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보감(人天寶鑑)
불등 수순(佛燈守珣)선사는 삽천( 川)사람인데 오랫동안 불감 혜근(佛鍵慧勳)선사에게 귀의해서 공부하였다. 대중에 섞여 살며 법을 묻곤 하였는데, 까마득하여 아무것도 깨달은 바가 없자 갑자기 탄식하며 말하였다. “내가 이 생에서 철저하게 깨닫지 못한다면 맹세코 이불을 펴지 않겠다.” 이에 49일 동안을 노주(露柱)에 기댄 채 맨땅 위에서 있었는데, 마치 부모 상올 당한 사람 같았다.
한 번은 불감선사가 상당하여 “삼라만상이 모두 한 법에서 도장 찍히듯 나온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순선사는 그 말끝에 단박 깨달았다. 그리하여 불감선사를 찾아가 만나니 불감선사가 말하기를 “아깝다! 한 알의 밝은 구슬을 이 지랄병 든 놈이 주웠구나” 라고 하였다.
원오 극근(圓吾克動)선사는 이 이야기를 뜯고는 그가 아직 그런 경지를 얻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그리하여 “내가 꼭 시험해 봐야겠다”하고는 사람을 시켜 그를 불렀다. 한번은 같이 산에 갔다가 깊은 못에까지 오게 되었는데 원오선사가 순선사를 물 속에 떠밀어 넣고는 대뜸 물었다.
“우두(牛頭法嚴)스님이 4조(四祖道信)를 만나지 않았을 때는 어땠는가?”
순선사가 허우적대면서 말하였다.“못이 깊으니 고기가 모입니다.”
“만난 뒤에는 어쨌는가?”
“나무가 높으니 바람을 부릅니다.”
“만나지 않았을 때와 만난 뒤에는 어떤가?”
“다리를 뻗는 것은 다리를 오므리는 가운데 있습니다.”
이에 원오선사가 매우 칭찬하였다.
수주(秀州) 선섬(善運)선사는 다섯 살에 벌써 빼어난 기질을 보였다. 그리하여 그의 어머니가 특별하다고 여겨 자성사(資聖츄)로 보내 출가케 하니, 선사는 여러 곳의 선원을 두루 둘러보고 돌아왔다. 그런데 수주(秀州)에는
그때까지 선원이 없었고, 그·곳으로 올 사람을 기다려도 사람이 부족하였다. 선사는 머물던 절을 선원으로 고치 고 제방 선림의 청규를 그대로 시행하며 절 살림을 주관하였다.
당시 오중(吳中)의 승려들은 자리에 질서를 잃어 세력의 고하로 자리를 정하고 계율이나 덕행은 조금도 따지지 않았다. 선사는 이를 개탄하고 글을 올려 관가에서 다스려 줄 것을 구하여 그 일을 바로 잡은 적이 있다. 선사가 명교 숭(明敎쫓萬)선사에게 말하였다.
“나는 도를 가지고 그다지 세상 사람들을 지혜롭게 하지도 못했고 덕행 또한 보잘 것 없으니 윗 성인들께 부끄럽습니다. 게다가 그들이 법을 어지럽히는 것을 구차하게 참고 보고만 있으니 이것이 더욱 부끄러운 일 입니다.”
설숭선사가 말하였다.
“그렇게 겸손할 것 없다. 종문의 묘한 도에는 다 다른 사람야 드물고, 출세간 수행의 극치인 12두타(十二輝陀)는 우려 스님네들도 하기 어려운 수행이다. 법을 위해 분연히 폼을 돌아보지 않는 일도 역시 사람으로서 하기 어려운 일인데, 선사는 이 모든 것을 체득해서 행하니 무엇이 부끄럽단 말인가?
원조 종본(圓照宗本:1022-1099) 선사는 상주(常州)사람인데 타고난 성품이 순박하여 겉치레를 일삼지 않았다. 천의 회(天衣義懷)선사에게 귀의하여 헤진 옷에 때 묻은 얼굴을 하고, 물긷고 방아찧고 밥짓는 일을 맡아보았다. 낮에는 스님네들의 뒷바라지에 쫓아다니고 밤이면 새벽까지 좌선하며 고생을 무릎 쓰고 정진하였는데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수행하면서 대중의 일도 맡고 있으니 정말 수고가 많습니다”하니 선사가 대답하였다.
“한 법이라도 버리면 원만한 공부라 할 수 없다. 결단코 이 생에서 이 몸으로 깨치려는데 감히 고단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서광사(瑞光좋)에 주지 자리가 비어서 선사에게 주지하도록 명하였다. 그곳에 이르러 북을 치니 대중이 모였는데 갑자기 북이 땅에 떨어져 떼굴 떼굴 구르면서 크게 올렸다. 한 스님이 선사의 이름을 부르면서 “이것은 화상의 우뢰 같은 법음이 땅을 진동할 상서로운 징조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어느덧 그는 온데 간데가 없었다. 이때부터 선사의 법석은 큰 성황을 이루었다.
그 후에 여러 절에서 다투어 선사를 맞이해 갔고 만년에는 정자사(淨慈寺)에 주지하였다. 영지사(靈芝寺)의 조(元照)율사와 가까운 친구가 되었는데, 조율사가 법의를 주었더니 선사는 종신토록 법좌에 오를 때면 언제나 그 법의를 입었다.
동도사(東都寺)의 희법사(曉法師)가 정(定)에 들었을 때 정토를 본 일이 있었다. 그곳 연꽃에 금으로 된 글자로 ‘항주 영명사 비구 종본의 자리’라고 크게 씌어 있었다. 희법사가 그 일을 이상하게 여겨 각별히 찾아가 예를 올리고 물었다.
“선사께서는 교외별전의 종(宗)인데 어찌하여 정토에 자리가 있습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내가 비록 선문(輝門)에 있지만 늘 정토수행도 아울러 했기 때문이다.”
앙산원(仰山圓)선사는 우강(旴江)사람이다. 구족계를 받고 나서 도를 배우기로 용단을 내렸는데, 묘회(妙喜)선사가 매양(梅陽)에 있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찾아가 귀의하였다. 거기서 열심히 밥짓고 부엌일을 하며 각고의 정진을 하였다. 묘희선사는 그의 예리하고 빈틈없는 식견을 보고 남다르다고 여겼다. 한번은 소참(小參) 때 묘희선사가 다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수산주(修山主)가 ‘범부의 법올 가졌으면서도 범부를 모르고 성인의 법을 가졌으면서도 성인을 모르니, 성인을 알면 그가 바로 범부요 범부를 알면 그가 바로 성인이다.”’
앙산선사는 이 말을 듣고 홀연히 깨달음을 얻었다.
그 후에 구주(舊州) 상부사(群符寺)에 주지하다가 원주(養州)의 앙산(仰山)으로 옮겼다. 거거서 일을 맡아본 지 7일만에 선문(輝門)의 고향례(告香體 :스승에게 향을 사르며 설법을 청하는 예)를 하게 되어 수좌가 대중을 이끌고 일제히 절을 올린 다음 법을 청하였다.
“생사란 큰 일이고 죽음은 신속히 찾아옵니다. 부디 바라옵건대, 자비로서 인연을 열어 보여 주십시요”
원선사는 천천히 말하였다.
“생사대사를 밝히고자 한다면 바로 행주좌와하는 가운데서 ‘생은 어디서 왔으며 사는 어디로 가. 결국 생사란 어떻게 생겼는가’를 살펴보아야 하느니라.”
그리고는 한참을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더니 이윽고 그대로 몸을 벗었다.
대혜(大慧)선사가 말하였다.
“근대에 주지살이 잘한 사람으로는 진여 철(質如幕喆)선사만한 분이 없고, 총림을 잘 보필한 사람으로는 양기 회(楊岐方會)선사만한 분이 없다. 자명(慧、明:양기선사의 스승)선사는 성품이 진솔하기는 하였으나 일처리를 대강하는 경우가 있었고, 꺼려고 피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양기선사는 자기 몸을 잊고 스승을 모셨는데, 어디 빈틈이라도 있을까가 오로지 걱정거리였다. 심한 추위와 더위가 닥쳐와도 한 번도 자기 일을 급하게 여긴 다거나 얼굴에 태만한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다. 남원사(南源寺)에서 홍화사(興化寺)까지 30년을 자명선사의 대(代)가 다 끝나도록 이렇게 총림의 기강과 계율을 다잡았다.
진여선사란 분은 행장을 챙겨 행각 할 때부터 세상에 나가 문도를 거느릴 때까지 법을 위해서라면 자기 몸을 잊기를 기갈 든 사람보다 더하게 했다. 경황 중에도 당황하는 거색이 없고 정신 없이 말하는 일이 없었으며 온 방안을 말끔히 하고 고요함을 즐겼다. 선사가 한번은 이렇게 말하였다. ‘납자로서 안으로 고명하고 원대한 식견이 없고 밖으로 엄한 스승과 좋은 도반이 없다면, 그런 중에 그릇이 될 사람은 거의 없다.’
아! 두 분 스승이야말로 천년토록 후배들의 아름다운 모범이 될 것이다.”
석총 법공(石總、法恭)선사는 도행이 뛰어나고 재주와 역량이 대단했다. 오랫동안 천동사(天童寺)의 굉지(宏智正覺)선사에게 귀의하여 크고 작은 일을 모두 맡아보며 지냈다.
하루는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께 인사드렸는데 어머니가 말하였다.
“네가 행각하는 것은 본래 생시를 해결해서 부모를 제도하기 위함이었는데, 오랫동안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일을 맡아보고 있구나. 어쨌든 인과를 밝히지 못한다면 그 화가 지하에 있는 나에게
까지 미칠 것이다.”
법공선사가 말하였다.“저는 절 재산에 대해서는 털끝만큼도 속임이 없습니다. 등불 하나까지도 피차의 용도를 분명히 하고 있으니 염려마십시오."
그러자 그의 어머니는 “물 건너가는 데 발이 젖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하였다.
태산(泰山)과 화산(華山)도 편편하게 할 수 있고 음식은 안 먹을 수도 있지만 효도는 잊어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큰 효도는 천지 일월과 같아서 운행을 쉬지 않는다.
대계(大械)에 “부모와 스숭獅增〕께 효순하라”하여 효를 승려의 계율로 이름 지웠으나, 효를 잊어버릴 수가 있겠는가.
머리 깎고 삼보 속에 속한 우리들은 빈부귀천을 물을 것 없이 반드시 도를 숭상하고 효를 숭상해야 한다. 물어보아서·부모를 봉양할 친속이 없으면 부처님은 의발의 한 부분을 멀어 봉양하도록 허락해 주셨다. 그러니 폼소 부모를 봉양하지 않는 짜는 우리 불교 집안 사람이 아니다.
목암 법붕(救魔法朋)법사는 무주( 州) 금화(金華)사람이다. 거계(車樓) 경(卿)법사를 찾아뵙고 생사대사를 밝힌 뒤, 여러번 큰 절의 주지가 되니 학인들이 뒤질세라 모여들었다.
법사는 강론할 때마다 미리 주석서를 읽어보는 일이 없었고, 시자에게 주제를 뽑으라 하여 선 자리에서 술술술 막힘 없이 설명하였다.
한번은 대중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문도들을 지도한 이래 마하지관(塵詞止觀)을 일곱번 논강하였는데, 정작 닦는(正修〕가운데는 한마디도 입을 열어 한 일이 없다.”
또 말하였다.
“나는 대부경론(大部經論) 가운데서 조그만한 문제를 내려 할 때도 종이쪽지 만한 정도의 글도 만들 수 없다. 이것을 일러 ‘문자의 성품을 여윈 그것이 바로 해탈이다’라고 히는 것이다.”
만년에는 명주(明州) 연경사(延慶寺)에 주지하였다. 하루는 법좌에 올라 조어장부(調御圖夫)에 대해 강을 하는데 홀연히 몇 사람의 사대부가 찾아와 법사의 법문을 들었다. 법사가 말하였다.
“유교(關敎)의 장부를 논할 것 같으면 충신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사는 삶을 돌아보지 않는다. 그러므로 천하에 큰 일을 이루고 희대의 명성을 얻게 되며 마침내는 명리와 성색에 빠지지 않으니, 이런 사람을 장부라 한다. 그러나 우리 불교(佛敎)에 있어서는 일심3판(一心三觀:천태지관의 관법. 空觀, 假觀, 中觀)으로 나룻배를 삼고 6시5회(六時五悔:하루 여섯 번 예불, 참회, 권청, 수희, 회향을 하는 행법)로 노를 삼아 모든 마군을 항복시키고 외도를 누르는 자를 장부라 이름한다.”
사대부들은 이 말을 듣고 감탄하며 떠났다.
'성철스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철스님] 인천보감(人天寶鑑) 21 (0) | 2008.01.21 |
---|---|
[성철스님] 인천보감(人天寶鑑) 20 (0) | 2008.01.21 |
[성철스님] 인천보감(人天寶鑑) 18 (0) | 2008.01.04 |
[성철스님] 인천보감(人天寶鑑) 17 (0) | 2008.01.04 |
[성철스님] 인천보감(人天寶鑑) 16 (0) | 2008.01.04 |