南州) 무녕(武寧) 사람으로 맑은 용모를 가진 분이었다. 학문을 좋아하여 지칠줄을 모르니, 태사(太史) 황정견(黃庭堅)은 ꡒ유청스님이 학문을 좋아함은 마치 기갈든 사람이 음식을 찾듯 한다ꡓ라고 하였다.
선사는 회당(晦堂祖心)선사에게 귀의하여 밤낮으로 참구하느라 자고 먹는 것도 잊을 지경이었다. 한번은 회당스님이 손님과 이야기하는 차에 모시고 서 있었다. 손님 간 지가 한참 되었는데도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었으니 회당선사가 ꡒ유청스님은 죽었는가?ꡓ라고 하자 이에 깨달은 바가 있었다.
유청선사가 불감혜근(佛鑑慧勤)선사에게 편지를 보내 이렇게 말하였다.
ꡒ제가 두 군데 주지로 있으면서 늘상 동산(東山, 五祖法演) 사형의 편지를 받았는데 이제껏 세속 일에 대한 언급은 한마디도 없었습니다. 그저 간절히 부탁하는 일은 자기 몸을 잊고 우리 불도를 널리 펴라는 것 뿐이었습니다.
제가 황룡산(黃龍山)에 도착했을 때 받은 편지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ꡐ금년에는 날이 가물어 제방 농장에서 손해를 입었지만 나는 이 일을 조금도 근심하지 않는다. 오직 근심스러운 것은 선가에 안목있는 이가 없는 일이다. 이번 하안거에 백여명이 선방에 들어와 조주스님의 ꡐ개에게는 불성이 없다ꡑ는 화두를 들고 있는데, 한 사람도 깨친 자가 없으니 이것이야말로 걱정거리다.ꡑ 이것은 참으로 지극한 말씀입니다. 절 살림살이가 갖춰지지 않은 것을 근심하고 관리들에게 밉보여 추궁당할까봐 겁을 내며, 명성이 올라가지 않을까, 문도대중이 많지 않을까를 걱정하는 사람들과는 실로 거리가 먼 분입니다.ꡓ

* 계사(階司) :고관들의 행차에 길을 인도하는 하급관리
* 왕량(王良) 백락(伯樂) :옛날에 명마를 잘 알아보던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